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박영돈 지음 / IVP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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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서 일고 있는 성령의 운동에 대해서 크게 우려를 표하면서 이 책을 대하게 되었다. 

이런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누가 나서서 확실하게 평형을 잡아 주지 않는 한

제대로  균형잡힌 성경적 관점을 갖기가  쉽지 않다. 교회에서 매년 부흥회를 하지만 오히려 평상시의 예배보다

더 성경적이지 않은 집회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 오히려 일선에서 평범하게 목회를 하시는 분들

보다도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분들에게서 이런 그릇된 성령의 얼굴을 많이 보게 된다.

 

저자는 보수적인 신학자이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목회일선에 계시는 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자이면서

현장의 시각으로, 성령에 대해서 펜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일반 성도들의 마음도 충분히

헤아리면서 또한 목회자들의 마음까지도 일일히 꿰뚫며 무엇이 그릇된 가르침이고 어떤 것이 바른 성령관인지를

철저하게 성경적인 관점에서 낱낱히 해부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견해를 모두  받아 들일 수는 없지만 그가 충분히

바른 시각으로 성경말씀의 바탕위에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몇년전에 방언 열풍이 한국교회에 일었었다. 김우현 감독이 쓴 방언에 관한 책과 그에 뒤이어 이에 반대하는

옥성호씨의 책이 나왔는데  두 책은 방언에 대해서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성도들은 오히려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김동수 교수의 책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고수한  김우현 감독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나왔다. 이 책은 그 뒤를 잇는 책으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방언에 대해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며 설명하고 있다.

성령의 음성과 성령의 체험,신유-치유의 문제, 방언, 불세례등의 단락으로 나눠서 각각에 대해서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이 부분에서 방언과 치유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치유는 부분적인 치유를

 인정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2년간 발로 뛰면 자료를 직접 수집했고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찾아간 기도원의 사례가

나오는데 실제 현장을 방문해서 현재 한국의 기도원에서 어떤 그릇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리고 치유집회를

방문해서는 어떤 치유의 역사가 그릇된 것인지를 성경적인 검증을 통해서 확인하며 시비를 가리고 있다.

평신도가 읽기에도 전혀 부담없이 읽힐 수 있는 책이면서도 성경적인 잣대에서 벗어남이 없는 명쾌한 해답을 이어 나가고

있어서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어떤 것인지를 시원하게 알 수 있다.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기적이나 표적도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치유든 방언이든

그것을 통해 치유받았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방언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것으로 인해서 열등한 신앙이라는 자책에 사로 잡힐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월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신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므로

주셔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기쁨을 맛보게 하고 깊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또 어느 누구는 그것이 없어도 충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내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기에 주시지 않기도 하신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특별히 일반 성도들 보다도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더 성령을 사모하고 갈급하게 되지만 더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에 많은 공감을 했다. 일반 성도들은 자신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내주로 인해서

기쁨과 감사 를 누리게 되지만 목회자는 성령을 받아서 자신의 명예와 교회의 외적 성장등의 개인적인 이유가 더 크기 때문에

그런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에서는 성령을 받기가 어렵다고 말을 한다. 우리가 흔히 듣게 되는 성령의 불세례를 또 받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이미 주님을 믿은 신자들에게는 믿음의 고백과 죄사함과 성령의 세례가 동일선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다시 불세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 계통이나 부흥회에서는 강사들이 다시금 성령의 불세례를 받으라고 강요하고

있는데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들과 같은 그런 세례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을 한다.

 

대개 부흥사들은 다혈질의 성격인 사람이 많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다혈질인 사람일수록 빠르고 급한 성과를 원하기

때문에 사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를 바로 눈 앞에서 빠르게 보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조급증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맞물리면서 성령의 바른 원칙 보다는 변칙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제어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하기를 원하는 유혹에 사로 잡히게 된다.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성령의 방법을 떠나서 육신의 성급함에 이끌릴 때 미혹의 영이

역사하게 된다. 이렇게 강제로 믿게 하는 것은 일종의 영적인 폭력이 된다. 주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은 성령을 이용하지

않고  십자가를 전제한 복음의 바탕위에서 온유함으로 전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겸손과 눈물과 오래참음으로 일하는 것이

성령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특별히 성령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룩한 수줍음'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다.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의 능력이 과시되지 않도록 사려깊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조금만 불려 다녀도

 복음 속에 감춰진 자기기만의 모습을 위장하면서 성령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자신의 능력만 부각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끌어 당겨서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한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이들이 많다. 그렇기에 수많은 집회가

열리지만 꼭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와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왜 성령체험을 받기를 원하는지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 한다. 방언이나 에언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은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다.성령을 체험하면 삼위하나님과 너와 나를 체험하는 것이다.이것이 천국공동체를 체험하는

성령체험의 삼박자다. 성령과의 교제만를 원하는 일위도 그릇된 것이고 하나님이 빠진 이위의 교리도 그릇된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비결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인데  현대 성령 운동의 문제는 이 죽음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

영광과 능력만을 갈구하는 데 있다. 현대 은사 운동이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혼란을 야기한다면 보수교회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깡그리 무시해 버림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은사중지론'이라는 틀에 묶여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 오류도 없어야 하고 '경험의 틀'이라는 것에

꿰맞추기 식으로 성경을 조작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들리지 말고

성경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성령충만은 영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인정하는 교회와 개인만이 받을 수 있는 은혜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를 향해서 던지는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한국교회는 성령이 사용하시기에는

너무 비대해졌다.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큰 부흥을 일으키기 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 가도록 충분히

작고 연약하고 가련한 자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외형적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숫자와 조직과 재정의

위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충만하게 하시기에  충분히 작고 가난하고 애통해하는 교회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케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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