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 갈색 눈 -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상체질로 나를 분석해보니 나는 태음인에 가깝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어떤 유형에 특히 가깝다는 것이지 100% 일치한다는 말은 아니다. 어찌 오묘하고 복잡한 인간을 하나의 유형으로만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태음인의 성향 중 나와 딱 들어맞는다고 느낀 것이 있었으니... 바로 '경험주의자'라는 것이었다. 몇번씩 경험해봐야 마음이 움직이는, 대상을 보고 판단할 때 경험에 의지하는 면이 크다는 것. "나 태음인 맞나봐~^_^"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우리는 모두 '경험'에 크게 의지하고 있지 않나? 책에서만 보고 말로만 듣던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을 때, 상상만 했던 일들을 내가 직접 경험했을 때 확실히 다르다. 더 강렬하게 뇌리에 박힌다. 우리는 말로는 차별 없는 세상을 열심히 외쳐댄다. 그런데 실제로 어떤가? 무의식적으로 세상을 나와 너, 우리와 그들로 구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경험'이 선물한 내면의 변화

 

   교사 엘리어트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어주었다. 눈의 색깔이 푸른색이냐, 갈색이냐에 따라 차별하고 차별당하는 경험을 실제로 하게 한 것이다. 아이들은 차별을 하면서 누군가의 위에 서서 많은 혜택을 받고 우쭐해지는 경험을 해보았다. 동시에 차별을 당하면서 자신이 열등하고 쓸모없는 존재임을 경험해보았다. 단지 눈 색깔이 푸르고 또는 갈색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아이들은 실험을 마친 마지막 순간에 눈 색깔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며, 나아가 피부색이 차별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동시에 한없이 아름다운 우정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실험은 본인이 직접 '경험'하는 교육법의 효과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런데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엘리어트의 이 실험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아이들 중에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차별할 일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차별받는 것을 경험하게 해서 정서적으로 큰 상처를 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론이다. 나 역시 이 실험에 대해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경험에 의거한 교육의 중요성을 적극 인정하는 목소리, 실험의 내용을 듣자마자 손사래를 치며 "비인간적이야, 상처를 주는 잔인한 행동이야!'라는  비명들, 관련 사례를 담은 다큐멘터리나 영화 등을 통해서 충분히 알려줄 수 있다는 의견 등 정말 다양한 생각을 만날 수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조금씩 생각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엘리어트의 차별실험이 완전무결함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다. 실험을 하면서 엘리어트 본인도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험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삶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내면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내면의 움직임은 자신이 스스로 겪었을 때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 바로 이 '경험'의 중요성을 알려준 것이다.

 

 

역사 속 '수많은 개인들'의 책임

 

   이후 엘리어트는 성인들에게도 이 차별실험을 진행했다. 1984년 7월, 교정국 직원들을 대상으로 열린 아이오와시 워크숍에서 일어난 일은 매우 인상적이다. 역시 이들도 눈 색깔로 분리되어 차별을 하고 당하는 상황을 경험했다. 그런데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 있던 푸른눈의 사람들은 이 실험에 동조하는 갈색눈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워크숍을 진행한 엘리어트에게 불만을 표시하며 저항했다. 이것은 "마치 푸른눈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갈색눈의 사람들의 공모를 무시하고, 문제는 순전히 권력을 가졌고 비합리적인 단 한 명의 개인에게 있다고 가정하는 듯 했다."  단지 이 실험에서만 국한된 모습일까?  이것은 다른 국가를 식민지배한 경험을 가진 나라들의 국민들에게도 해당되는 것 아닐까? 20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독일 나치즘의 광풍(狂風)이 오직 히틀러라는 개인의 책임인 걸까?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는 천황이라는 인물의 책임인가? 엘리어트의 차별실험이 의미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역사에 등장했던 잔혹한 식민지배의 책임이 '단 한 명의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수많은 개인들'에게도 있다는 것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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