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호밀밭 >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에 가 보았네
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스모크>란 영화를 보았다. 얼굴에 주름이 잡혀 있는 하비 케이틀이 담배가게 주인으로 나오는 그 영화는 누군가에게 줄거리를 얘기해주기 보다는 그냥 보라고 권할 그런 영화였다. '재미는 없을 거야, 그래도 한 번 봐.'란 말을 덧붙이면서. 폴 오스터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스모크>와 <달의 궁전>은 닮아 있다. 영화 <스모크>에 담배 연기가 나직나직 낮게 깔려 있다면 <달의 궁전>에는 달빛이 은은하게 깔려 있다.

<스모크>가 브룩클린에 있는 담배가게를 중심으로 일상을 차분하게 펼쳐놓았다면 <달의 궁전>의 줄거리는 조금 더 화려하다. <달의 궁전>은 줄거리만 놓고 보면 사랑, 운명, 모험, 고독, 절망, 돈 등등 긴박한 이야기 전개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서두르거나 뛰어넘거나 하는 스피드한 전개,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 긴 시간과 운명이 얽힌 고리, 사랑, 실연의 과정이 차분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스모크>에 나오는 사람들은 평범해 보여도 다들 깊은 절망과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달의 궁전>에 등장하는 세 주인공 역시 내면에는 상처와 외로움이 담겨 있다. 가볍고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담배 연기나 밝기와 무게를 측정할 수 없는 달빛이나 모두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냥 공중에 날려버리면 되어 버리는 담배 연기처럼 마음 속의 상처도 가볍게 날려 버리면 좋겠지만, 담배 한 모금에 남들은 상상 못 할 고민이 무겁게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 흔한 달빛에 살아갈 희망이 생길 수도 있다. 흡연이 중독이라면 절망도 중독이다. 작은 상실감이 쌓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메꿀 수 없는 큰 구멍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고 첫장에는 그가 하려는 이야기가 반쯤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평범한 상황을 인생의 매혹적인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을 보여 준다. 주인공인 스탠리가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있을 때 본 중국 레스토랑 <달의 궁전>이라는 네온사인이 신비하고 매혹적인 신탁처럼 그의 마음을 홀린 것처럼 말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날 망가진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던 사람 역시 실없는 행동이 아닌 인생의 진리를 아는 암시자처럼 보인다. 에핑과 스탠리, 그리고 그 남자가 평생 동안 친구로 남을 것을 맹세하는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엄숙해 보인다. 우연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도 인간이 달에 간 것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어차피 그런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인상적인 문장은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라는 부분이었다.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 내 인생도, 다른 어떤 사람의 인생도 모두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남자들은 자신의 자식이 태어났는지, 걸어다니는지, 그 존재를 모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흔히 달이 여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성, 어쩌면 모성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들에게 결핍되어 있던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과 욕구가 이 책 전체를 이끌어가는 달의 이미지에 담겨 있는 듯 했다. 찼다가 스러지는 달처럼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넓은 하늘이 텅 비어 보일만큼 가늘게 보일 때도 있는 초승달처럼 인생의 여백,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공백도 있다. 그러다 어느날 휘영청 밝아져 하늘을 채우는 보름달처럼 내가 모를 인생의 환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 인생의 출발점은 여기야. 여기가 내 인생이 시작되는 곳이야.> 달이 뜨는 이상 인생의 꿈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마음과 같지 않더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