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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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것은 작가의 여행에 대한 짧은 단상, 에세이, 혹은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한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다. 이 책은 작가의 모든 역량과 사유가 가득 담겨있는 만물상과 같다.

 여행을 다니면서 공항, 혹은 호텔 탁자 등에서 끄적인 메모도 있고, 짧거나 긴 소설도 있고, 여행 중 만난 괴짜들,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형식과 서사는 무시되고 에피소드들이 허구인지 실제인지도 애매모호하다.

 도입부에서의 이 책의 정체에 대한 헷갈림 혹은 의혹을 이겨내면 그 다음부터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렇게 친절하지 않은 책은 독자에게 자립심을 키워준다. 작가나 출판사가 떠먹여주지 않는 책이다. 독자가 스스로 정리하고 생각하며 이 책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읽어야 한다.

 책 속에도 이러한 무정형의 방식에 대해 작가의 망설이는 마음이 적혀있다. 그렇지만 이런 두서없는 형식도 새로워서 좋다. 독자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한 흔해빠진  여행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관점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필히 읽어보시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쿠니츠키의 이야기'가 있다. 여행 중 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실종되고 섬은 발칵 뒤집히고 남자는 망연자실한다. 그 좁은 섬에서 아내와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나.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한참 뒤에 잊어버리고 있을 때쯤 나온다. 아내와 아이는 돌아왔지만 사흘간의 실종에 대한 대답을 끝내 듣지 못한 남자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아내와 헤어지고 텅 빈집을 뒤로 한 채 여행을 떠난다.

 

 모험을 원한다면 '재의 수요일' 을. 흰고래잡이를 꿈꾸는 유람선 선장 에릭의 이야기가 있다. '모비딕'에 대한 오마주인가. 에릭은 승객을 싣고 배를 돌려 미지의 바다로 향한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해 먼 바다로 향하는 자유가 바다에 펼쳐진다.

 

 관능적 육체의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블라우 박사의 여행을 읽어보시라. 인체의 신비와 그것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강렬하다 못해 괴기스럽다. 외발의 필립 페르헤이언의 해부학 연구도 흥미롭다.

 작가의 독특하고 은밀한 취향, 해부학과 인체의 보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이 책 속에 담뿍 담겨져 있다. 작가는 인체를 박제한 표본과 기형의 신체부위를 액체에 담가 보존한 전시물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관심을 보인다. 이 분야는 종교적으로 약간 금기의 학문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전문 분야이기에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나게 읽었다. 신체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연구하며 보존하는 사람들도 어떤 의미로는 여행자이다. 인체의 무한한 영역, 그 미지의 세계로의 발걸음이 이 책 안에 가득하다.

 라위스 박사의 특별한 보존제 제조비법이 궁금하다. 교수형당한 여성을 보존해서 사람들 앞에서 해부하는 라위스의 쇼는 그로테스크했다. 이것이 역사에 실제 일어났던 일인가 아님 작가의 허구인가 의아스러우면서도 작가가 펼치는 인체의 신비에 빠져든다.

 마오리족은 가족이 죽으면 그 머리를 찌고 훈제하고 기름으로 코팅해 영구 보존하면서 애도를 한다니. 하하하.

 쇼팽의 심장. 정말인가 찾아보니 진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당에 따로 안치되어 있단다. 작가의 허구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는 역사 속 실화였기에 놀라웠다.

 

 병든 아이와 무기력한 남편으로부터 해방되는 하루, 맘 놓고 울 수 있는 곳을 찾아 도시를 배회하는 가엾은 여성의 이야기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노속생활을 하는 그녀에게서 자유의 냄새가 난다. 진정한 방랑자란 그런 것이 아닐까. 벗어나고 싶은 골치 아픈 현실을 털어버리고 홀가분해 지는 것. 그곳이 거리이든 어디이든 상관없다.

 

 고통을 끝내달라는 옛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러 먼 여행길에 오른, 신의 영역에 도전한 생물학자도 나온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끝마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의미심장했다.

 

 이 책은 평범함을 거부하는 모든 모험가들, 연구자들, 실험자들에게 바치는 찬사이고,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는 방랑자들에게 떠남을 재촉하는 글이다.

 어떤 식으로든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방랑자이고 길을 떠난다. 모든 떠나는 사람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응원의 매세지이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격려이다.

 나로 말하자면 내 현실을 벗어날 용기도 없고 돈도 없고 의지도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일탈 할 수 있는 공간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방랑자들'을 읽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떠나지 않고도 떠남을 느낄 수 있는 책, 이곳에 있으면서도 딴 곳에 있는 것 같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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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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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한 번 펼쳤다. 좋았었다는 느낌만 남았지 내용은 까마득히 잊어버려 첫 페이지부터 새롭다. 첨 읽는 책 같으면서도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느낌. 오래전 다녀간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아간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박완서 선생님의 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는 사실에 마음이 더 애잔해진다. 집에 있는 박완서 선생님의 다른 책도 모두 읽어 보아야겠다. 마음이 마구 설렌다.

  이 책을 언제 읽었더라. 삼십대 초반 같기도 하고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라는 제목 자체가 서울 토박이에 삼십대 초반인 나에게는 생소했다. 싱아? 그게 먹는 건가? 그런게 아직도 들판에 있나? 아님 멸종 식물인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선생님의 책 속의 싱아는 산에서 자라는 싱아, 까치수영이라는 것이고 신맛이 나는 식물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진짜 실물은 한 번도 못 봤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마디마디를 관통해서 살아낸 박완서 선생님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1930년대와 40년대, 즉 일제 강점기 말기와 해방, 육이오전쟁 등을 직접 격은 작가가 개풍군에서의 유년시절, 현저동에서 시작한 서울살이의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찰진 언어로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진실하게 순수 기억 그대로 증언하고자 한 박완서 선생님의 인간적 고뇌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서울 사대문 안팎으로의 시간여행,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생생한 그 시절 이야기들. 우리네 할머니 시절 이야기 이지만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았고 흥미진진해서 읽다보면 그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박완서 작가님의 송도 개풍군에서의 유년시절 묘사는 시골 벽촌의 생활풍습과 날것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예찬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있다. 도시 출신인 나는 가져보지 못한 그 어떤 판타지보다도 신명나고 흥겨운 정경들이다. 조찰떡을 빚는 뒷간의 도깨비 이야기는 해학적이었고, 짱꼴라라는 말이 일제시대의 잔재임을 첨 알았다. 그중 제일 백미이자 절정은 시골아이 똥누기를 쓴 작가 이상을 비판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도시에서 태어나 외가든 친가든 깡그리 도시라서 시골에서의 추억이 없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시골 아이의 권태와 별게 다 놀이이고 즐거움인 그 순수한 열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 할 수 없다. 그저 짐작만 할뿐이다. 나와 반대로 남편은 시골출신이라 형제들끼리 모이면 어릴 적 시골집에서의 추억담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수박서리, 미꾸리지 잡기, 난 듣도 보도 못한 으름이며 삐삐 같은 먹을거리들. 도시 사람은 절대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고, 아무리 대단한 필력의 작가라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묘사할 수 없는 유년기의 부러운 추억들이다. 박완서 작가님에게 유년기 시골 대자연의 품에서 뛰놀던 추억은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속 든든한 뒷심이 되어 주는 평생의 풍요로운 자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적골을 떠나 현저동 서울살이가 시작 되고 박완서 선생님에게는 추억이 없다. 추억과 그냥 기억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추억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게 되는 것이고, 기억은 그냥 기억인 것이다. 선생님도 나와 똑같은 서울내기가 되어간다. 서울에서의 모습들은 박완서 선생님과 나 사이에 몇 십 년 간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가 않다. 선생님의 현저동 시절처럼 수도가 없어 물장수에게 물을 사먹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초등학교 때 봉천동 달동네에서 살아봤고, 남의 집 셋방살이도 해봤고, 먹을게 궁하지는 않았는데 엄마 지갑에서 몰래 동전을 꺼내 구멍가게에서 군것질 거리를 사먹은 적이 있다. 당연히 아카시아꽃도 먹어봤다. 세월 흘러도 서울살이의 고단함, 척박함, 남루함은 저 밑바닦에 늘 존재하고, 가난은 어느 시대이든 어느 정도의 비율로 도시의 이면을 차지하기 마련인 듯하다. 그렇지만 유년을 가득 채운 든든한 뒷배가 작가님에게는 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나와 다른 점이다.

  무악재 넘어 홍제동에서 태어나 봉천동, 그리고 지금까지도 친정엄마가 살고 계신 방화동, 서울이지만 서울 아닌 사대문 밖의 변두리의 삶. 중학교시절 가끔 학교를 빼먹고 혼자 버스를 타고 광화문까지 가서 교보문고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왔더랬다. 그러다가 갑갑하면 종로 을지로 남대문 일대를, 더 멀리는 혜화동까지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평일 낮의 일탈은 다음날 등교를 생각하면 두려우면서도 그만큼 큰 달콤함과 자유로움을 주었다. 직장을 다니시는 엄마는 늘 저녁에 들어오셨고 집안은 적막했고 괜히 외로웠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학교가 재미없어서 우울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의 나에게 사대문 안은 내가 속하지 못한 곳, 오래전부터 유지되어온 나라의 중심으로서의 어떤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근거를 알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 어디서부터 솟았을까 스스로 의아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알 것도 같다. 사대문 안을 향한 동경은 서울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갖게 되는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라는 것. 지금은 그 의미가 희미해졌지만 옛 부터 간직되어온 어떤 귀함이라는 것. 성인이 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그 시절 내 뜻 모를 감성은 잊혀 졌고, 내가 그러고 다녔다는 것도 기억 못한 채 살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그 시절 나만의 추억이라면 추억일 수 있는 장소들이 곳곳에 나온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역에서 내려 무악재를 지나 현저동으로 가는 어린 박완서 선생님, 중학교 때 친구 복순이와 처음 가본 도서관이 현 소공동 롯데백화점 자리이고, 복순이와 이별의식을 치루기 위해 눈길을 뚫고 찾아간 신사가 남산에 있었고, 혜화동은 지금보다 복개되기 전의 서울대 교정이 있던 그 시절이 더 운치있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박완서 선생님의 사대문안 추억이 내 사대문안 추억과 시절은 다르지만 그 거리 그 장소에서 조우하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을 불러왔다. 숫기 없고 책 읽는 걸 좋아했던, 늘 외로웠던 그 시절의 안쓰러운 나. 그 아이를 다시 소환하며 추억에 젖는다. 초라하고 못났지만 그 아이, 내가 그립다. 과거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냥 소중하고 아픈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의 책을 읽다보면 소설이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소설인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이 창조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소설인가. 그냥 내 기억과 허구를 적절히 섞어 재밌게만 이야기를 풀어 가면 그만인 것인가. 선생님의 그 다음 이야기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남자네 집'을 내처 읽어보며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단풍 붉은 이 가을, 박완서 선생님의 시원시원하고 명료한 문장들의 향연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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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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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작가가 있는줄도 몰랐다. 재미있다더라, 꼭 읽어봐야한다, 라는 입소문의 책들은 다 찾아 읽어보는 편인데,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은 이 작가의 책은 그다지 대중적이지가 않고 어렵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의 작품의 어떤 매력이 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는가. 그것이 궁금해서 구입해 읽어보았다.

 

  초반엔 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작가의 스타일에 익숙해질 때 까지는. 주인공 남자의 의식세계와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다. 작가의 서술방식은 우리가 알고있는 기본형식을 파괴한다. 이런류의 소설은 읽기 힘들고 집중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도닦는 마음으로 맘을 비우고 읽어야 한다.

 

 이별의 짧은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사라진 아내의 행적을 좇아 뉴욕에 온 주인공. 그의 의식은 현재에만 머물지 않고 과거,혹은 다른 차원을 넘나든다. 그의 넋두리, 혼잣말은 변화무쌍하고 끊임이 없다. 엉뚱한 상념들.. 길거리에서 만난 여성을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내동댕이 치고 싶었다(p42)는 둥의 우스꽝스러운 생각들. 밤에 호텔방에서 잠들때 어떤식으로 잠드는지 의식을 지켜보겠다(p52)는 둥의 기이하고 아이같은 행동들. 늘 악몽에 시달리며 정서가 불안한 남자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가 자라면 그런 어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웃사이더같이 겉도는 모습이 닮았다.

 

 처음엔 그의 두서없는 생각들이 어처구니 없고 정신이 없지만 계속 읽다보면 생각의 가닥들로 길을 잃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생긴다. 그는 고독하구나. 외롭구나. 낯선 도시 뉴욕에서 홀로 거리를 배회하면 그의 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그나저나 그의 아내는 왜 떠났는가. 그의 행동이 좀 정상이 아닌듯한데, 그것은 혼자만의 모습이고, 타인 앞에서는 소심하고 그냥 평범한 남자같은데 말이다. 지금 독자가 보는 모습은 여행중의 모습이고, 일상을 떠난 여행중에는 돌발행동과 일탈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평상시의 모습을 모르니 나도 모르겠다.

 

 아내 유디트를 좇아 뉴욕에 왔지만 그는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하고, 자신의 행적과 행선지를 숙소에 남기며 유디트가 찾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옛친구 클레어와 그녀의 아이와의 여행. 드디어 그는 혼자만의 중얼거림에서 벗어나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클레어의 아이를 살뜰히 보살피는 것을 보면 그는 다정하고 순한사람. 클레어에게 아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아내와의 이별의 과정을 되짚어보며 처음엔 사랑했던 두 사람이 다투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무관심해지게 되면서 결국은 멀어지게 됐음을 떠올린다.

 

 클레어와 그녀의 아이와 작별을 하고 혼자가 된 그는 다시 강박증이 도지고, 그의 여정을 뒤좇는 유디트의 짖궃은 장난은 그를 더욱 초조하게 하고 공포감 갖게 한다. 도플갱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질 않나, 자신은 잉여인간이라 생각하기도 한다(p169). 동생을 만나러 오리건의 벌목장으로 힘겹게 찾아가서는 똥을 누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마치 그것만을 보러 왔다는 듯 다시 돌아가는 그의 행동이라니(p186). 책을 거의 다 읽다 보니 이런 부분들이 재미있고, 작가 특유의 재치임을 알겠다. 상식을 파괴하는 인물의 순수성이랄까 그 엉뚱함에 헛웃음이 나면서도 빠져들게 된다. 주인공에게 애정이 간다.

 그런데 투손에 있을땐 5월이라더니 에스터케이더에 넘어와서는 연말이란다. 뚝 잘려진 여정, 서사를 파괴하는 그의 의식세계. 더 이상 그런 형식에 연연해 하고 괴로워하지 말자. 그게 이 책의 매력이라 생각하고 즐기자.

 

 이야기의 막바지에 그는 서해안 바닷가 마을 트윈록스에서 유디트와 재회하고, 그들은 그동안의 증오와 미움을 털어버리고 화해하며 쿨하게 헤어지기로 한다. 유디트의 과격한 행동을 보고 혹시 마지막에 주인공이 유디트의 총에 맞아 죽는건 아닌지 비극적 결말로 끝날까봐 조마조마하며 읽었는데 다행이었다. 작가는 비관론자는 아니었고 이 책은 그렇게 어두운 소설이 아니었다. 둘이서 그가 꼭 만나고 싶어 했었던 존 포드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한 결말이었다.

 

 어쨌든 솔직히 책이 두껍지 않아 다행이다. 오백페이지 이상 분량의 긴 소설이었다면 나도 주인공을 따라 정신분란이 일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책을 다 읽도록 주인공 이름은 안나온다. 정도 들었는데. 시대도 언지엔지 모르겠다. 쥬크박스라니.

 

 미시시피강이 흐르는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 열풍이 하루종일 불어대는 아리조나주의 투손, 그곳의 모래바람과 선인장. 해발 천미터가 넘는 오리건주 에스터케이더 산악지대의 나무들. 미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서 방황하는 지친 영혼을 만나보자.

 

 깊어가는 가을.. 지적허영을 한껏 채우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시라. 읽을 땐 힘들겠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그만큼 뿌듯함이 가득할 것이다. 그 성취감은 힘들게 등산해서 정상에 오른 그때 기분이랑 비슷하다.

 

 칼 필립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를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안타깝게도 품절이다. 절판 됐나보다. '녹색의 하인리히'라는 책은 검색이 안되는 것을 보면 이 책 속의 가상의 장치인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뒷편의 작품해설을 읽어 보면 이 어려운 책에 대한 가닥이 조금은 잡힐 것이다. 그리고 쉽지 않은 책을 깔끔한 문장으로 번역해 주신 안장혁 번역가님께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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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람이오는그늘 2019-11-09 16:13   좋아요 0 | URL
<초록의 하인리히>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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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생각없이 집어든 이 책이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평소에 소설을 주로 읽고, 이름도 첨 듣는 작가님이고, 그냥 표지와 제목이 예뻐서 끌리듯이 산 책인데 산문집도 이렇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첨 알았다.

 

 여자이며 딸이며 아내이고 엄마이지만 소설가이기도 한 작가님의 평범함 속의 비범한 이야기. 문학을 꿈꿨으나, 직장 생활도 해봤고, 실직도 당해 보고, 결혼하여 아이도 키워본 작가님의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돋보이는 산문집이다.

 

 그 속엔 어릴 적 유년의 추억, 젊은 시절의 패기,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형제 이야기, 남편 이야기, 아이 이야기가 있다. 또 사회와 사람 사이에 대한 조용하지만 정확한 인식이 있다.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비판정신도 있다. 어린시절의 가난한 이야기가 추억으로 피어난다. 잔잔한 문장 속에 요란하지는 않지만 빛나는 메세지가 있다.

 

 '숨어있기 좋은 책'에서는 권선징악을 말하지 않는 현실세계에 대한 깨달음과 동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들어섰을 때에 대한 고백이 있다. 소설이 아닌 산문의 진실성, 그 내밀함이 아름다웠다.

 

 '내가 살던 골목에는'. 읽다보니 내 어린 시절의 골목, 그 구멍가게, 그 집이 그대로 제현되는 듯해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작가님의 어릴적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 나의 시절이다. 숨바꼭질,다방구,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본는 정겨운 놀이들인가. 어릴적 미로처럼 얽히고 섥힌 좁은 골목에서는 길을 잃은 적이 없는데 넓은 대로와 잘 구획된 요즘길에서 오히려 길을 잃는다는 작가님의 말, 무척 공감이 가며 서글픔이 밀려왔다.

 

 '나는 너를 모른다'. 타인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척하지 말라는, 그것은 오만이라는 메세지. 맞다. 나도 그동안 얼마나 타인들에게 그래 왔는가.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가지'. 글쓰기의 수고로움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준 단락. 글쓰기가 꿈인 모든 이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와 격려가 돋보인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 눈내리는 소리가 '괜찮다,괜찮다,괜찮다.' 라니.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에 나온단다. 눈이 그렇게 표현된 시가 있다는 것을 첨 알았다. 한 번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아.. 한지혜 작가님의 문장과 단어들은 참 주옥같다. '주옥같다'는 표현 참 진부하지만 더 멋진 표현을 쓰고 싶지만 딱 그 표현이 맞다. 마음에 와닺는 부분이 많아서 노트에 필사해가며 읽었는데, 글이 길어지니 여기에는 그만 써야겠다.

 

 하루하루 지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위로의 문장들. 지친밤 잠들기 전 읽으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글들이다. 언니처럼 친구처럼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그 숨결이 참 포근하고 안도감을 준다.

 

 그동안 아무 성취도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산 것에 대해 의기소침해 있는 나에게 괜찮다고, 살아낸 것 만으로도 장하다고 토닥여주는 듯 하다. 공들여 완성된 이 산문집 한 권의 무게는 묵직하다.

지금은 깊은 가을날 이지만, 겨울이 오면, 눈내리는 휴일날 오후 다시 한 번 꺼내 읽어 보아도 좋겠다.

 

 한지혜 작가님의 글을 더 읽어 보고 싶은데 출판된 책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산문이 아닌 소설도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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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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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는 할머니의 남성 폭력에 저항한 통쾌하고 도발적인 복수극, '루거총을 든 할머니'.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남편의 가정폭력, 나치의 만행.. 남성 주도의,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비합리에 맞서는 베르트 할머니의 허무맹랑하지만 당당한 투쟁기. 루거총을 든 베르트는 진정한 여전사이자 페미니스트. 나를  짓밟거나 범하려는 남자는 죽이는 한이 있어도 당하지 않고 응징 하겠다는 그 대범함과 저항정신, 마녀같은 독함은 현대 여셩에게 꼭 필요한 정신이다. 남성에 대한 희생과 복종이 당연시 되는 이 사회에 대한 경종, 나약하게 당하기만 하고 징징거리고 있지 말고 강하게  맞서라는 베르트 할머니의 메세지.

 

 그런데 두번째 남편까지 베르트가 죽였을 때는 굳이 죽일 필요까지 있었나 싶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베르트가 너무 과격한거 아닌가 싶었다. 최종적으로 베르트의 집 지하실에서 7구의 시체가 나왔고, 베르트는 그 사연에 대해 양심고백을 하며 다른 장소에도 세구의 시체가 또 있다고 말하는데!!

 

 본인도 인정하다시피 괴물은 괴물인 듯.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소설 속에서 대신 해주니까 대리만족으로 이런 통쾌한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베르트의 거침없는 질주를 즐기자. 실제로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때려 죽이고 싶은 사람들과 그런 상황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때마다 참고 마음속으로 삭히는 내 속마음은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었는가. 이와 반대로 때려 죽이고 싶은 순간 거침없이 실행한 베르트이 행보는 짜릿한 쾌감을 준다. 내 속이 다 후련하고 뻥뚫린다. 

 

 베르트의 행보 중 독자로써 가장 통쾌했던 부분은 8살의 베르트가 강아지를 학대한 동네 조무래기들을 낭심공격으로 응징하는 장면과 루터를 죽인 인종차별주의자 3인방을 처단하는 장면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쓰레기들, 사회악은 그렇게 깨끗이 자비없이 혼내줘야 한다.

 

 그나저나 베르트는 계속 실망하고 당할 것을 알면서 왜 계속 찌질이들하고 결혼을 하는가. 어짜피 결혼은 환상, 그 후로는 추잡한 일상의 반복인데 왜 자꾸 미련을 못버리는지, 또 실망하고 죽여버릴꺼면서. 이 남자만은 다른 사람과 다를거라는 환상,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일꺼라는 착각을 버리라는 반면교사의 교훈인가.

 

 102세 할머니 베르트는 죽음도 그녀답게 멋지고 깨끗했다.

 

 이 책의 작가 브누아 필리퐁, 그의 통통 튀는 입담이 날 것 그대로 담긴 책 속의 문장들은 수다스럽지만 만담처럼 유쾌하고 즐겁다. 작가의 재치가 베르트 할머니에게 그대로 녹아있다.

 

 요즘 사는게 심심하고 뭔가 억울하고 우울하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라. 특히 여성분들. 베르트 할머니의 거친 행적을 좆아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스트레스가 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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