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가 첫 돌이 되는 해에 나는 가차없이 파리행 비행기표를 예약해서 홀로 떠날거라고 다짐했었다. 야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탐욕은 산후우울증이 초래했던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이젠 아주 든든한 여행 단짝이 생겼다. 이동 반경은 이전만 못해도 말동무가 있어 좋고, 의지가 되는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에 나는 고통이 움틀때 마다 가장 빠르게 숨을 수 있는 수단으로 여행을 선택했다. 비행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았고 그것은 거리와도 비례하니 여행의 기간도 제법 길었다. 귀국과 동시에 다음 목적지를 정해두고 1년 계약직으로 취직을 했다. 내 인생 최대 허영이었고 호기로움도 최고치까지 끌어올려 임했던 시간들, 허영이라 하기엔 론니플래닛 중에 내가 오로지 탐독하는 부분은 지도 영역이었고 여행리스트 중에 맛집은 하나도 없을만큼 극빈한 생활여행자였지만 베짱이처럼 살고 싶은 허황된 희망도 품어봤었다.

매번 김동률에 <출발>이 귓가에 퍼지게 하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기내식먹는기분 은 현실 부정과 도피를 일삼았던 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내 추억 주머니에 유산지를 대고 그렸다고 오착할만큼 공감에 교차점이 많아서 지구 어딘가에 도플갱어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해보기도 했다. ‘떨어져서 나를 보려고,내가 아닌 것을 거두어 내어 버리고 보다 정확하게’ 라는 대목은 내 속을 투명하게 보여준 기분이다. 몇개 되지도 않는 가면을 돌려가며 상황에 따라 바꿔쓰는 방법으로 악착같이 버티느라 소진되어 버린 내 기둥을 찾으려 버둥거렸던 시간을 내려놓고 비행기를 탔다. 여행에 궁극적 목적은 내면으로의 고찰이라고 알 수 없는 말을 떠들며 변태의 과정을 반복했다. 지엽적 나를 골라내고 핵심을 찾으려 분투했던 끔찍하게 소중한 나날들이 #기내식먹는기분 안에 담겨있었다.

여행에 시간들을 말줄임표에 담아 마음 속에 보관할 때에 알았다. 잃을 것이 없어서 객사도 두렵지 않다했던 호기는 돌아와서 더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였다고… 다시 트레킹화에 등산복 단벌, 배낭 하나에 50일치 짐을 싸서 훨훨 쏘다닐 이유가 내게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꼬닥꼬닥 홀로 걷는 도보여행자(이전에 스스로를 칭하던 말)로 향유하고 싶은 나를 끌어다 앉혀 놓은 이 산문집에 매력은 쓸모없는 위로가 없다는 점이다. 춥지도 덥지도,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을 때에 느끼는 쾌적함처럼 적당한 습도를 머금은 이 책을 다른 독자들도 함께 보면 좋겠다. 고맙습니다 #사계절 #호수네책 #책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