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김성동 지음 / 푸른숲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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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순진하고 정직한 ,도덕적인, 법을 고수하는 승이 도를 찾아 방황하는 모습을 제법 진지하게 그린 작품이다.

아직 세상 경험이 없었고 법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주인공 법운의 고뇌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알고있었던, 찾고있었던 도가, 법이 깨끗하고, 순수해야한다는 믿음, 고정관념에서 오는 고뇌가 아니었을까. 도가 실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또 그것 아닌 것도 아니었음을 얼핏 느끼게 해주었던 소위 땡초 '지산'의 등장이 법운의 고뇌, 법운의 화두를 탄생시켰다.

바로 '진리란, 도란 무엇인가....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지산의 행동은 법운의 순진무구한 눈에 혐오를 느끼게하는 것 뿐이었지만 서서히 그의 행동 속에서 법운은 도의 실체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그는 도인인가, 각자인가....."깨끗함을 알려는가, 질리도록 더러움을 겪어야한다. 여자의 더러움을 알려는가. 그럼 여자를 알아야한다. 겪어야한다. 그래야지 초월할 수 있다. 도 또한 그런 것!"

법운은 너무도 때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전혀 도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도에 대한 환상이 지나쳤다. 나는 지산이 득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만 조금만 그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머지않아 득도할 가능성이 있는 자는 '지산'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은 그가 온갖 더러움을 더럽지 않게 알았다는 것. 또 그것을 몸소, 질리도록 경험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체 자신의 삶을 목적없이, 의지없이 완전히 내맡겼다는 점이다.

법운은 그 추함은 싫었음에도 지산의 그 추함조차 뛰어남은 무욕과 무의지에서 자신의 '도의 환상'이 해체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하산한다. 그는 그 추함, 모든 추함조차 포용하고 있는 그 도를 배우러 하산한 것이다.

<만다라>의 허무, 고독.....이는 도를 그리워하는 자, 법운의 깨달음으로 가는 중간 단계의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배워야할 도는 이제 '세상의 거부'가 아니라 '세상에의 내맡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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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 - 에오명상전집 8
무묘앙에오 지음, 박은혜 외 옮김 / 모색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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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암, 에오는 일본이 낳은 그러나 가장 일본인 같지 않은 철학가, 그것도 깨달은 철학가가 아니었나 싶다. 일련의 에오시리즈...<폐허의 붓다><반역의 우주><지구가 꺼질때의 좌선>등등, 그 작품의 겉 제목만을 보면 그저, 흔한 불교책이 아닐까, 또 이 책들을 명상신서에서 보았다면 흔하디 흔한 명상서겠지....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불서이면서 하나의 종교로서 불교가 싫어하는 기독교 이상으로 모든 종교를 모독하고 있다.

종교를 모독하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저 광기의 철학자 니이체의 신랄한 어투와도 많이 닮아있다. 에오만큼 플라톤식 환상에 빠지지도 않고 철저한 철학가가 있었을까. 단지 인간사에 그친 편협적 철학뿐 아니라 전세계와 우주까지 넘다들며 그렇게까지 광대하게 진리를 고민했던 것만 봐도....

그러나 이렇게 진리를 고민한 철학자는 드물었지만 많았다. 철학가 에오가 무엇보다 그들보다 다른 점은, 단지 철학가에 그쳐 이론을 주절거린 것이 아니라 바로 통렬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한 인간의 고뇌하는 철학, 신랄한 철학에서 명상철학으로, 선불교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알고있는 한 이름난 성인으로 붓다, 라마나 마하리쉬, 오쇼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등이 있다. 그들의 저서들을 보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각고의 노력끝에 우리들의 2차적 으로 걸러서 그 깨달음의 진수를 겨우 맛볼 수 있게 했기때문에 어찌보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 깨달은 이들의 뜻을 전달받을 수 없었다. 제자들의 견해와 도저히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선 그들의 체험상태를 뭐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단지 그들을 직접 보아야만 그 엄청한 비밀을 맛볼 수 있었을까. 반명 에오는 그 책만으로 충분한 답이 있다. 그리고 개인의 실천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만큼 집단성을 거부한, 개인적인, 고독한 철학이 있을 까. 이것이 바로 본질이며, 자유이며 선의 정신, 그것이다.

우리는 어떤한 진리에 몰입할 때도 도저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내질 못한다. 꼭 무리를 짓는 습성이 있다.

에오는 철학가였다. 그리고 그가 깨달았을때 그 친절한, 논리적 철학가의 문장은 설득력있게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의 진수를 맛보게 해주는 것 같다. <작은 붓다의 큰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련의 에오책들은 어느 하나 빼놓을 글자가 없다. 그 글자 하나하나는 그의 고통이며 지복의 피들이다. 그의 날카롭고 간결한 문장력, 솔직함, 그리고 깨달음의 정신은 폐부 깊숙히 당신의 사상을 일단 전변시키고 말 것이다. 그 다음의 행동전변은 우리의 몫!

그러나 그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세속적 행복을 원하는 단지 고뇌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어떤 위안을 주는 책이 절대 아님을 유의해야한다.

더 큰 고뇌가 찾아올 것이고 어찌보면 낭떠러지까지 밀어내는 책이랄까.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책이다. 이것은 삶의 책이 아니요, 죽음의 책이다. 삶의 긍정성, 찬란한 생명체를 신봉하는 모든 자들은 이런 책에서 구역질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읽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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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 마로니에북스 35
미시마 유키오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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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타고난 말재주꾼이었던 것 같다. 예술가라고 하기에 왕성한 그의 사회 이력을 보면 그러한 입씸을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즉 예술가는 비활동적인 사람이 빚어낸 연약한 활동의 산물이 아닌가. 만약 예술가가 사람들과의 정력적인 접촉으로 인해 처세적 기질을 발휘하게 되면 그것은 사업가지 예술가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사업가의 탈을 쓴 예술가가 태반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입씸과 그놈의 얄팍한 인격과 인맥 덕이랄까.

전에는 완벽하다, 어둡다, 라는 이유로 이 작품에 열광했던 적이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고, 글자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숨막힐 정도로 강렬하고 매혹적이었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도...... 그런데 이번에 또 읽은 결과는 의외였다. 내가 변한 것일까? 과연 꼼꼼히 읽어도 완벽한 문체인 것은 여전했다. 완벽하다 못해, 그 현란한 표현에 드디어 드디어 두손 두발 다 들었다고 할까. 그야말로 질려 버린 것이다.

완벽함의 헛점이랄까. 뛰어난 미인은 우리를 압도하지만 어쩐지 진력이 나는 것처럼. 너무도 잘 떠들어서 진실성의 결핍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공연한 트집인지도 모르겠다. 찾다 찾다, 발견한 헛점.....중간 이상 쯤 가면 줄거리가 현저하게 작위적으로 흐른다. 말로 다 떼우는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실제 금각사 방화사건에 대한 실화 소설이니만큼 그것을 겪지 못한 작가는 고심 고심하면 온갖 근사한 문체로 덕지덕지 처바른 것 같다..그런데도 그 둘러대는 입씸, 그 언어, 그 이미지는 어찌나 강렬하고 현혹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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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 마로니에북스 3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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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명상가 무요앙 에오는 <설국>을 읽고 뭔지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깨달음에 가까운 경지를 아는 사람같다'라고 했다. 야스나리는 책 중의 주인공 시마무라의 말을 빌어 <멍하니 텅빈 것 같은 상태>라는 말을 한다. 시리도록 투명한 눈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가벼운 사랑, 부유한, 그렇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한량이 갖는 어떤 자연적 감수성이 너무도 눈물나도록 아름답게 묘사된 책이다. 우리의 상식으론 눈물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너무도 투명하게 아름다워서.

주인공 시마무라는 얄미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성이 없는 사람같다. 마치 그는 거울과도 같다. 그의 눈에, 마음에 비추어진 사물, 사람, 나아가 아름다운 여인들, 요오코, 고마코조차 마치 맑고 투명한 거울에 비추어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거기에 가볍게 감각의 생채기, 추억이 남았건만 그 회상조차 객관적이고 투명한 느낌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환상으로서의 그 겨울의 느낌! 시마무라는 시종 무심의 감정이면서 고도의 의식상태 속에 있는 사람처럼 한걸음 떨어져 '관찰하는' , 주관과 애착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관찰자의 섬세한 감각의 시선으로 눈의 고장에서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들, 고마코 그리고 요오코에 대한 추억을 회상한다. 그리고 하나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처럼 그녀들의 모습, 오직 그 모습만을 집중 묘사하고는 사생활에 관한 부분은 가볍게, 궁금할 정도록, 감질날 정도로 조금 표현함으로써 그녀들의 심리상태는 물론, 나아가 엄청난 신비과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그것이 또한 못견디도록 재미난 요소라고 할까. 이는 이 글의 목적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환을 담기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이것이 아마도 일본의 심미주의라는 걸까.

생각건대 야스나리는 오로지 이 문학을 탄생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섬세한 감각의 연마를 한 사람같다. 그의 초연하고 투명한 문체는 너무나도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투명한 군더더기없는 문체의 거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책을 많이 읽다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거울의 눈에 비친 세상의 진실이란 그처럼 투명한 느낌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 그 거울에 똥물이 튀어 아무것도 보게 없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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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2
에리히 케스트너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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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단점은 무언가의 도덕적 메세지라는 것이다. 옥에 티다. 그것만 없었으면 그 얄궂은 교훈성을 구지 전달하려 애쓰지 않았더라면 완전 무결한 걸작이었을텐데..... <파비안>은 소위 세태의 난장판 속에 유달리 상처받기 쉬운 의식의 노예..악에 냉정하고 정의 에 불타는....그러나 그 도덕적 인간이란 내게는 하나의 귀찮은 단점으로 보일뿐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고독하고 자의식적이고 양심적 인간 파비안의 불행, 어둠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어야 옳다. 특히 파비안을 죽게 만든 도덕적 비극, 수영하는 아이들을 구해주려다 죽는 것의 설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엉뚱한, 작위적, 구태의연한 도덕교훈적 비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족이랄까. 이것은 천재들이 저지르는 황당한 실수, 뭔가 극적 효과를 주지않고는 못배기는 소설가적 상상력의 군더더기 결말이다. 파비안의 귀찮고 불편한 의식은
동정했으면 동정했지, 나는 하등 고결한 감정은 받을 수 없었다. 그 의식과 그 고뇌, 그 인류사의 고뇌를 저 혼자 담뿍 안은 듯한 도덕성을 무슨 우월한 정신적 인간인양 추켜세우고 싶지않다.

그런데 그것을 다만 중얼중얼 설교하는 책이었더라면 ......결국 이 작품을 집어던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종일간 불편하면서도 목구멍에 치미는 묘한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 압박감은 장중한 영화, 심각한 영화를 볼때와 마찬가지의 어떤 진지하고 엄숙한 느낌이었다. 중후한 무게감, 암울한 분위기로서의. 도덕적 인간의 냉철하고 섬세한 눈길로 세상의 모순을 핵심만 간추려 정확히 묘사한 점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작가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는 압권이다. 게다가 시적 서정성이 풍기기까지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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