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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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메일은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서, 이 이름은 ‘하느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Call me Ishmael). “콜 미, 이슈메일”(내게 전화해 줘요, 이슈메일). “And tell me what your true identity is"(그리고 당신의 진정한 정체를 말해주세요). 이슈메일 뒤에 서 있는 허먼 멜빌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정체는 책 속에 다 밝혀놓았습니다”. 역자의 결론처럼 이제는 독자가 소설을 2회독, 3회독하며 이슈메일의 정체를 알아내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1980년대 영국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가 미국 동부의 유수한 대학에서 강연 후 학생들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 소설(English novel)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하지만 학생들이 English novel 이 영어 소설이 아니라 영어로 쓰인 소설을 말하는 것이라면 내 대답은 <모비 딕>입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역자는 <모비 딕>을 즐겁고 스릴 넘치는 해양모험소설로 기억했다. 처음에는, 우리 인생이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가 전부라면, 내 머릿속에서 <모비 딕>은 여전히 거친 파도를 헤치며 태평양의 흰고래와 싸우는 외다리 선장 에이해브의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리 인생이 겉보기와 달리 많은 상징과 신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소설 속의 흰고래가 그냥 고래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모비 딕>은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획기적인 퓨전풍 이야기 기법의 개발, 거대 담론에 기대면서도 독창적인 작품 구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폭넓은 추적, 이야기와 상징의 절묘한 결합, 인생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뛰어난 유머 감각과 풍자 정신, 열린 결말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져 외면을 받았다고 한다. <모비 딕>은 58세의 에이해브 선장은 지난 포경선 항해에서 모비 딕이라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다리 한쪽(무릎 아래)을 잃는다. 그 후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게 복수할 일념으로 피쿼드호를 타고 다시 항해에 나선다. 그는 바다에서 만난 다른 배들의 선장에게 흰고래를 보았느냐고 묵고 다닌다. 그리고 드디어 모비 딕을 만나 등에 작살을 꽂지만 작살 밧줄의 고리에 목이 걸려 바다로 떨어진다. 모비 딕에게 들이받힌 피쿼드호와 보트들도 세찬 소용돌이 속으로 침몰하여 이슈메일을 제외한 모든 선원이 사망한다. 이슈메일은 원래 야만인 퀴케그의 관이었던 구명부표에 의지해 표류하다가 구조되어 이 사건의 전말을 알린다.


작가인 허먼 멜빌은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남태평양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평화롭게 사는 야만인을 보았고, 기독교 세계와는 다른 문명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하여 선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그는 기독교에 회의를 품게 되어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의 신앙 상태를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반면에 멜빌의 아내 리지는 독실한 신앙으로 결혼생활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냈다. 교회에 잘 나가지 않는 동안에 멜빌은 철학과 종교에 심취하면서 우주의 이치에 대해 숙고했다고 한다.


신학적 해석으로 흰고래는 사람을 죽이는 괴물, 즉 악이고, 에이해브는 그 괴물에 맞서는 영웅이다. 사회적 해석으로 흰고래는 잘못된 사회제도의 상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흰고래는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의 노예제 사회이고, 에이해브는 노예제를 철폐하겠다고 나선 윌리엄 개리슨 같은 반노예제 운동가이며, 포경선은 미국이라는 사회, 즉 미국 호다. 심리적 해석으로 흰고래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상징한다. 철학적 해석으로 흰고래는 존재의 신비를 상징한다. 책 제목만 들었을 때는 단순히 얇은 소설 책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7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책의 분량과 더불어 다소 생각을 하며 읽어야 해서 근래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 했던 것 같다. 향후에도 여러 가지 해석을 염두에 두고 2번, 3번 시간이 가능한 선에서 이 책을 다시 읽어보며 이 작품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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