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대문을 열면
허은미 지음, 한지선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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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잠깐 멈추고 사진 앨범을 펼쳤다. 놀랄만치 또렷하게 그려지는 시간들이다. 옛 동네 풍경을 찾아본다. 의심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나 다섯살까지 살았던 다세대 공동주택에 구조를 기억한다. 이후 외할머니와 외삼촌과 2년을 함께 살았던 광안리에 단독주택, 사직구장 옆 대단지 단층 아파트를 거쳐 삐삐와 시티폰 어디쯤이 걸쳐있는 시절엔 세동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현재까지 20년이 넘게 부모님이 거주중인 마지막 집을 제외하고 내가 살던 곳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나의 기억까지 지워지진 않았다.

타자가 홈런을 치면 방 창문을 통해 불꽃 놀이를 구경할 수 있었던 근사한 우리집은 마지막 남아있던 연탄 아파트였다. 어느 날 연탄 보관창고가 기름보일러실로 바뀌었고, 친구들과 새우깡을 사먹던 구멍가게가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재개발 건설사들이 웅성웅성 입찰관련 홍보행사를 하던 날엔 부모님들이 모두 몰려가는 바람에 동네 아이들은 함께 모여 티비를 보며 귤을 까먹었다. 집 열쇠가 없어도 앞집 현관을 두드리면 되니 걱정이 없었던 그 집은 우리가 떠난 뒤 얼마되지 않아 무너졌다.

#파란대문을열면 펼쳐졌던 아련한 조각들처럼 내게도 이어붙이면 하나의 장면이 완성되는 추억들이 있다. 공중전화에 돈이 남으면 뒷사람을 위해 수화기를 올려놓고 갔던 그 뜨끈한 마음들이 머물러 있는 과거로 향하는 문에 노크를 하는 이 책을 읽으며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지 생각해보다 작년 겨울에 함께 본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떠올리는 나의 절친한 친구를 위해 이 책을 고이 간직해두리라 다짐한다. 그 친구는 태어나 얼마되지 않은 때부터 1988년 준공인 오래된 아파트에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언제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허름한 외관이지만 그곳에서 매일 꿈도 꾸고 희망도 짓는다. 여름에는 짧게 겨울에는 깊이 들어오는 햇살처럼, 아슬아슬 넘칠듯 넘치지 않는 뚝배기 찌개처럼, 우리 내 삶도 오래된 집에 베인 향수만큼 익어가는 책을 만났다 #문학동네 #뭉끄 #호수네그림책 #그림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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