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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이런 작가가 있는줄도 몰랐다. 재미있다더라, 꼭 읽어봐야한다, 라는 입소문의 책들은 다 찾아 읽어보는 편인데,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은 이 작가의 책은 그다지 대중적이지가 않고 어렵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의 작품의 어떤 매력이 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는가. 그것이 궁금해서 구입해 읽어보았다.
초반엔 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작가의 스타일에 익숙해질 때 까지는. 주인공 남자의 의식세계와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다. 작가의 서술방식은 우리가 알고있는 기본형식을 파괴한다. 이런류의 소설은 읽기 힘들고 집중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도닦는 마음으로 맘을 비우고 읽어야 한다.
이별의 짧은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사라진 아내의 행적을 좇아 뉴욕에 온 주인공. 그의 의식은 현재에만 머물지 않고 과거,혹은 다른 차원을 넘나든다. 그의 넋두리, 혼잣말은 변화무쌍하고 끊임이 없다. 엉뚱한 상념들.. 길거리에서 만난 여성을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내동댕이 치고 싶었다(p42)는 둥의 우스꽝스러운 생각들. 밤에 호텔방에서 잠들때 어떤식으로 잠드는지 의식을 지켜보겠다(p52)는 둥의 기이하고 아이같은 행동들. 늘 악몽에 시달리며 정서가 불안한 남자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자라면 그런 어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웃사이더같이 겉도는 모습이 닮았다.
처음엔 그의 두서없는 생각들이 어처구니 없고 정신이 없지만 계속 읽다보면 생각의 가닥들로 길을 잃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생긴다. 그는 고독하구나. 외롭구나. 낯선 도시 뉴욕에서 홀로 거리를 배회하면 그의 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그나저나 그의 아내는 왜 떠났는가. 그의 행동이 좀 정상이 아닌듯한데, 그것은 혼자만의 모습이고, 타인 앞에서는 소심하고 그냥 평범한 남자같은데 말이다. 지금 독자가 보는 모습은 여행중의 모습이고, 일상을 떠난 여행중에는 돌발행동과 일탈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평상시의 모습을 모르니 나도 모르겠다.
아내 유디트를 좇아 뉴욕에 왔지만 그는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하고, 자신의 행적과 행선지를 숙소에 남기며 유디트가 찾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옛친구 클레어와 그녀의 아이와의 여행. 드디어 그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에서 벗어나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클레어의 아이를 살뜰히 보살피는 것을 보면 그는 다정하고 순한사람. 클레어에게 아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아내와의 이별의 과정을 되짚어보며 처음엔 사랑했던 두 사람이 다투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무관심해지게 되면서 결국은 멀어지게 됐음을 떠올린다.
클레어와 그녀의 아이와 작별을 하고 혼자가 된 그는 다시 강박증이 도지고, 그의 여정을 뒤좇는 유디트의 짖궃은 장난은 그를 더욱 초조하게 하고 공포감 갖게 한다. 도플갱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질 않나, 자신은 잉여인간이라 생각하기도 한다(p169). 동생을 만나러 오리건의 벌목장으로 힘겹게 찾아가서는 똥을 누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마치 그것만을 보러 왔다는 듯 다시 돌아가는 그의 행동이라니(p186). 책을 거의 다 읽다 보니 이런 부분들이 재미있고, 작가 특유의 재치임을 알겠다. 상식을 파괴하는 인물의 순수성이랄까 그 엉뚱함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빠져들게 된다. 주인공에게 애정이 간다.
그런데 투손에 있을땐 5월이라더니 에스터케이더에 넘어와서는 연말이란다. 뚝 잘려진 여정, 서사를 파괴하는 그의 의식세계. 더 이상 그런 형식에 연연해 하고 괴로워하지 말자. 그게 이 책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즐기자.
이야기의 막바지에 그는 서해안 바닷가 마을 트윈록스에서 유디트와 재회하고, 그들은 그동안의 증오와 미움을 털어버리고 화해하며 쿨하게 헤어지기로 한다. 유디트의 과격한 행동을 보고 혹시 마지막에 주인공이 유디트의 총에 맞아 죽는건 아닌지 비극적 결말로 끝날까봐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 다행이었다. 작가는 비관론자는 아니었고 이 책은 그렇게 어두운 소설이 아니었다. 둘이서 그가 꼭 만나고 싶어 했었던 존 포드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한 결말이었다.
어쨌든 솔직히 책이 두껍지 않아 다행이다. 오백페이지 이상 분량의 긴 소설이었다면 나도 주인공을 따라 정신분란이 일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책을 다 읽도록 주인공 이름은 안나온다. 정도 들었는데. 시대도 언지엔지 모르겠다. 쥬크박스라니.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 열풍이 하루종일 불어대는 아리조나주의 투손, 그곳의 모래바람과 선인장. 해발 천미터가 넘는 오리건주 에스터케이더 산악지대의 나무들. 미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방황하는 지친 영혼을 만나보자.
깊어가는 가을.. 지적허영을 한껏 채우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시라. 읽을 땐 힘들겠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그만큼 뿌듯함이 가득할 것이다. 그 성취감은 힘들게 등산해서 정상에 오른 그때 기분이랑 비슷하다.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를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안타깝게도 품절이다. 절판 됐나보다. '녹색의 하인리히'라는 책은 검색이 안되는 것을 보면 이 책 속의 가상의 장치인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뒷편의 작품해설을 읽어 보면 이 어려운 책에 대한 가닥이 조금은 잡힐 것이다. 그리고 쉽지 않은 책을 깔끔한 문장으로 번역해 주신 안장혁 번역가님께도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