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뭐라고 - 깨달음이 도대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거죠?
고이데 요코 지음, 정현옥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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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부터 이 시대의 최고 강백(講伯)으로 불리우는 여천(如天) 무비(無比)스님의 『화엄경강설(華嚴經講說)』읽고 있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법화경(法華經)』 등의 다른 대승경전들과 달리 워낙 방대한 분량의 경전이라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요약본이나 단행본으로만 접해 보았을뿐 작심하고 81권 완역본에 달려든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나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같은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들은 아마 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익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구절도 같은 경전에 등장하는데 다만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사실 수긍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후 처음 설한 내용을 담은 경전이라 중생들이 듣고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깨닫지 못한 중생과 깨달은 부처님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는 것은 아무리 불교가 포용의 종교라 해도 너무 파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와 병행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도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나의 눈에 띈 책이 이번에 소개해 드릴 『깨달음이 뭐라고』이다. 그런데 책 표지로봐선 그렇게 심각하게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닌 듯해 보이고 코로나로 외출을 자제하는 시기와 맞물려 추석 연휴 기간에 읽기 안성맞춤일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불교미술, 정확하게는 불상의 매력에 빠져 점차로 불교를 사랑하게 된 고이데 요코(小出遙子)라는 서른 두 살의 일본 여성이다. 불상에서 시작한 그녀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불상을 넘어선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나름대로 여러 해 동안 노력한 끝에 불교의 한가운데에는 ‘깨달음’이라는 세계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뜻밖에 인터넷 안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절 히간지(彼岸寺, www.higan.net)에 글을 연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연재물의 타이틀은 〈열려라! 깨달음이여!〉였다. 이 지면을 통해서 저자는 내로라하는 스님들께 (당연히 일본스님들이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한 분 한 분께 질문을 던지고 스님들은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엄격하게 자신들만의 답을 들려주게 되는데, 모두 여섯 회에 걸쳐 〈열려라! 깨달음이여!〉를 주제로 스님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결과물이 바로 『깨달음이 뭐라고』이다. 여섯 분의 스님들 중에는 『생각 버리기 연습』의 저자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고이케 류노스케(小池龍之介) 스님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와 여섯 분의 스님들은 각각 수많은 문답을 주고받는 가운데에서 ‘깨달음’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깊고도 폭넓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 내용을 여기에서 모두 담기도 어려울뿐더러 앞으로 읽을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러워 그 중에서 몇 분 스님의 말씀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 글이나 이 책에서 언급된 스님들의 말씀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참고가 될지언정 ‘진정한 깨달음’은 본인 스스로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 두고 싶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나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말 역시 실유(實有)일수도 가유(假有)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커다란 기차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 열심히 앞을 향해 나아가서 제일 앞 차량의 제일 앞에 타고 있건, 뒤 차량에서 빈둥거리고 있건 같은 시간에 같은 역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열심히 땀 흘리고 있다고 해서 거드름 피울 것도 없고, 멍하니 있다고 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p.73)

 

   “내가 추구하던 세상은 다른 어디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었구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곳과 지금 있는 이곳이 하나였구나!”(p.168)

 

   “당신은 처음부터 깨달음을 얻고 있는데 무엇을 좇고 있나요? 다툴 필요도 없고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 부처니까요.”(p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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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지수신 - 하
류정식 지음 / 물병자리H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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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오랜만에 역사소설을 그것도 총 700쪽에 달하는 두 권짜리로 된 역사소설을 집중해서 읽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과정과 이후 유민들에 의한 끈질긴 항전을 다룬 백제 지수신 百濟 遲受信이라는 책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휴가 기간에 집에서 여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받던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왜 한순간에 황음을 일삼은 방탕한 군주의 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백제를 마지막으로 지킨 무장은 계백 장군밖에 없었는지, 낙화암의 삼천궁녀는 사실이었는지와 같은 의문을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 왔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한 의문을 버릴 수 없어 삼국사기(三國史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같은 문헌을 살펴보게 되었고, 계백처럼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지만 백제부흥군의 주역으로 임존성의 성주 지수신(遲受信)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지수신이라는 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삼국사기(三國史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외에도 남효은의 추강집(秋江集)부여회고(扶餘懷古)’와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단편적인 내용만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의 성격과 행적을 조명하기 어려워 결국은 백제의 멸망과정과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을 되짚어보며 그의 행적을 소설을 통해 조명하고자 했음을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은 의자왕이 당에 항복한 660년부터 임존성이 함락된 663년까지 백제 땅 곳곳에서 벌어진 지수신, 복신, 흑치상지 등의 무장과 승려 도침 그리고 백제 유민이 함께한 저항운동이었다.

 

    역사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록되어야 하지만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소설이다 보니 몇 명의 가공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의자왕(義慈王)과 왕비 은고(恩古) 사이에서 태어난 백제의 공주 율()과 백제군의 수장이었던 좌평 흥수(興首)의 딸 선이 그들인데 이 두 명의 여인은 이 책의 주인공인 지수신을 흠모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책 앞부분에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당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전투의 주요배경이 되는 지도를 수록해 두어 책의 이해를 도와주고, 뒷부분에는 참고문헌을 기재해 두어 역사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저자는 글의 전개과정과 등장인물들과의 관계설정이나 심리묘사 등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마치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템포의 강약과 극적 긴장감을 적절하게 배합한 필력으로 미루어 이 책이 그의 첫 번째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고증 없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10년의 세월을 구상과 퇴고를 반복하였다고 하니 저자의 그 동안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백제의 멸망과정과 부흥운동은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지라 부연하면 사족일 것 같고, 지수신과 두 여인과의 로맨스는 언급하는 것 자체가 감흥을 깨뜨릴 것 같아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다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사실만은 이번에도 진실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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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지수신 - 상
류정식 지음 / 물병자리H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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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오랜만에 역사소설을 그것도 총 700쪽에 달하는 두 권짜리로 된 역사소설을 집중해서 읽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과정과 이후 유민들에 의한 끈질긴 항전을 다룬 백제 지수신 百濟 遲受信이라는 책인데,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휴가 기간에 집에서 여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받던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왜 한순간에 황음을 일삼은 방탕한 군주의 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백제를 마지막으로 지킨 무장은 계백 장군밖에 없었는지, 낙화암의 삼천궁녀는 사실이었는지와 같은 의문을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 왔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이러한 의문을 버릴 수 없어 삼국사기(三國史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같은 문헌을 살펴보게 되었고, 계백처럼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지만 백제부흥군의 주역으로 임존성의 성주 지수신(遲受信)에게 관심을 두게 된다. 지수신이라는 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삼국사기(三國史記)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외에도 남효은의 추강집(秋江集)부여회고(扶餘懷古)’와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단편적인 내용만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의 성격과 행적을 조명하기 어려워 결국은 백제의 멸망과정과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을 되짚어보며 그의 행적을 소설을 통해 조명하고자 했음을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 백제 부흥운동은 의자왕이 당에 항복한 660년부터 임존성이 함락된 663년까지 백제 땅 곳곳에서 벌어진 지수신, 복신, 흑치상지 등의 무장과 승려 도침 그리고 백제 유민이 함께한 저항운동이었다.

 

    역사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록되어야 하지만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소설이다 보니 몇 명의 가공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의자왕(義慈王)과 왕비 은고(恩古) 사이에서 태어난 백제의 공주 율()과 백제군의 수장이었던 좌평 흥수(興首)의 딸 선이 그들인데 이 두 명의 여인은 이 책의 주인공인 지수신을 흠모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책 앞부분에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당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전투의 주요배경이 되는 지도를 수록해 두어 책의 이해를 도와주고, 뒷부분에는 참고문헌을 기재해 두어 역사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저자는 글의 전개과정과 등장인물들과의 관계설정이나 심리묘사 등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마치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템포의 강약과 극적 긴장감을 적절하게 배합한 필력으로 미루어 이 책이 그의 첫 번째 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고증 없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10년의 세월을 구상과 퇴고를 반복하였다고 하니 저자의 그 동안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백제의 멸망과정과 부흥운동은 이미 독자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지라 부연하면 사족일 것 같고, 지수신과 두 여인과의 로맨스는 언급하는 것 자체가 감흥을 깨뜨릴 것 같아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린다. 다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었다.는 사실만은 이번에도 진실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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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사자의 서 - 개정 완역
빠드마쌈바와 지음, 중암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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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코로나19 사망자가 729일 현재 66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고, 그중에서 미국이 15만 명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는 국가로 나타나고 있다. 올 해초만 하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해 국가간 봉쇄조치가 이루어지고 세계 경제가 대공황 수준으로 떨어지리라고 그 누가 예측이나 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무수히 많은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중국 중남부지방의 집중호우로 세계 최대 규모 수력댐인 샨샤댐 붕괴 우려가 커지고 있고,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요 며칠 사이 집중호우로 특히 부산과 대전지역에서 인명 피해를 포함하여 비 피해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각종 재난이나 교통사고, 테러 등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 친척, 심지어 자신에게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 닥쳐온다면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본인도 지난 200910월부터 20103월 사이에 친척 네 분을 잇달아 떠나보내면서 그 상실감과 충격으로 한참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기간을 조금 더 확장하면 부친과 형님도 포함된다. 코로나에서부터 시작해서 개인사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장황하게 죽음에 대해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책을 소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미 익히 알고 계시거나 최소한 책이름 정도는 들어 본 분들이 계실 것이다. 이 책은 티베트불교의 대성인이자 2의 붓다로 꼽히는 빠드마쌈바와(蓮花生)8세기에 저술한 경전으로 원래 책이름은 티베트어로 바르도퇴돌이라고 하는데 죽음과 환생 사이(바르도)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영원한 해탈에 이르는 법(퇴돌)’이라는 뜻이며, 빠드마삼바와가 깊은 수행으로 체험한 사후 세계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이전에도 영어나 일본어로 씌여진 책이나 그 책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들이 있었으나 판본상의 오류와 원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많아 1991년 남인도에서 티베트불교를 배운 이래 정신적 스승을 의미하는 구루 빠드마쌈바와가 마음의 본성,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나타내는 마하무드라를 성취하여 제2의 붓다가 된 곳인 네팔의 양라쉬에 머물며 수행과 티베트어 경론 번역에 힘쓰고 계신 중암 선혜 스님께서 오류를 수정하고 원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한 주석을 달아 2010년에 완역본으로 티베트 사자의 서를 출간하였고 이번에 기존 번역의 미진한 부분과 판본의 오탈자와 누락 등을 교정하여 재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1편 바르도퇴돌의 전행 : 생시에 닦는 일상의 근행, 2편 바르도퇴돌의 본행 : 해탈을 위한 기원문, 3편 바르도퇴돌의 본행 : 네 가지 바르도의 출현, 4편 바르도퇴돌의 후행 : 죽음의 표상 관찰과 기만, 5편 바르도퇴돌의 보유 : 해탈왕생의 기원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토를 간택하는 가르침인 까르마착메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책의 앞부분에는 몸에 걸침을 통해서 오온의 자연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딱돌 만다라와 구루 빠드마쌈바와의 초상, 구루 빠드마쌈바와의 연화광정토, 법성의 바르도에서 출현하는 42존 적정(寂靜)의 붓다들, 법성의 바르도에서 출현하는 58존 분노(忿怒)의 헤루까들(영웅적인 남성의 원형을 상징하는 신)의 그림들과 육도윤회도가 실려 있어 책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티베트어와 범어가 혼재하여 읽기 난해하고 주술적인 밀교의 성향이 짙어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책임은 분명하다.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보고 난 후에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책을 통해 우리들은 생의 참된 의미와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고, 죽음의 과정을 통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경전이나 불서(佛書)가 그러하듯 곁에 두고서 반복해서 읽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티베트불교 최고의 수행 지침서인 티베트 사자의 서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겨 보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가져 보시길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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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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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89일은 호머.B.헐버트 박사의 70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이날 오전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의 100주년 선교기념관에서 추모식이 열렸다고 한다. 그 당시 얼핏 관련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헐버트 박사라고 하면 학창시절에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교육과 선교활동을 하였다는 정도의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내용만을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연히 접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읽어가면서 단순하게 그가 선교사로서의 활동만을 한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자 한평생을 바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가슴 속에서 미안함과 존경심이 함께 복합적으로 일어남을 느꼈다. JP모건체이스은행 한국회장을 역임하셨던 김동진 회장께서 대학시절 헐버트 박사의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감동을 받아 헐버트 박사를 연구하면서 시작된 이 사업은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박사의 모교인 다트머스대학, 컬럼비아 대학, 버클리 대학, 유니언 신학대학 등 대학과 연구기관을 방문하고 런던의 고서점가와 뉴욕타임스100년 전 신문기사 등을 훑기도 하며 헐버트 박사의 후손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그와 관련된 유품과 역사자료들을 모아 1999년 헐버트 박사 기념 사업회를 발족하여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고 박사님의 후손들을 초청하고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하고 있으며 2010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2016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에 이어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7부로 구성된 이 책은 188654, 뉴욕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소형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610일에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출발한 지 두 달 만인 75일 아침에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는 것으로 운명적인 조선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그가 일제의 박해로 19077월에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한 이력과 그리고 그 이후 미국에서의 38년 동안의 독립운동 과정을 살펴보면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는 말씀에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것이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영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인데 조선과 미국이 협력한 최초의 개화사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교사로 온 헐버트와 벙커 그리고 길모어 세 사람은 조선에 온 지 10일 만에 교과 과목과 수업 일정 등 학교운영에 관한 기본 원칙을 만들어 고종의 재가를 받고 이에 조정에서는 18개조로 이루어진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이라는 이름의 조선 최초의 신식학제를 발표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조선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공부하여 조선에 온 지 두 달여 만에 입학식에서 서투르지만 조선말을 구사하고, 5개월 만에 조선말을 섞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년째 될 즈음에는 조선말로 상당한 수준의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2년째 되던 무렵에는 조선어 동사 일람표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제대로 볼 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해서 자신이 직접 서양에서 가르치는 근대 서적을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조선에 온 지 4년 반 만인 18911월에 선비,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의미의 170쪽의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순한글로 출간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로서 천문, 지리, 각 나라의 정부형태, 사회제도, 풍속, 산업, 교육, 군사력 등을 담은 유용한 책이다. 그는 한글에 매료되어 1892년에 이어 18966, 조선글자(The Korean Alphabet)를 조선 최초의 월간지인 조선소식에 발표하여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과 세종의 위대함을 설파하고, 헐버트 자신이 창간한 한국평론1903, 2회에 걸쳐 훈민정음(The Hun-min Chong-eum)을 발표하였다. 이 글은 훈민정음에 관한 근대적 의미의 최초의 언어학적 고찰로서 한글 자모를 일일이 분석하고 영어 자모와 비교하였다.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글 맞춤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지석영, 주시경 선생 등과도 깊은 교류를 가지게 된다. 헐버트 박사의 관심사는 역사와 언어뿐만 아니라 설화, 속담, , 소설, 음악, 예술, 풍속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어 한국의 설화를 국제 학술회의에 소개 하고, 한국 속담 123개를 조선소식한국평론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한과 희망이 담겨있는 아리랑에 최초로 음계를 붙이기도 하였다. 세계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거북선 모형을 제작하고, 금속활자를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를 위탁한 것도 바로 그였다. 헐버트의 집념 어린 역사 탐구는 단군 시대부터 조선 고종 시대까지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우리나라 최초의 온전한 역사서로 평가받는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라는 명저 탄생으로 이어진다. 1905년에 두 권으로 출간된 한국사 800쪽이 넘는 360,000개의 단어로 쓰인 초대형 한국 역사책으로 근대 역사학의 출발점이자 자주적 역사 기술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헐버트는 한국사에 이어 1906년에 한민족의 특성, 역사, 문화, 산업, 사회제도, 생활상을 집대성하고 을사늑약에 대한 분노를 눈물겹게 표출한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을 뉴욕과 런던에서 동시에 출간하였는데 이는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을사늑약의 억울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는 한국인들은 미개해서 자치능력이 없다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일본인들의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교육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희망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탄생에 기여하고, 국내외 각종 강연이나 언론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9058,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영국이 양해한다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자 주권상실의 심각한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을 지킬 수 있고 대한제국이 처한 현실과 일본의 부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헐버트를 통해 고종의 친서를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전달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막아줄 것을 호소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한 서울 주재 미국 공사 모건(Edwin V. Morgan)이 헐버트의 미국행 비밀을 일본에 흘리고 일본은 헐버트의 미국행을 알고서 을사늑약 처리를 서두르게 되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이미 미국과 일본간에는 미국의 필리핀 통치와 한국의 보호통치에 합의를 한 상황인지라 미국의 백악관과 국무부의 냉대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힘의 논리만이 통하는 국제정세의 비정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고종 황제가 헐버트를 특사로 미국에 보내 을사늑약을 저지해 보겠다는 계획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국주의적 사고로 볼 때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친일파 대신들이 득시글대는 상황에서 고종 황제의 강력한 주권 수호 의지를 보여 주었고 을사늑약이 국제법적으로 무효임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를 남겼다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헐버트도 자신의 특사역할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적어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했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는 일은 성공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이후 헐버트는 19076월에 열린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에 앞서 또다시 고종으로부터 특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세계열강의 무관심 내지 방관으로 말미암아 회의 참석은 고사하고 이준 열사의 순국과 고종 황제의 폐위 그리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이어지고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정사였던 이상설은 사형을, 이미 순국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헐버트 역시 일제의 위협에 더이상 대한제국에 머물 수 없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38년 동안 각종 언론회견이나 순회강연을 통해 한국인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한국 청년들은 낙심하지 마라는 연설을 이어가고 친일 미국 지식인들에 둘러싸여 외롭게 투쟁하게 된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기초하고 그해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한국독립호소문을 제출하여 31 독립운동을 알리고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던 헐버트 박사는 194978,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초청장을 받아들고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729일에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그토록 갈망하던 한국으로 왔으나 긴 여정에 지친 육신이 그를 괴롭혀 한국에 온지 일주일만인 85일에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라는 평소의 소원대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영면에 들어가게 된다. 대한민국은 헐버트 박사 서거 다음 해인 195031, 미국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후 독립장으로 명칭 변경)을 추서하였으나 독립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에 이은 세 번째 등급으로 1950년 당시에는 공적 조서가 없는 채로 서훈하였기에 공적 심사를 제대로 한 연후에 서훈 등급을 결정하는 것이 올바른 서훈 행적으로 본다는 의견을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측은 국가보훈처에 제시한 바 있다. 1999년 발족된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는 2006년에 정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고 헐버트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 곧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라는 인식하에 학술회의와 서적 발간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을 하고 있고, 특히 매년 8월 헐버트 박사 서거일에 맞춰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당초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로 묘비명을 각인하기로 하였으나 한국전쟁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 묘비명 없이 50년의 세월이 흐르다가 199950주기 추모식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을 새겨 넣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20137, 헐버트 박사를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2014109, 한글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증손자가 헐버트 박사를 대신하여 훈장을 받았다. 이로써 헐버트 박사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건국훈장과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역사 인물이 된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해 수행한 업적을 고려하면 그만한 예우는 오히려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23살에 조선과 인연을 맺어 63년 동안 대한민국과 한국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헐버트 박사는 지금 한강을 내려다 보시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계실까 궁금해진다. 아직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남한 역시 이념으로 양분되어 있는 상황을 보시고 그가 살아생전 주창해왔던 한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외세의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국력을 기르고 단결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싶다. 장차 남북한이 평화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싶다. 우리들이 이제 헐버트 박사의 꿈을 실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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