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당 정인보 평전 - 조선의 얼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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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보다 강한 붓으로 '조선의 얼'을 지킨 정인보


역사에 대해 아는것보다 모르는것이 더 많은 나에게 정인보 라는 사람은 그저 낯선 사람이었다. 「위당 정인보 평전」 이 책이 아니었다면 평생 난 정인보 선생이 누구인지도 나라를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도 모른채 살아갔을 것이다. 20세에 동제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았으며,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언론인, 시조작가, 교수, 산문작가, 교육자, 우리나라 최후의 양명학자 등으로 활동하였고, 큰 업적을 남긴 인물 이었다. 하지만 그는 6.25 한국전쟁당시 납북되었고, 한국의 역사에 많은 흔적들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다.


한권의 책이 완성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을 수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작가의 노력 덕분에 정인보 선생의 삶의 일부분이 한권의 책으로 정리될 수 있었고, 그가 했던 수많은 업적들을 조금이나마 알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하였다는것도, 을지문덕장군의 묘소가 방치되었다며 이것은 식민지배 체제때문이란 장문의 사설을 썼다는 것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사실이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업적들을 알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6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살리기 운동' (94쪽)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충무공 이순신은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조선인으로서 금기시 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문제를 거침없이 거론하였으며, 묘소, 유적지, 위토 문제등을 제기하고 유적보존회 창립을 이끌어 내었으며 현충사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인보가 이 문제에 적극 자서게 된 것은 이순신의 묘역이 경매를 당하게 된 데 대한 언론 보도에서 시작되었다.(96쪽)


'민족적 수치 -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 라는 사설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충무공 묘산 경매 문제' 라는 시론을 발표하였다. 정인보 선생의 사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일주일이 못되어 성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국민들의 참여에 감격한 정인보 선생은 '이 충무공과 우리' 라는 순 우리글로 이순신의 인성과 인격을 그리는 논설을 썼다. 1만여 원의 성금이 모였고 '이충무공 유적보존회'가 창립 되었다. 또한 충무공 위토를 동일은행의 저당에서 다시 찾게 되었으며, 남은 그램은 유적 보존사업에 사용 하였다. 이후 '충무공 위토 추환' 이란 사설을 통해 여러 유적의 영구보존할 것을 제기 했으며, 1932년 현충사가 준공되었다.


마음이 담긴 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런 결과들을 얻을 수 있었던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업적과는 다르게 정인보 선생의 죽음은 너무나 비참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고 북쪽에서 욕심을 내온 인사들이 납북을 당한다. 굶주림 속에 밤낮으로 강행군을 계속하며 춥기까지해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고 인솔자는 환자들을 버려둔채 가버린다. 정인보 선생도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낙오된다. 발이 얼어 터지고 찬바람 속에 1주일 이상 굶주리다 극적으로 발견된다. 급히 병원에 입원시키지만 정인보 선생은 버틸 힘이 없어 눈을 감는다. 남겨진 가족들 또한 납북자 가족이라며 억압당하고 집마져 빼앗겼다고 한다. 믿을 수 없지만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너무나 무관심 했던 나 자신부터 반성하며, 다시한번 정독해 봐야겠다. 기억속에 놓친 정인보 선생의 글들을 다시한번 음미하고싶다.


-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된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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