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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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드물게 나만의 명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유명세가 강한 작품에는 되려 거부감이 생겨 멀리했던 게 사실인데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읽어보게 되어 다행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게 여러가지겠지만, 명작과의 만남에서 오는 충격과 감동은 다른 무엇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이 가져다준 충격파가 일상의 관성에 공고하게 얽매여 있던 나의 고리타분한 생각들을 움직여 주었다면, 그리고 그게 만약 지속된다면, 그건 정말 행운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다만 책에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명작이라도 읽는 이가 그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가치가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달의 궁전>은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연에 대해서, 자기 처벌로서의 고행에 대해서 생각하게 했고, 이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더 풍부한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적어도 생각에 살이 더 붙은 것 같다.

이 책은 우연과 우연의 조화로운 연결들로 점철돼 있다. 때로는 화자의 의지적 선택이 이야기의 흐름을 선도해가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단 한번의 관계에 의한 임신, 불의의 사고에 따른 척추 골절, 주인공들의 만남과 이별, 이 모든 일들은 마술과도 같이 여기저기서 솟아오른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신비한 일들의 연속에 독자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반복하는 저자의 의도가 있을 것이고 나로서는 그게 저자의 인생관이자 문학관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우연의 미학. 그것은 단지 소설의 플롯을 이끌어가기 위한 무리한 설정이 아니라 현실인지도 모른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고, 예측할 수 없음을 당연시할 수밖에 없는 게 포스트모던의 오늘이라면 저자의 의도된 우연들은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수많은 배우자 중에서 지금의 내 사람과 결혼한 일, 참 독특하게 조합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 원인을 알 수 없는, 아니 다중의 원인에 의한 질병(multifactorial disease)에 걸려 고통을 받고, 어이 없는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 속에서 절망하며, 허구많은 직업 중에 지금의 업을 천직으로 얻어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이 모든 일들...  수 년 전, 수 십 년 전에는 미처 알 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일이지 않은가.

우리는 예측 불가능함과 우연을 우리의 운명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거기에 적응해왔고 그래서 우리가 미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많은 독자들이 이런 소설에 반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우연의 신성을 믿는다는 증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주인공들이 자기 처벌로서의 고통을 철저하게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고통스런 독서와 번역, 잔혹한 가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아의 하루하루, 하반신 마비의 반평생, 시각을 잃은 뒤의 암흑 속에서의 삶,  폭식과 비만, 내쫓기고 조롱 받는 나날들, 고행과 다름 없는 북미 대륙 횡단 등이 수없이 변주되어 나온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고통>이고 주인공들은 이것을 모두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유는 그러해야하기 때문인데, 근본적으로는 자기를 처벌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자기는 너무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코  행복해서는 안되며, 벌을 받고 나서야 그나마 너덜너덜해진 평온이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절망 아래에 선 인간이 삶을 스스로 마멸해가는 과정을 이처럼 처절하게 그려낸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만큼은 작가가 갈 데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못을 하고, 때로 크나큰 잘못을 저질러 씻을 수 없을 것같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걸 떠올릴때마다 찢어지게 괴로운 느낌이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폴 오스터에게 이 문제를 매듭짓는 방법은 다만 잘못에 상응하는, 아니 상쇄하고도 남는 벌을 달게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용서의 주체가 죽어버린 상황을 설정하고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다만 고통을 짊어지고 끝까지 가라."는 명제를 주인공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주인공에게는 너무 피학적이고 작가에게는 지나치게 가학적으로 되어버린 게 안타깝다.

하지만 고행이 반드시 괴로운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극단의 상황으로 의무지워진 고통이 있었기에 주인공들의 정신이 단련되고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천권이 넘는 책을 의무감으로 씹어삼키듯 읽고서 팔아치웠던 때가 있었기에, 친구에게 신세진 것을 갚기 위해 지난한 번역 작업을 맡아 고통스럽게 한글자씩 번역을 이어가던 시절이 있었기에, 눈을 잃은 에핑에게 고용되어 날마다 책을 읽어주고 산책을 하며 주변 경관을 적확하게 묘사해야 했던 나날들이 있었기에, 마르코 스탠리 포그는 에핑의 자서전을 대필할 유일한 대가로 형성되었다. 

고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 아무리 반복된 훈련이라도 지속할 수 있다. 아니, 지속할 수밖에 없다.  두 어깨에 지워진 육중한 의무감이 오히려 무한한 단련의 기회를 선사한다. 즐겨서만은 할 수 없고, 자신에게 떨어진 소명을 받아들여야만 견딜 수 있는 수련기간이 있는 것이다. 대가는 언제나 이렇게 탄생하는 게 아닐까.

좋아하고 즐겨서 갈 수 있는 지점이 있고, 어떤 뚜렷한 목적, 그게 돈이든 명예든, 그런 걸 추구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지점도 있겠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대가들이 다다른 지점은 이들과 다를 게 분명하다.

오스터가 "작가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이런 숙명론에 물들어있는지 알 것도 같다. 쓰도록 운명지워진 사내... 그는 글쓰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끝까지 몰고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자기 좋아서 하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또한 게으름은 얼마나 많이 방기하는지. 운명 같은 일들을 얼마나 자주 소홀히 하여 놓쳐버리는지.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   

태양은 토마스 에핑을, 현재의 세상은 솔로몬 바버를, 달은 마르코 스탠리 포그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이 미국 역사를 관통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넓은 의미에서 봤을 때 에핑은 미국의 과거사, 바버는 미국의 현대사, 포그는 미국의 미래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포그가 꽉 차오른 달의 비상을 목격하는 것은 포그의 미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

수많은 고통을 겪음으로써 "나는 자신을 뒤에 남겼다는 것, 내가 이제는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대목,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라고 외치는 모습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내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달아오른 돌처럼 노란 둥근 보름달"로 차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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