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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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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작품 중에 『우연의 음악』이란 것도 있지만, 이 작가는 정말로 '우연'을 작품 속에 녹여내는 데 범상치 않은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 작품 『달의 궁전』에서 주인공 포그가 키티 우를 만나는 것도, 그리고 에핑의 비서가 되는 것도, 또 알고 보니 에핑이 포그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모두 '우연'의 징검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다음에 놓인 돌로 옮겨갈 수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아슬아슬한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훌쩍훌쩍 뛰어넘는다. 우연을 예정이나 인연으로 포장하는 장치를 과감히 배제한 채 말이다. (사실 그런 장치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초반 외삼촌의 이상한 행동이나 어머니의 출신지, 아버지에 대한 서술 등을 보면 후반부의 내용과 톱니바퀴 물리듯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자칫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원망과 거부의 심정을 이보다 더 처절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싫었어'라는 마지막 말이다. '싫어'가 아니다. 과거형이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던 과거의 내가 어느덧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버린 후 그때를 회고하는 말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떨까. 어릴 적 내가 그토록 거부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좋든 싫든 내게는 아버지의 흔적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내가 내디디는 발걸음을 알게 모르게 조종한다.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 내가 지나온 발자국이 옛날에 보았던 아버지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세대간의 갈등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섣불리 부정하거나 느슨한 바늘로 봉합하려 할 때도 갈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일 텐데 어떡하면 내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내가 살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고, 나와 함께 살아 온 동시대조차 나와는 다른 입장에서 사고해 온 사람이다. 항상 아들의 입장에서만 살아 온 내가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내가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걸까.

작가는 이 회의적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듯 하다. 즉 내 미래를 담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 발견할 수 없다면 지금의 나를 담고 있었을지 모르는 아버지의 과거를 보는 것이다. 포그는 에핑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의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극한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몰았던 에핑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포그 자신의 체험이다. 포그는 유일한 혈육인 삼촌이 갑작스레 죽은 뒤 그동안 상자 속에 넣어 두었던 삼촌의 책들을 꺼내 읽어나간다. 이렇게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아 그 돈으로 연명하던 포그는 결국 그로 인한 죄책감과 상실감을 못 이겨 자포자기하기에 이른다. 산 속 동굴에 은닉했던 에핑과 거지의 삶을 택한 포그는 닮은꼴이다. 또한 그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후 안정된 정착 대신 이곳저곳으로의 방랑생활을 택한 바버의 삶의 다른 버전이다.

우연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맺으려 한다. 글의 서두에 나는 이 소설이 우연적 요소를 과감히 나열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자. 우연인 것은 세 부자의 만남인가, 아니면 그들의 모습인가. 그들이 서로를 알게 되는 과정만 본다면 그것은 분명 극적인 우연이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그들 셋을 나란히 떠올리면 그들은 누가 뭐래도 부자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선택을 하여 비슷한 결과를 얻었던 세 사람의 인생이 과연 우연일까.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을 전적으로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작가가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만남을 필연으로 만들 어떠한 장치가 필요 없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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