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구한 의병장 고경명 - 붓과 칼을 들고 선비정신을 실천하다!, 동아일보 추천도서 상수리 인물 책방 6
최영훈 지음, 임덕란 그림 / 상수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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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의 의병장으로는 고경명을, 관군사령관으로는 이순신을!"

정조대왕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인물로 이 두 사람을 꼽았습니다.


고경명 조선을 구한 의병장

역사를 많이 알지 못하는 나로썬 낯선 인물이다. 의병장 고경명은 당시 글공부를 하는 선비였으며 60세의 노인이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420여년 전인 당시의 평균나이가 40세가 못되던 시절이었기에 그야말로 호호 할아버지인 것이다. 조선에서 글을 제일 잘 쓴다고 칭찬받으며 글공부만 했던 선비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섰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 석자를 뚜렷이 남긴 것이다.


조선 왕조 14대 선조대왕 24년인 1592년 3월 별을보며 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고경명은 천문을 읽는 실력이 뛰어났기에 이를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을 즘 왜군이 쳐들어 온다. 그들은 명나라를 치기위해 조선에 왔다며 길을 내주라 하지만 조선은 이를 믿지 않는다. 1만 8000여 명을 태운 700여 척의 배를 막을 군사의 숫자는 겨우 1000명뿐 당연히 왜군을 막지 못하고 2000명이 넘는 인원이 전투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틀만에 동래성이 무너지고 그들은 한양을 향한다.


왜군이 쳐들어 오고 고경명은 슬픔에 잠긴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를 사흘, 먹지도 않고 물도 안마시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3일째 되던 날 방문을 열고 나와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가족과 함께 살기위해 도망친 많은 백성들도 있었지만 고경명과 두 아들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것을 결심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있는 임진왜란 속 숨어있던 위인 고경명. 환갑의 나이에도 누구보다 용감했으며, 글을쓰는 선비였음에도 그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그가 휘갈겨 쓴 격문을 읽으며 나라사랑하는 고경명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임금을 지키기 위한 충성심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책을 통해서야 알 수 있었던 의병장 고경명. 죽는 순간에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노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아버지와 둘째아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겨우 살아남은 첫째 아들인 고종후는 왜군이 금산성 안으로 물러나 승리를 자축하는 사이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찾아 나선다. 겨우겨우 목이 없는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거둔 고종후는 석달이 지나서야 전라도 화순에 부자의 시신을 땅에 묻는다. 그곳에 나타난 신비롭게 생긴 새와 겨울도 아닌데 내리는 함박눈, 무덤 위쪽 하늘에 걸린 무지개와 같은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하늘이 의병대장을 잊지 못하는 거라 생각한다.


이후 고종후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의병을 모으는데 힘을 쏟고 다시 일어선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고경명의 부인은 큰 아들이 다시 전쟁에 나가려는 걸 말리자 고종후는 어머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이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동굴로 들어가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고종후의 어머니는 자신이 잘못 선택했다 생각하며 아들을 다시 전쟁터로 보내게 되고 고종후는 복수의병장이된다. 그리곤 전투중 죽음을 맞게 된다.


이 책은 고경명이 의병장이 된 이후의 삶을 먼저 소개한 후 선비 고경명의 삶을 2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임진왜란에 대해 다시한번 이야기해볼 수 있었으며, 새로운 위인을 알게되어 좋았다. 같은 성씨라며 더욱 반가워 하는 듯한 아들녀석의 반응에 웃음이 나기도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들녀석의 기억에 오래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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