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여행자 -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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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행병처럼 번졌던 '둔주'라는 현상. 이 현상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대부분 남자들)이 갑자기 의식을 놓아버린 채 일터와 가정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현상을 가리킨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특정 시간대, 특정 공간에서만 일시적으로 나타난 뒤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둔주와 같은 '시대적 정신질환transient mental illness'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이에 대한 저자의 답. 이 한 문단이 사실상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개념은 정신질환을 번성하게 하는 환경인 ‘생태학적 틈새’라는 은유다. 이 틈새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벡터가 필요하다. 나는 네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의학이다. 정신적 ‘질환’이 되기 위해서는 질병분류법이라는 진단명 체계 안에 들어와야 한다. 가장 흥미로운 두 번째 벡터는 문화의 양극성으로, 정신질환은 동시대 문화의 두 가지 요소의 중간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극의 한쪽 끝에는 당대에 낭만이자 도덕이라고 불리는 요소들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범죄이자 패덕의 요소들이 있다. 무엇을 미덕 아니면 패덕으로 볼지는 그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미덕이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어서, 검소함은 근대 초기 유럽의 청교도들에게는 부르주아적 미덕이었지만 봉건시대의 시각에서는 그저 결점에 불과했다. 세 번째로 필요한 벡터는 식별 가능성이다. 고통이 뚜렷이 보여야 하고, 환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애써야 한다. 즉 ‘질환’으로서의 가시성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 벡터는 지금 우리에게도 익숙한 현상인데, 질환으로 인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문화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어떤 해방구로의 기능도 해야 한다는 점이다.” (16-17)


다시 정리하면, 어떤 사람이 별안간 사라져서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생판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을 방황하고 난 뒤 나중에서야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이런 독특한 현상에 '둔주'라는 정신질환명이 붙여지게 되는 데에는 그 사회만의 독특한 맥락이 있다는 얘기다. (1) 일단 이런 현상이 정신과 의사 및 학자들에게 자신의 학설에 부합하는 주요 사례로 포착되어야 한다. 당시 프랑스 의학계에서는 둔주의 원인이 히스테리냐, 간질이냐 논쟁이 있었는데, 무엇이 근본 원인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이 현상이 기존 질병분류법 안에서 설명이 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심리적이든 신체적이든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서 발생한 '질환'이라는 인식이 일단 자연스럽게 정립이 되었다는 얘기다. (2) 당시 19세기 유럽사회는 대중적 관광여행이 유행이었고, 낯선 곳으로의 낭만적 여행을 예찬하는 담론이 많은 사람들의 여행 욕구를 자극했다. 다른 한쪽에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이 사회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이처럼 당시 여행의 의미는 상류층의 낭만적 여행과 하층계급의 부랑 범죄 사이에서 '문화적 양극성'을 띠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런 성격이 둔주 행위에 대한 일탈적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3) 당시 프랑스는 징집제로 군 탈영을 막기 위해 감시와 검열체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탈영병이나 징병기피자들은 먼곳으로 떠나기 위해 정밀한 검열체계를 통과해야 했고 반드시 서류를 구비해야 했다. 이때 둔주 환자들에 대한 정신병 진단서는 이들이 단순한 떠돌이가 아니라 특정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임을 명시해주는 기능을 했다. (4) 안정적인 직업이 있지만 평범한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남자들에게 둔주는 해방구로 작용했다. “일상에 매인 삶과 자유 사이의 경계선, 규범과 일탈 사이를 가르는 좁은 담장 위에서 경험할 수 있던 도피처가 둔주였던 셈이다(178).” 일상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 무력한 남자들은 “정신질환으로 낙인찍힘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워졌고, 그렇게 정신질환자가 됨으로써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115).” 


'생태학적 틈새'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정신질환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얘기를 확고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이들이 의식을 잃고 방랑하는 현상 자체는 실제로 일어난 것이니 마냥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라고만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싶은가 싶어서 정리가 잘 안 됐다. 이에 대한 해킹의 답. “왜 시대적 정신질환은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 나는 의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이 나태한 용어 사용을 기피했다.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정신질환의 생태학적 틈새에 사회적 벡터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사회적 구성물보다 더 생생하고 더 구체적인 묘사와 분석이 요구되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209-210) “진단명과 환자 사례를 차곡차곡 축적하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구성을 촉진시킬 생태학적 틈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10) 


'구성을 촉진시킬 생태학적 틈새', 다시 말해서 둔주 환자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만드는 여러 맥락들을 고려했을 때 '둔주'라는 행위가 정말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적인 맥락이 선행하는 것)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여행 욕구나 일탈에 대한 갈망, 둔주로 나타난 정신이상 상태가 결코 '구성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을테다. 그 증상 자체는 '실재'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해킹은 실제 환자를 진료한 기록들을 보여주고 그 당시의 보르도 사회를 묘사하면서 '실제하는 인물'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실재에 대한 해킹의 입장은 약간 절충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신질환에는 무언가 고정불변의 아주 특별한 것이 있어서 진짜 질환에는 가짜와 구별되는 실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환의 실재성이라는 개념은 퍼트넘이 말한 대로 현 시점에서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이유는 생물학적·생화학적 정신의학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200).” '사회적 구성주의'로 귀결되기 쉬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해킹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처럼 정신질환을 둘러싼 다양한 '생태학적 틈새'들을 보여주면서 '질환의 실재성'에 더 정확하게 도달하려고 한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우연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허무주의로 귀결되기 쉬운 것 같은데(실제로 설명되어야 할 '본질'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그런 면에서는 '실재'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해내려고 하는 해킹의 실재론이 꽤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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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그리고 가정 -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 2023 노벨경제학상
클라우디아 골딘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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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미국 대졸 여성을 중심으로, 약 120년 동안 여성들이 커리어와 가정의 양립을 향해 나아갔던 역사를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데이터에 기초해서 성별 임금 격차의 장기적인 추이 및 주요 요인에 대한 실증적인 주장과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자녀가 있는 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에 변화가 생기는 변곡점에 따라 여성 집단을 다섯 집단으로 구분한다. 대학을 졸업해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밟거나 또는 결혼생활에 진입하게 되는 20대 시기를 기준으로, 집단1(1900-1919년)은 가정 또는 커리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집단, 집단2(1920-1945년)은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아이가 생기면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집단, 집단3(1946-1965년)은 결혼하고 출산하여 가정을 이룬 후 늦은 나이에 일자리를 얻는 집단, 집단4(1966-1979년)은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은 후에야 가정을 갖게 되는 집단, 집단5(1980-2000년)은 커리어와 가정 모두를 성취할 수 있는 집단으로 구분된다. 시기적으로 모든 여성이 각 집단에 해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추이에 따라 경향적으로 다섯 집단을 구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커리어와 일자리는 커리어에서 단절이 생기는 지점이 있는지, 즉 대학을 졸업한 후에 일관되게 자신의 커리어만을 추구할 수 있는지의 관점에서 구별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많은 수의 미국 대졸 여성들은 80년대가 되어서야(집단4부터) 자신의 커리어를 그려볼 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전까지는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거나(집단1) 일을 하더라도 커리어상의 단절을 겪어야만 했다(집단2, 집단3). 


각 시기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맞물리면서 여성들은 자신의 삶을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려보고 선택할 수 있었다. 가령 고등교육에 여성의 참여가 증대되고 여성이 일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감에도 대공황이나 가부장적인 문화로 유자녀 기혼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를 제한하는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여성 집단이 있었던 반면(집단2), 피임약의 개발(이를 저자는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 같은 '시끄러운 혁명'과 대비하여 '조용한 혁명'이라고 표현한다)이나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아이를 낳는 것을 늦추고 커리어를 먼저 추구할 수 있었던 여성 집단도 있었다(집단4, 집단5). 저자는 페미니즘 같은 문화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출산을 늦춰줄 수 있는 기술적 요인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점이 실증적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인과관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경제학자의 태도에서 비롯되나 싶기도 했다.


집단5,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 단계에서는 커리어와 가정을 양립하는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그럼에도 성별 격차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성별 격차라고 하면 직종 간의 격차, 가령 남성들이 많이 진출하는 제조업 및 이공계 일자리와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는 서비스 및 교육계 일자리의 임금 격차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석에 따르면 직종 간 성별격차는 전체 성별 격차의 1/3만 설명할 뿐이다. 성별격차의 2/3가 같은 직종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전반적으로 성별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대졸 남녀의 성별 격차는 80년대 이후로 줄어들지 않고 정체 상태라는 점에서 저자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탐욕스러운 일자리'에 있다고 본다. 경쟁적인 직업 환경과 장시간의 노동시간을 감내하고 그에 대한 부산물로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전문직 일자리는 주로 남성들이 맡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비슷한 환경에서 여성이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게 되면 완전히 고강도의 일에만 전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육아 및 돌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남성들은 경력 단절에 대한 공포 없이도 '탐욕스러운 일자리'에 몰두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남성 배우자가 돈을 더 많이 번다면 여성은 커리어상의 승진 및 높은 임금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보다는 좀더 유연한 일자리에 종사하는 것을 '선택'하는데, 이런 차이가 대졸 남녀의 성별 격차의 요인을 상당 부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은 '탐욕스러운 일자리'를 더욱 유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남성들이 보다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의 다양한 제도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기업 내부적으로도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령 기업들도 유능한 여성 인력이 출산으로 인해 빠져나가는 것에 따른 손해를 지고 싶지 않을 것이며, 남성 노동자들 또한 워라밸을 유지하고 가정을 돌보려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 여성의 커리어 단절이 비단 여성에만 손해인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서 여성과 남성이 육아와 돌봄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도입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럼으로써 노동시장에서 '탐욕스러운 일자리'를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흐름상 이 책의 자연스러운 결말이기도 하다.


2. 이 책의 원제는 Career and Family: Women’s Century-Long Journey Toward Equity이다. 책의 분석 대상은 미국의 대졸 여성인데, '미국' 사례를 대상으로 분석했음에도 책의 원제에는 '미국'이라는 단어가 한 글자도 들어가 있지 않다. 미국에서 책을 냈으니까 굳이 미국을 명시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학자가 미국에서 한국에 대한 책을 내면 필연적으로 부제에서든 South Korea 써야 하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얘기를 적은 건, 미국의 히스토리를 세계 역사의 보편적 내러티브의 핵심 일부로서 제시할 수 있는 문화적 차원의 헤게모니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가령 페미니즘의 역사 생각하면 1960-70년대 2세대 페미니즘은 중요한 변곡점이고, (내가 과문한 것일수도 있으나) 이 흐름에서 주로 나오는 사례는 죄다 미국 케이스다. 그만큼 그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페미니즘 운동이 급진적이었고 거기서 쏟아져 나온 담론이 세계 전반적으로 큰 파급력을 미칠 수 있었기에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운동이 그만큼 중요했다고도 할 수도 있을 텐데, 문제는 이러한 도식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사고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적 흐름이 보편으로 설정되면 미국(또는 서유럽) 외 국가의 역사는 특수의 위치를 점하고, 그러면 왜 한국은 이 (미국의) 보편적 흐름과는 다른가? 이런 질문이 설정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케이스에 비춰 보면 한국의 여성들은 집단1에서 집단5로 '진보'해가는 선형적 역사를 그리기는 어려운 것 같고 오히려 집단1로 회귀하는, 다시 말해 커리어 또는 가정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 케이스에 비춰서 한국 사례를 봐야하는 데서 오는 모종의 불편함 같은 건 조금 남는다. 게다가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노벨경제학상의 권위를 받은 입장에서야, 미국 위주의 논의가 더더욱 헤게모니를 얻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미국 외 케이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별 격차 분석에 대해서는 모두 골딘의 논의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용횟수가 높아지면 그만큼 저명도는 더 높아질 테고...)


이건 조금 시니컬하게 생각해 본 것이다. 사실 책 읽으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어째서 미국은 집단4에서 집단5로 넘어가는 흐름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는가, 에 대한 부분이다. 집단4는 대학을 졸업하고 커리어를 가진 후에야(자리를 잡은 후에야) 가정 있는 삶을 꿈꿀 수 있었다면 집단5는 커리어 추구와 동시에 가정을 꾸리는 삶을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인데, 자기 자신의 커리어를 선택할 수 있음에도 '가정을 꾸린다는 당위'가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가능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다르게 말하면 한국은 왜 그런 당위가 없는 것일까, 라고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는 가족 중심 문화라서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한 가정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문화적 요인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있긴 하다. 그런데 한국은 안 그런가? 싶은 의문이 드는데, 저출생에 관련한 여러 요인들을 다 차치하고 생각해 본다면 한국에는 미국만큼의 바람직한 '선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상이 (미국의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만큼) 잘 그려지지 않는다. 되게 티피컬한 이미지는 남성은 이른바 가장의 무게라고 해서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주면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고 여성은 집에서 애를 잘 돌보고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모든 가정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경향적으로 많은 가정이 아이를 투자의 관점에서 보고 자식 교육에 올인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교육 투자의 수혜(?)를 입은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자신 또한 그렇게 자식투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자신의 부모가 살았던 삶을 자신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행복한 가정'의 상은 어떤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하물며 <스카이캐슬> 같은 중산층 가정도 불행한 마당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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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최시현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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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부동산 투자라고 하면 '계층 상승' 내지 '계급 재생산'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마련인데, '젠더'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이 조금 신선하게 느껴졌다.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부동산 문제에 있어 젠더 관점이 기입되어야 하는 이유는 노동시장에서 공적인 경제 생활을 수행하는 남성과 가정에서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한편 재테크를 통해 가정의 부를 증식하는 사적인 경제 생활을 수행하는 여성의 이분법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강고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부동산 투기와 관련해서 '저는 모릅니다, 집사람이 한 일이에요'라며 부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모 남성 정치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부동산 투자는 이른바 '투기'라는 '더러운 일'로서 주로 '집사람'인 여성이 수행하는 '사적인 경제행위'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부동산 투자가 중산층의 계급 재생산 행위임을 은폐하는 한편, 이른바 '복부인 담론'의 경우처럼 비난의 화살을 여성에게 돌리는 데 일조해 왔다. 그렇기에 부동산 문제를 단순히 계급 관점이 아니라 젠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탁월한 부분이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론적 자원으로 사용하는 논의는 부르디외의 장과 아비투스, 그리고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본 발전주의 국가와 가정주의 이데올로기의 작용이다. 여기서 부르디외의 논의가 갖는 장점은 부동산 투자행위를 단순히 개개인의 '계층 상승의 욕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택장에 진입한 행위자들의 특수한 이해관심이 반영된 결과로 분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가령 한국의 주택장은 국가가 국민의 자가소유를 촉진함으로써 복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소유자 사회'라는 조건에서 구성되었으며, 일단 이 장에 진입한 개인은 부동산을 소유하면 미래에 내 자산의 가치가 증대할 것이라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자가소유'가 주거 안정 및 계층 상승, 나아가 계급 재생산의 기본 조건으로 설정되어 있는 주택장 안에서 개인은 자연스럽게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겠다'는 투기 아비투스를 자연스럽게 체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아비투스는 모두가 동일하게 체화하는 것은 아닌데, 저자는 이러한 체화 또한 '성별화'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흥미롭게도 살림의 많은 부분을 여성들의 주택실천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37)."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는 '산업역군'으로서 남성 노동자의 공적을 치하하는 한편, 여성에게는 '현모양처', '근검절약' 등의 담론을 통해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할 것을 주문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대도시의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택 공급을 확대함으로써 중산층 육성에 주력했다. 1978년에 도입된 '주택청약제도'의 사례처럼 국가는 자가소유를 촉진함으로써 개개인들로 하여금 복지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였으며, 금융제도를 활용하여 주택을 사고 파는 '가정경제'의 문제는 주로 여성들에게 맡겨졌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주택시장 활성화를 위해 도입된 주택담보대출은 주택시장의 금융화를 심화시켜 '상품'으로서 주택의 불안정성을 한층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서 여성들은 단순히 '가정경제의 관리자'를 넘어 주부CEO 담론의 경우처럼 '주택시장의 투자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저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담론은 "여전히 여성의 경제적·문화적 능력을 가족 단위로 귀속하며 젠더화된 생애기획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99)."

책에는 이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다양하고 풍부한 논의와 사례들이 있지만, 우선 '왜 여성들이 부동산 투자의 주요 행위자가 되는지'에 대해 다뤄보고자 했다. '공적인' 노동시장에서 밀려나 '사적인'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지위에 머물러야 했던 여성들은, 나날이 변화하는 주택정책과 금융제도에 적응해 가면서 '투자자'로서의 감각을 획득하여 가정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성이 계급적 자원을 이용해 투기적 주택실천을 해도 그것이 온전히 자기 역량의 성장이나 개별적 자율성의 획득으로 이어지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오히려 가족주의와 가부장적 계급구조에 종속되는 부조리한 현실에 놓이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292). 공사분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여성이 자율성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부동산 투자와 같은 가정의 부의 증대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결과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아주 단단한 경로(292)"가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강요된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계급 불평등과 젠더 불평등이 착종된 '주택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는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지만, 문제의 원인을 '개인화'해서는 안 되며 항상 사회적 맥락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리뷰는 창비 출판사의 서평 이벤트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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