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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ㅣ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제철 과일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대부분의 계절에 다양한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귤’은 뭐니뭐니 해도 따뜻한 이불 속에서 소복이 쌓아두고 까먹는 귤이 제일인 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2023년 가을, 이희영 작가의 신간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가 출간되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4/0419/pimg_7240651964264772.jpg)
이희영 작가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로 2013년 제1회 김승옥문학상 신인상 대상을 수상하고 이후 『페인트』로 2018년 제 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소설 『페인트』를 통해 이희영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작품의 내용이 흥미로우면서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깊이 고민해볼 만한 지점들이 있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주인공 '선우혁'이 세상을 떠난 형 '선우진'의 메타버스 속 공간에 접속하게 되면서 형과 '곰솔'이라는 인물의 관계, 그리고 형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이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은, 타인이 아닌 낯선 스스로를 만나는 시간인 것 같아. 그 사실을 너를 통해 배웠어."(p.121)
곰솔의 편지中
선우혁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중간중간에는 곰솔이 선우진을 향해 하는 이야기가 편지 형식으로 쓰여있다. 곰솔은 선우진과 둘만이 공유했던 기억의 공간인 'JIN의 정원'에서 선우진과 시간을 보내며 자신이 몰랐던 선우진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말이야 가끔 인간에게도 각자 특별한 제삼의 눈이 있다고 생각해. 남들은 감지할 수 없는, 아니면 크게 감흥 없는 무언가를 유독 강하게 느끼고 끌릴 때가 있잖아.그것이 재능이나 적성이 될 수도 있고, 나만의 가치관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인연이나 사랑이 될 수도 있겠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똑같이 반응한다면 세상이 되게 삭막할 것 같지 않아? 물론 보편적인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서 세상에는 또 비밀이 생기는 모양이야. 내 온점에만 반응하는 무엇을 다른 이들은 결코 느낄 수 없을 테니까, 가끔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P.158)
곰솔의 편지中
선우진과 곰솔은 자신이 가진 제삼의 눈으로 서로를 알아봤던 걸까. 그렇게 둘은 특별한 사이가 되어 둘만이 공유하는 공간 안에서 가까워진다.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대범하든 그렇지 못하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성격과 가치관이 존재하니까. 딱 하나의 해결책만 있는 건 아니다. 도운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 갈 것이다. 그러니 내가 굳이 비스킷의 주인을 만났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겠지."(P.187)
이 소설은 선우혁이 형 선우혁의 메타버스 공간인 'JIN의 정원'에 접속하면서 형과 곰솔의 관계, 그리고 형에 대한 기억에 다가가는 과정과 함께 친한 친구 도운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이기도 하다. 선우혁은 친구 도운이 학교에서 오해를 받고 힘들어하는 것을 두고볼 수만은 없어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돕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해나가며 성장하는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런 게 다 무슨 의미일까? 싶었어. 하지만 그냥 방치하기 싫었어. 도저히 그럴 수 없었거든. 이곳은 너의 시간이 고여 있잖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그 시간을 이대로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어.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정원은 현실이 아니니까, 가상 세계니까. 혹시 정말 단 한 번쯤은 JIN의 아바타가 찾아와 주지 않을까? 그런 허무맹랑한 바람이 생겼어. 현실에서는 할 수 없고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모두 가능하니까."(P.211)
곰솔의 편지中
곰솔은 선우진이 떠난 뒤에도 JIN의 정원을 관리하며 그가 만든 공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한다. 십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홀로 이 공간에 접속하여 공간을 수리하고 꾸미는 그의 행위는 세상을 떠나 곁에 없는 사람과 그와의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일 테다. 그것은 '기억'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지 않을까.
"부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부조 작품을 보며 누구도 조각된 면 너머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타인이 보여 주는 모습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라 단정 짓지 않으면 된다. 좋은 인상을 주었든, 나쁜 이미지로 남든 간에 말이다. 어른들의 말처럼 열 길 물속보다 깊은 게 인간이니까.(P.243)
선우혁은 '프프'라는 가상의 인물과 대화하는 앱과 형 선우진의 메타버스 속 공간 'JIN의 정원', 그리고 그 정원이 사라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던 '곰솔'이라는 인물을 통해 형의 기억과 형이라는 사람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 그리고 친한 친구 도운에 대해서도 자신이 몰랐던 그의 모습을 발견해 가며 사람의 면면을 바라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아가게 된다.
4월이다. 유독 '기억'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할 것 같은 달이다. 이별한 이들을, 그들과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에 신맛'이 느껴진다. 그래서 곰솔도 선우혁도 귤을 싫어했지만 결국은 그 귤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이와의 기억을 담고 있는 대상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은 지금, 가슴에 신맛이 차오른다. 싫지 않은 신맛이다. 잊고 있던 누군가가 있다면, 기억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여름이 다가오기 전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당신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 '당신의 귤은 어느 계절인가요?'
※ 이 책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만 '독자'로서 개인적인 감상과 느낌에 충실하여 적고자 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