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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J시를 떠나면서 아버지가 홀로 남게 되자 '나'가 아버지 곁으로 가는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다른 형제들은 스케줄을 짜서 부모님댁에 번갈아 내려갔지만 '나'는 딸을 잃은 후부터 부모에게 연락을 삼갔다. 하지만 엄마가 집을 떠날때 문앞에서 아버지가 울었다는 여동생의 말을 듣고 아버지 곁에 있기로 한 것이다.
여섯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전염병이 돌던 해에 형 셋을 잃어 졸지에 종가의 장남이 되었다. 한의사였던 조부는 전염병이 두려워 아버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소학을 가르치고 명심보감을 외우게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를 잃던 날에 열네살 아버지는 논에 있었다고 한다. P. 19
열네살부터 문중 논을 홀로 농사짓던 아버지였지만 동네 사람들과 달리 가끔 가죽 점퍼에 포마드를 바르고 오토바이를 달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의 눈에는 농부같지 않고 서툴러 보였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J시의 다리가 떠오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외면했던 중학생이었던 나의 모습이. P. 22
그 시절의 다른 아버지와는 달리 목소리도 크지 않고, 적당한 키에 비교적 큰 덩치, 반듯한 외모의 아버지였고, 말수가 적어도 친구가 많은 아버지 였다. 하지만 중학교때 어느날 읍내의 다리위에서 마주친 아버지는 허름한 모습에 깊은 실의에 빠진듯한 사람처럼 보였고 나는 아버지를 외면했다.
내가 아버지를 발견한 곳은 예전에는 잿간이었던 헛간이었다. P. 50
새벽 세시쯤 일어 났는데 아버지가 사라졌다. 헛간 벽에 걸린 농기구들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 한다.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아버지 인생? 우리들 학사모 쓰고 찍은 사진이? P. 65
아버지 침대 밑에 이부자리를 깔고 잔다. 아버지는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벽위에는 나만 빼고 형제들이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아버지는 한동안 연락할때 마다 나의 사진을 받길 원했다. 그때 마다 나는 거절하거나 외면 했다. 보다 못한 오빠가 말한다. 그것이 아버지 인생 아니냐, 너는 글을 쓴다는 사람이 사람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 아버지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그때는 우리 집 땅이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아주 넓었으며••••• P. 83
차천자라는 사람이 J시의 입암면 대흥리에 보천교를 세웠다. 대흥리에 교당을 지으면서 신도들에게 인장과 교첩을 발급했고 이를 얻으러 논밭을 팔고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때부터 쪼그라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코청을 뚫어 코뚜레를 걸어놓으면 송아지는 꼼짝없이 자신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집의 운명에 자신이 따를 수밖에 없듯이. P. 96
전염병에 형들을 잃고 열네살에 부모까지 잃은 아버지는 송아지를 기르고 쟁기질의 명수가 됐다. 송아지가 힘이 세지면서 소를 따라갈 수 없는 소년이 안타까워 아버지의 외조부가 코뚜레를 만들어 주지만 마음 약한 소년은 차마 코청을 뚫지 못한다.
지서 옆에 소를 누이고 소의 배를 밴 채 밤을 지새우다 동이 트면 다시 소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와 소에게 달구지를 달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P. 113
아버지 나이 열일곱에 전쟁이 난다. 한 달도 못되어 J시는 인민군에게 점령 당한다. 소집령을 받자 형사였던 막내 작은아버지는 사당에 사는 떠돌이 큰봉이를 시켜 작두로 아버지의 검지를 잘라버린다. 서울 수복후 남한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지만 J시는 전쟁 초기보다 더 난리통에 빠진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마을에 주둔한다. 아버지는 소를 지키기로 했다.
당신은 잊어버릴 일은 좀 잊어뿔고 살어요. 뭔 그르케 하나 하나 다 기억을 허고 그것을 다 갚어야만 헌다요?
갚는다고 갚을 수 있는 일이간? P. 140
정부 정책을 믿고 융자를 받아 소를 늘린다. 당시 우사 옆에는 방 한칸에 부엌만 딸린 집이 있었다. 덩치가 크고 귀가 어둡고 셈을 할 줄 몰랐던 웅이가 살았고 웅이가 나간 다음에는 엄마 말도 잘듣지 않는 낙천이 아저씨가 살았던 집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딱 하나 아버지 말만 들었다는 것이다. 웅이 집에는 전쟁 통에 진 빚이 있다고, 다리밑에 살다 천변 기회정리때 떠돌이가 된 낙청 아저씨는 난리통에 밤새 소를 지킬때 함께 곁에 있어준게 고마워사 거둬들인것이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렇게 속는 척해줄 뿐 속지 않는다고. 아버지들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급기야 친구는 속는 척해주는게 아버지들의 역할이라고까지 했다. P. 156
비를 피해 들어간 폐가에서 나무궤짝을 발견한다. 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할때 돈이 들어 있던 궤짝이다. 돈이 필요할때 아버지가 모를법한 것들을 생각해 그걸 사야 된다고 말하면 돈을 꺼내 주던 나무궤짝이다.
내가 능력이 있었으면 너가 그 먼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될 것인데 P. 171
나는 너에게 편지를 지대로 쓰기 위해서 한글을 배우러 다닌다. P. 175
아버지 함자를 댈 때면 바로 친절해지고 다정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제 아버지라 항상 뿌듯했습니다. P. 185
나무궤짝에는 월급을 더 받기 위해 리비아 근무를 자청한 큰오빠와 아버지가 주고 받은 편지뭉치가 있었다. 무뚝뚝한 오빠가 당시 선택한 편지 쓰기는 아버지에게 큰 위로가 된 듯했다.
무섭기만 했시믄 어찌 매일을 살겄냐. 무섭기도 하고 살어갈 힘이 되기도 허고•••••• P. 195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때야 깨달았다. P. 196
젊은 날에 먹성이 좋은 자식들이 음식을 먹는 걸 보면 양식 걱정에 무서웠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다음 날 새벽이면 우리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눈을 다 쓸어놓으셨잖어요. P. 205
아버지가 훈육을 위해 회초리를 든 것을 지금까지 나는 딱 한번 보았다. P. 207
시험 좀 떨어졌다고 집을 나가야?
앞으로도 뭔 실패만 하먼 다 집어치우고.
짖을 나갈 테냐? P. 209
무엇 하나 빠질게 없이 잘하던 셋째 오빠가 고입에 실패하고 가출했을때 수소문 끝에 오빠를 집에 데리고 왔다. 빈집에 오빠를 데리고 가 회초리가 다 부러질때까지 먀질을 했다.
내가 자꾸 넘어지자 아버지는 자전거 안장이 높아서이지 네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P. 227
늘 아버지에게 형에게 물어보라, 형이 하라는 대로 하라, 같은 말만 듣다가 형을 도우라, 는 말을 듣게 되니 나도 모르게 무릎이 휘청거렸다. P. 253
둘째의 이야기다. 형이 동생들까지 같이 데리고 살때 연락도 없이 아버지가 형을 찾아갔다. 옹색한 형편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흑석동 당숙네를 찾아 갔다. 십년 전에 빌려준 돈을 돌려 받으러 갔다가 방한칸에 일곱 식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연탄이며 쌀까지 배달 시켜주소는 그냥 J시로 돌아온 아버지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라, 눈치 보지 말고. P. 261
해양대학교를 지원한다고 했을때 극구 반대하던 아버지 였다. 막상 떨어지고 무전여행중 간첩으로 오인되어 경찰에 잡힌 둘째를 데리도 오다 여관에 머물때 목욕후 맥주를 나눠 마시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언제부턴가 서로한테 아그들한테 말허지 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살었네. P. 274
너그 아버지는 그알 이후로 나한티 말 안 하고 집을 비운 적이 없다. P. 284
내가 다수확상 받을 때마다 벽에다 걸어놓으면 너그 아버지가 바로 떼버려서 그 일로 싸울때도 있었네. P. 288
엄마의 말이다. 생전 시험 같은 것은 보지도 않던 사람이 시험도 보고 교육도 받아 소지한 엽총으로 멧돼지는 고사하고 새 한마리 못잡아 왔다. 신작로에서 이웃이 진짜 총알이 들어 있는건 아니제라며 놀리면서 방아쇠를 당겼는데 아버지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다.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가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라는 아버지다. 신품종이 들어올때 마다 적극 나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다수확상을 받지만 벽에 걸어 놓으면 상은 학교에서 받는 것이 상이라면서 큰 오빠가 받은 상만 쭉 걸어 놓는다.
아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분노가 치밀어서 죽을 것 같다고. 그러니 알아듣고 싶지 않고 그래야 자기가 버틸 수 있다고 했어. 전쟁도 지나갔는디 이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냐고 그때까지는 아들을 지켜주는 거만 생각할란다고 했어. P. 300
그리 열심히 했는데 불행하게도 시험날도 다가오기 전에 전쟁이 터져서 공부한게 도루묵이 되었소. P. 306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었는 것인가. P. 312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P. 322
자네 아버지는 자네 옆에 그저 있어주고라도 싶은데 자네가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며 고통스러워했네. P. 323
박무릉의 이야기다. 긴급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졌을때 수배당한 셋째를 숨겨 달라며 전쟁통에 헤어진 박무릉을 찾아왔다. 매일 아침 밥과 반찬을 갖고 왔지만 아들 앞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아들이랑 말을 않냐고 물으니 머리통 큰 놈이랑 말을 섞어봐야 이길 수가 없다고 한다.
부모님은 게임기라고 하면 손도 못 대게 하는데 할아버지는 제 또래들이 다 그거 가지고 노는데 아예 하지도 못하게 하면 친구도 못 사귀고 반항심만 생긴다고 하셨어요. P. 326
그때 내가 니 등록금 못 내줬으니까 동이 등록금은 이것으로 내라. P. 335
제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병원에 입원하려고 서울 오시는 길인데도 농협에 가서 수표를 끊으신 거에요, 저를 주려구요. P. 338
오래전 제가 운전하는 자동차 뒤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돈 봉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 그때는 왜 저렇게들 하시나, 싶었는데 이제야 두분의 마음이 짚어져서 뒤늦게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P. 342
아들의 아들, 그러니 손자의 말이다.
너는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응게••••••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아버지는 집을 나갈 때 '낙천이 황소'를 두고 간 사람이라, 셈을 해봐도 장례는 피러줘야 맞는다, 안 그러면 빚지는 것이제, 했다. P. 354
아버지는 마치 내일이라도 세상을 떠날것 처럼 엄마와 자식들 뿐 아니라 웅이 낙천이에다가 조카 이삭이 까지도 일일이 챙기며 각자에게 줄 것들을 부탁한다.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 냈어야,라고.
작중 아버지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다. 없는 형편에 겨울마다 형제 모두에게 새 털신을 사서 신겨 주는 아버지다. 자기의 아픔은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아버지가 되고 자식들이 독립할 때가 되니 이제사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없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속 아버지와 동갑인 내아버지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