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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하라 - 징비록
정종숙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5년 12월
평점 :
시대의 목격자 류성룡이 집필한 임진왜란 7년의 기록
작년 청소년 문고인 「징비록, 임진왜란 극복의 기록 유성룡 리더십」 (http://blog.naver.com/dark0405/220310504997) 이 책을 읽었었다. 책을 통해 유성룡 이라는 인물에 대래 많은걸 알 수 있었다. 참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하며 그가남긴 징비록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겼었다. 징비록이 무엇인지 그 안에 어떤 기록들이 남겨진건지 더 알아봐야겠다 생각을 했었지만 이내 다른책들을 읽느라 잠시 잊고지냈다.
얼마전 「징비록, 기억을 기억하라」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궁금증들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 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성룡이 남긴 임진왜란 7년의 기록들.. 제목만큼이나 눈에 띠는 문구였다. 최근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로써는 알고있는 내용보다 모르는 내용들이 더 많았지만 친절한 설명들 덕분에 지루하지않게 읽을 수 있었다.
참혹한 전쟁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성찰의 기록이 필요하다 생각해 남겨진 유성룡의 징비록! 임금의 부름에도 다시 돌아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쟁을 극복해 나갔다. 그 시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 이었음에도 그는 징비록을 썼고, 완성했다. 덕분에 난 사무실 한켠에 앉아 그 기록들을 읽어볼 수 있었으며 당시의 상황들을 생생하게 상상해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29건의 작은 재난과 300건의 미세한 이상징후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른바 '하인리히 법칙' 이라 말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우연한 재난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서를 가지고 온 일본의 사절은 이전과는 달리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이것이 조선이 일본의 정세를 탐지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기회였고 우리나라는 진의 파악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 다녀온 사절단을 통해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언급된다.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한 황윤길과 김성일.. 함께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황윤길의 의견에 힘을 싫었지만 조정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것이란 김성일의 의견에 손을 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답서는 선전포고에 준하는 것이었음에도 애써 외면한것이다. 이후에도 오억령을 통해 침략 가능성에 대한 보고가 들어온다. 하지만 조정은 오억령을 파직시킨다. 또한, 그해 5월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가 부산에 와서 '내년 봄에 침략할 것' 이라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이를 외면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의 분노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던 김성일에게 향했고 책임 면제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전쟁을 대비해도 시원찮을판에 선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서인인 정철을 이용해 동인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하지만 정철이 기축옥사를 진압한 공로로 좌의정에 오르자 선조는 정철에게서 등을 돌려버린다. 결국 정철또한 삭탈관직되어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서인세력도 무너지고 만다. 기촉옥사가 일어난 지 1년째 되었을때 통신사 일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을 보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의 모습들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태도였다.
드디어 전쟁이 일어날것 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믿음직 스럽지 못했던 선조였지만 다행히 그에겐 류성룡이 곁에 있었다. 류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수에 임명된 이순신의 파격적인 인사로 인해 거센 반발이 일어나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감싼다.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신뢰덕분에 우리는 이순신 이라는 강직한 장군을 얻게 된 것이다.
이후 조선 최고의 장수로 꼽히던 신립 장군이 왜적들이 해전에 능하지만 육지에선 그렇지 못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수군폐지를 외친다.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다. 수군 폐지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리며 힌겨운 투쟁을 벌이며 14개월동안 빈틈없는 전쟁 준비의 나날을 보낸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
4월 14일 부산진이 함락
4월 15일 동래성 함락
4월 25일 이일 장군이 상주 전투에서 패배
4월 28일 신립 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고 자결
4월 30일 선조 임금 한성 버리고 피난
5월 3일 수도 한양이 함락
불과 한달도 안되는 사이 수도가 함락되었다. 전쟁 발발 십여일 전 왜군의 침략 계획을 알리는 첩보가 있었음에도 조선이 함락되는 데는 20여일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16만 대군이 출격했음에도 조정에는 적의배가 400척이 채 못되며, 인원은 만명쯤 될것이라 보고되었다. 해안 일대를 노략질하는 왜구 정도로 오판한 것이다. 또한 전쟁일 발발하자 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 장수들과 수군은 해제시켜버린 장수들로인해 왜군은 너무나 쉽게 한양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나라에 힘이 없어 명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그런 명군의 횡포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강화협정에만 목을 메다는 명군의 태도와 명군의 노략질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우리나라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특히 심유경과 고니시의 사기행각을 보며 나의 답답함은 극에 달했다. 7년여의 전쟁이 막을 내린 후에도 선조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장군들의 업적을 치하하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 칭해도 모자랄판에 오로지 자신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왕이라는 꼬리표를 띠기위한 작업에만 몰두했고 이순신의 업적은 '다소 빛날 뿐' 이라며 깍아내릴 뿐 이었다.
류성룡의 징비록이 없었다면 이러한 상황들은 역사속에 묻혔겠지만 징비록을 통해 알게되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참 재미있다. 안타까운 역사든 박수가 절로 쳐지는 역사든 우리나라 역사를 잊지 않기위해서라도 더 많은 책들을 통해 바르게 알아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