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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창해 정란 - 조선의 산야를 누비다
이재원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2년 10월
평점 :
이 책은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 정란의 이야기다. 산행 장비도 변변치 않은 조선시대에도 과연 전문 산악인이 있었을까? 등산에 필수품인 등산화의 모양은 어땠을까? 궁금증이 먼저 아른아른한다. 대학자들은 마음속에 산을 하나씩 품고 살았다고 한다. 퇴계는 청량산을, 조식은 두류산을,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수많은 고승이 산에 들어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이황 선생은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와 같고, 산을 오르는 과정은 도(道)의 절정은 찾아가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조선 선비들은 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귀착점은 결국 산수山水였다. 번잡한 현실과 떨어져 군자君子가 머물 만한 공간으로 산을 규정하고, 산수를 찾아가는 여정은 수양 과정으로 여겼다.
영남 사람들이 강인한 이유는 뾰족한 바위가 많고 흙이 적은 지리산 천왕봉을 머리에 이고 살기 때문이며, 호남 사람 인심이 유순한 이유는 흙이 많고 돌이 적어 빼어나게 고운 반야봉을 주봉으로 삼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혜환 이용휴을 만나 창해 정란은 발목에 심술이 걸렸다는 산수병山水病, 역마살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는다. 혜환은 열린 사고와 개방적인 성격으로 신분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과 왕래했다. 천민부터 사대부까지 예술가, 탐험가, 문장가, 의원은 물론 공방 기술자도 있었다. 본인이 직접 할 수 없는 분야, 특히 서책으로 배울 수 없는 분야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을 선호하고 존중했다. 상대의 나이와 지위에 개의치 않고 그들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노닐고 싶어 했다. 그러다 보니 혜환과 교류하면 자신이 하는 일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자신감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그를 뵙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백두대간 줄기와 갈래, 그 사이사이로 강물이 가로지르는 터전 위에 사람들이 모여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이어간다. 신라는 경주를, 고려는 평양과 개성을, 조선은 한양을 중심으로 각 시대의 중심축을 이동해왔다. 한양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뒤를 바치는 북한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한양을 감싸는 산줄기는 북한산 옆으로 도봉산이 곁을 지키고, 감악산 줄기가 남서쪽으로 에둘러져 있다. 동쪽의 낙산, 남쪽에 목멱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에 북악산을 이어 사십 리 성곽을 쌓아 도성을 이루었다.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길이 머리를 맞대듯이 만나 하나의 강으로 흐르는 곳, 양수리 즉 두물머리다. 가까이에 수종사를 품고 있는 운길산이 있다. 세조가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새벽녘 홀연히 들린 종소리의 향방을 따라갔다가 바위 굴에서 십팔 나한상을 발견했다. 그때 굴 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는데 그 소리가 자신이 들었던 종소리였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수종사를 지었다고 한다. 수종사 삼층석탑은 백사 이오성 대감과 송운대사, 한음 이덕형 대감을 기르려고 세워졌다. 책 속에서의 설악산에서 만난 창해와 약초꾼 우공이 나눈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돌무더기에 돌 하나를 얹던 창해에게 약초꾼은 “평소 무심하던 돌덩이에게 무슨 죄를 지으려고 인간들의 숱한 짐을 짊어지게 합니까?” 하고 일침 한다. 산에 오르면서 돌무더기에 돌을 얹으며 소원을 비는 관습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통용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면서 신기했다.
이 책은 문화유적답사기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탑과 서당, 고서, 그림 등이 수록되어 있어 책을 읽으며 이를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노새, 말 가죽신, 말고기 육포, 해낭 등 나름의 방법으로 조선 팔도 오악산과 명산 대첩을 주유했던 청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가진 정란의 삶에 대한 동경과 경이로움을 정말 많이 느꼈고, 한 번뿐인 인생을 나도 창해처럼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며 다채롭게 채워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