아이들에게 코로나 백신을 맞힌다고?
이은혜 지음 / 북앤피플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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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실험용 백신을 맞히기 전에 최소한 코로나 관련 책 몇권은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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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호밀밭 >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에 가 보았네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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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스모크>란 영화를 보았다. 얼굴에 주름이 잡혀 있는 하비 케이틀이 담배가게 주인으로 나오는 그 영화는 누군가에게 줄거리를 얘기해주기 보다는 그냥 보라고 권할 그런 영화였다. '재미는 없을 거야, 그래도 한 번 봐.'란 말을 덧붙이면서. 폴 오스터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스모크>와 <달의 궁전>은 닮아 있다. 영화 <스모크>에 담배 연기가 나직나직 낮게 깔려 있다면 <달의 궁전>에는 달빛이 은은하게 깔려 있다.

<스모크>가 브룩클린에 있는 담배가게를 중심으로 일상을 차분하게 펼쳐놓았다면 <달의 궁전>의 줄거리는 조금 더 화려하다. <달의 궁전>은 줄거리만 놓고 보면 사랑, 운명, 모험, 고독, 절망, 돈 등등 긴박한 이야기 전개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두르거나 뛰어넘거나 하는 스피드한 전개,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긴 시간과 운명이 얽힌 고리, 사랑, 실연의 과정이 차분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스모크>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범해 보여도 다들 깊은 절망과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달의 궁전>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 역시 내면에는 상처와 외로움이 담겨 있다. 가볍고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담배 연기나 밝기와 무게를 측정할 수 없는 달빛이나 모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냥 공중에 날려버리면 되어 버리는 담배 연기처럼 마음 속의 상처도 가볍게 날려 버리면 좋겠지만, 담배 한 모금에 남들은 상상 못 할 고민이 무겁게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 흔한 달빛에 살아갈 희망이 생길 수도 있다. 흡연이 중독이라면 절망도 중독이다. 작은 상실감이 쌓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메꿀 수 없는 큰 구멍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고 첫장에는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반쯤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상황을 인생의 매혹적인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을 보여 준다. 주인공인 스탠리가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있을 때 본 중국 레스토랑 <달의 궁전>이라는 네온사인이 신비하고 매혹적인 신탁처럼 그의 마음을 홀린 것처럼 말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망가진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던 사람 역시 실없는 행동이 아닌 인생의 진리를 아는 암시자처럼 보인다. 에핑과 스탠리, 그리고 그 남자가 평생 동안 친구로 남을 것을 맹세하는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엄숙해 보인다. 우연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도 인간이 달에 간 것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어차피 그런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인상적인 문장은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라는 부분이었다.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 내 인생도, 다른 어떤 사람의 인생도 모두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남자들은 자신의 자식이 태어났는지, 걸어다니는지, 그 존재를 모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흔히 달이 여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성, 어쩌면 모성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결핍되어 있던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과 욕구가 이 책 전체를 이끌어가는 달의 이미지에 담겨 있는 듯 했다. 찼다가 스러지는 달처럼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넓은 하늘이 텅 비어 보일만큼 가늘게 보일 때도 있는 초승달처럼 인생의 여백,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공백도 있다. 그러다 어느날 휘영청 밝아져 하늘을 채우는 보름달처럼 내가 모를 인생의 환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 인생의 출발점은 여기야. 여기가 내 인생이 시작되는 곳이야.> 달이 뜨는 이상 인생의 꿈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마음과 같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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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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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드물게 나만의 명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유명세가 강한 작품에는 되려 거부감이 생겨 멀리했던 게 사실인데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읽어보게 되어 다행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게 여러가지겠지만, 명작과의 만남에서 오는 충격과 감동은 다른 무엇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이 가져다준 충격파가 일상의 관성에 공고하게 얽매여 있던 나의 고리타분한 생각들을 움직여 주었다면, 그리고 그게 만약 지속된다면, 그건 정말 행운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다만 책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명작이라도 읽는 이가 그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가치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달의 궁전>은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연에 대해서, 자기 처벌로서의 고행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고, 이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더 풍부한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적어도 생각에 살이 더 붙은 것 같다.

이 책은 우연과 우연의 조화로운 연결들로 점철돼 있다. 때로는 화자의 의지적 선택이 이야기의 흐름을 선도해가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단 한번의 관계에 의한 임신, 불의의 사고에 따른 척추 골절, 주인공들의 만남과 이별, 이 모든 일들은 마술과도 같이 여기저기서 솟아오른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신비한 일들의 연속에 독자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반복하는 저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고 나로서는 그게 저자의 인생관이자 문학관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우연의 미학. 그것은 단지 소설의 플롯을 이끌어가기 위한 무리한 설정이 아니라 현실인지도 모른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예측할 수 없음을 당연시할 수밖에 없는 게 포스트모던의 오늘이라면 저자의 의도된 우연들은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수많은 배우자 중에서 지금의 내 사람과 결혼한 일, 참 독특하게 조합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원인을 알 수 없는, 아니 다중의 원인에 의한 질병(multifactorial disease)에 걸려 고통을 받고, 어이 없는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 속에서 절망하며, 허구많은 직업 중에 지금의 업을 천직으로 얻어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이 모든 일들...  수 년 전, 수 십 년 전에는 미처 알 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일이지 않은가.

우리는 예측 불가능함과 우연을 우리의 운명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거기에 적응해왔고 그래서 우리가 미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많은 독자들이 이런 소설에 반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우연의 신성을 믿는다는 증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주인공들이 자기 처벌로서의 고통을 철저하게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고통스런 독서와 번역, 잔혹한 가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아의 하루하루, 하반신 마비의 반평생, 시각을 잃은 뒤의 암흑 속에서의 삶,  폭식과 비만, 내쫓기고 조롱 받는 나날들, 고행과 다름 없는 북미 대륙 횡단 등이 수없이 변주되어 나온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고통>이고 주인공들은 이것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유는 그러해야하기 때문인데, 근본적으로는 자기를 처벌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자기는 너무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코  행복해서는 안되며, 벌을 받고 나서야 그나마 너덜너덜해진 평온이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절망 아래에 선 인간이 삶을 스스로 마멸해가는 과정을 이처럼 처절하게 그려낸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만큼은 작가가 갈 데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못을 하고, 때로 크나큰 잘못을 저질러 씻을 수 없을 것같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걸 떠올릴때마다 찢어지게 괴로운 느낌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폴 오스터에게 이 문제를 매듭짓는 방법은 다만 잘못에 상응하는, 아니 상쇄하고도 남는 벌을 달게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용서의 주체가 죽어버린 상황을 설정하고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다만 고통을 짊어지고 끝까지 가라."는 명제를 주인공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주인공에게는 너무 피학적이고 작가에게는 지나치게 가학적으로 되어버린 게 안타깝다.

하지만 고행이 반드시 괴로운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극단의 상황으로 의무지워진 고통이 있었기에 주인공들의 정신이 단련되고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천권이 넘는 책을 의무감으로 씹어삼키듯 읽고서 팔아치웠던 때가 있었기에, 친구에게 신세진 것을 갚기 위해 지난한 번역 작업을 맡아 고통스럽게 한글자씩 번역을 이어가던 시절이 있었기에, 눈을 잃은 에핑에게 고용되어 날마다 책을 읽어주고 산책을 하며 주변 경관을 적확하게 묘사해야 했던 나날들이 있었기에, 마르코 스탠리 포그는 에핑의 자서전을 대필할 유일한 대가로 형성되었다.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아무리 반복된 훈련이라도 지속할 수 있다. 아니, 지속할 수밖에 없다.  두 어깨에 지워진 육중한 의무감이 오히려 무한한 단련의 기회를 선사한다. 즐겨서만은 할 수 없고, 자신에게 떨어진 소명을 받아들여야만 견딜 수 있는 수련기간이 있는 것이다. 대가는 언제나 이렇게 탄생하는 게 아닐까.

좋아하고 즐겨서 갈 수 있는 지점이 있고, 어떤 뚜렷한 목적, 그게 돈이든 명예든, 그런 걸 추구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지점도 있겠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대가들이 다다른 지점은 이들과 다를 게 분명하다.

오스터가 "작가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이런 숙명론에 물들어있는지 알 것도 같다. 쓰도록 운명지워진 사내... 그는 글쓰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끝까지 몰고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자기 좋아서 하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또한 게으름은 얼마나 많이 방기하는지. 운명 같은 일들을 얼마나 자주 소홀히 하여 놓쳐버리는지.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태양은 토마스 에핑을, 현재의 세상은 솔로몬 바버를, 달은 마르코 스탠리 포그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이 미국 역사를 관통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넓은 의미에서 봤을 때 에핑은 미국의 과거사, 바버는 미국의 현대사, 포그는 미국의 미래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포그가 꽉 차오른 달의 비상을 목격하는 것은 포그의 미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

수많은 고통을 겪음으로써 "나는 자신을 뒤에 남겼다는 것, 내가 이제는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대목,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라고 외치는 모습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내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달아오른 돌처럼 노란 둥근 보름달"로 차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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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etatext >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 하지만...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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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작품 중에 『우연의 음악』이란 것도 있지만, 이 작가는 정말로 '우연'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데 범상치 않은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 작품 『달의 궁전』에서 주인공 포그가 키티 우를 만나는 것도, 그리고 에핑의 비서가 되는 것도, 또 알고 보니 에핑이 포그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모두 '우연'의 징검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다음에 놓인 돌로 옮겨갈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아슬아슬한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훌쩍훌쩍 뛰어넘는다. 우연을 예정이나 인연으로 포장하는 장치를 과감히 배제한 채 말이다. (사실 그런 장치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초반 외삼촌의 이상한 행동이나 어머니의 출신지, 아버지에 대한 서술 등을 보면 후반부의 내용과 톱니바퀴 물리듯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자칫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원망과 거부의 심정을 이보다 더 처절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싫었어'라는 마지막 말이다. '싫어'가 아니다. 과거형이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던 과거의 내가 어느덧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버린 후 그때를 회고하는 말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떨까. 어릴 적 내가 그토록 거부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좋든 싫든 내게는 아버지의 흔적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내가 내디디는 발걸음을 알게 모르게 조종한다.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 내가 지나온 발자국이 옛날에 보았던 아버지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세대간의 갈등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섣불리 부정하거나 느슨한 바늘로 봉합하려 할 때도 갈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일 텐데 어떡하면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내가 살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고, 나와 함께 살아 온 동시대조차 나와는 다른 입장에서 사고해 온 사람이다. 항상 아들의 입장에서만 살아 온 내가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내가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걸까.

작가는 이 회의적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즉 내 미래를 담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 발견할 수 없다면 지금의 나를 담고 있었을지 모르는 아버지의 과거를 보는 것이다. 포그는 에핑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의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극한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에핑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포그 자신의 체험이다. 포그는 유일한 혈육인 삼촌이 갑작스레 죽은 뒤 그동안 상자 속에 넣어 두었던 삼촌의 책들을 꺼내 읽어나간다. 이렇게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아 그 돈으로 연명하던 포그는 결국 그로 인한 죄책감과 상실감을 못 이겨 자포자기하기에 이른다. 산 속 동굴에 은닉했던 에핑과 거지의 삶을 택한 포그는 닮은꼴이다. 또한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후 안정된 정착 대신 이곳저곳으로의 방랑생활을 택한 바버의 삶의 다른 버전이다.

우연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맺으려 한다. 글의 서두에 나는 이 소설이 우연적 요소를 과감히 나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자. 우연인 것은 세 부자의 만남인가, 아니면 그들의 모습인가. 그들이 서로를 알게 되는 과정만 본다면 그것은 분명 극적인 우연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그들 셋을 나란히 떠올리면 그들은 누가 뭐래도 부자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선택을 하여 비슷한 결과를 얻었던 세 사람의 인생이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을 전적으로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작가가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만남을 필연으로 만들 어떠한 장치가 필요 없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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