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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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작가의 여행에 대한 짧은 단상, 에세이, 혹은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한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다. 이 책은 작가의 모든 역량과 사유가 가득 담겨있는 만물상과 같다.

 여행을 다니면서 공항, 혹은 호텔 탁자 등에서 끄적인 메모도 있고, 짧거나 긴 소설도 있고, 여행 중 만난 괴짜들,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형식과 서사는 무시되고 에피소드들이 허구인지 실제인지도 애매모호하다.

 도입부에서의 이 책의 정체에 대한 헷갈림 혹은 의혹을 이겨내면 그 다음부터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이렇게 친절하지 않은 책은 독자에게 자립심을 키워준다. 작가나 출판사가 떠먹여주지 않는 책이다. 독자가 스스로 정리하고 생각하며 이 책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읽어야 한다.

 책 속에도 이러한 무정형의 방식에 대해 작가의 망설이는 마음이 적혀있다. 그렇지만 이런 두서없는 형식도 새로워서 좋다. 독자도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한 흔해빠진  여행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관점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필히 읽어보시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쿠니츠키의 이야기'가 있다. 여행 중 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실종되고 섬은 발칵 뒤집히고 남자는 망연자실한다. 그 좁은 섬에서 아내와 아이는 어디로 사라졌나.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한참 뒤에 잊어버리고 있을 때쯤 나온다. 아내와 아이는 돌아왔지만 사흘간의 실종에 대한 대답을 끝내 듣지 못한 남자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아내와 헤어지고 텅 빈집을 뒤로 한 채 여행을 떠난다.

 

 모험을 원한다면 '재의 수요일' 을. 흰고래잡이를 꿈꾸는 유람선 선장 에릭의 이야기가 있다. '모비딕'에 대한 오마주인가. 에릭은 승객을 싣고 배를 돌려 미지의 바다로 향한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해 먼 바다로 향하는 자유가 바다에 펼쳐진다.

 

 관능적 육체의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블라우 박사의 여행을 읽어보시라. 인체의 신비와 그것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강렬하다 못해 괴기스럽다. 외발의 필립 페르헤이언의 해부학 연구도 흥미롭다.

 작가의 독특하고 은밀한 취향, 해부학과 인체의 보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이 책 속에 담뿍 담겨져 있다. 작가는 인체를 박제한 표본과 기형의 신체부위를 액체에 담가 보존한 전시물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관심을 보인다. 이 분야는 종교적으로 약간 금기의 학문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전문 분야이기에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나게 읽었다. 신체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 연구하며 보존하는 사람들도 어떤 의미로는 여행자이다. 인체의 무한한 영역, 그 미지의 세계로의 발걸음이 이 책 안에 가득하다.

 라위스 박사의 특별한 보존제 제조비법이 궁금하다. 교수형당한 여성을 보존해서 사람들 앞에서 해부하는 라위스의 쇼는 그로테스크했다. 이것이 역사에 실제 일어났던 일인가 아님 작가의 허구인가 의아스러우면서도 작가가 펼치는 인체의 신비에 빠져든다.

 마오리족은 가족이 죽으면 그 머리를 찌고 훈제하고 기름으로 코팅해 영구 보존하면서 애도를 한다니. 하하하.

 쇼팽의 심장. 정말인가 찾아보니 진짜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 성당에 따로 안치되어 있단다. 작가의 허구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는 역사 속 실화였기에 놀라웠다.

 

 병든 아이와 무기력한 남편으로부터 해방되는 하루, 맘 놓고 울 수 있는 곳을 찾아 도시를 배회하는 가엾은 여성의 이야기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노속생활을 하는 그녀에게서 자유의 냄새가 난다. 진정한 방랑자란 그런 것이 아닐까. 벗어나고 싶은 골치 아픈 현실을 털어버리고 홀가분해 지는 것. 그곳이 거리이든 어디이든 상관없다.

 

 고통을 끝내달라는 옛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러 먼 여행길에 오른, 신의 영역에 도전한 생물학자도 나온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끝마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현대인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의미심장했다.

 

 이 책은 평범함을 거부하는 모든 모험가들, 연구자들, 실험자들에게 바치는 찬사이고,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는 방랑자들에게 떠남을 재촉하는 글이다.

 어떤 식으로든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방랑자이고 길을 떠난다. 모든 떠나는 사람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응원의 매세지이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격려이다.

 나로 말하자면 내 현실을 벗어날 용기도 없고 돈도 없고 의지도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일탈 할 수 있는 공간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방랑자들'을 읽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떠나지 않고도 떠남을 느낄 수 있는 책, 이곳에 있으면서도 딴 곳에 있는 것 같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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