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 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코너 우드먼 지음, 홍선영 옮김 / 갤리온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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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시장의 트렌드는 해당 상품이 ‘윤리’적으로 생산되어 소비자에게까지 공급되느냐 이다. 스타벅스 같은 주요 커피 체인점에서도 공정무역을 통해 생산된 커피콩으로 커피를 내린다고 설명하고, 실제로 매장을 방문해보면 공정무역 관련 브로셔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공정무역 인증마크가 붙어 있는 제품을 보면 신뢰가 간다. 더 많은 커피콩을 재배하라고 아프리카 주민들을 착취하지 않고, 정당한 방식(그런데 정당한 방식이 뭘까?)으로 재배해서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공급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품에 공정무역 인증마크가 부착되면 그 제품은 정말 공정하게 생산된 것일까? 100% 단정할 수 있을까? 만약 실제로는 인증마크가 부착된 커피를 생산하는 아프리카 주민들의 삶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면? 단지 공정무역 인증마크라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나는 윤리적이고 바른 소비자야!”라는 자기위안의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 코너 우드먼은 기차 여행 중에 커피를 마시다 컵에 적힌 ‘당신이 마신 이 커피가 우간다 농민의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이 문구가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초콜릿, 휴대폰, 신발, 차(tea) 등 사람들이 자주 소비하는 상품들의 생산과정을 역추적하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의 여행을 함께 하면서 알게 된 것은 공적무역 인증마크를 부착하는 일이 실제로 공정무역과는 별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 일종의 사업이 되어 윤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현대 시장의 트렌드를 유지시키기 위한 홍보정책일 수도 있다는 것 이다.

 

 

원조든 경영이든 해당 지역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해야.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일명 비정부기구의 아시아․아프리카 원조정책의 비현실성이다. 예를 들어 콩고 민주공화국에는 다양한 비정부 기구가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은 학교를 세우고, 펌프를 설치하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나 작가가 직접 보니 그냥 방치된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학교를 세웠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가 없었고, 펌프를 설치했지만 펌프를 관리할 사람을 훈련시키거나 유지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 사실들은 현재 비정부 기구들의 원조정책이 근본적으로 큰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즉 해당 지역의 실정을 간과한 정책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코트디부아르에서 면화사업을 하는 ‘올람’이라는 회사의 운영방침은 주목할 만하다. 올람은 코트디부아르의 농장기계화를 위해 트랙터를 제공하는 대신 자금 대출 패키지로 황소를 제공해 밭을 갈았다. 실제로 더 나은 결과를 얻을 것으로 생각해서 트랙터를 농민들에게 차례로 제공했으나 농부들이 자신이 쓸 차례가 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게 되었고, 결국 작물을 심기에 알맞은 시기를 놓쳐 버렸던 것이다. 면화 농사의 핵심은 우기가 시작되고 난 뒤 가능하면 빨리 땅에 있는 씨앗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축구장 면적의 1.2배인 1헥타르 짜리 땅에 트랙터를 사용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않았고, 반면 황소 한 쌍이면 5헥타르(축구장 면적의 6배)를 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농사의 성격, 경작지 면적, 기후조건 등 현지에 알맞은 방법을 찾아 적용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방문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마약 근절정책 방안으로 양귀비 재배를 단속하고 있었다. 양귀비를 재배하던 땅에는 대신 대안작물이 심어졌다. 대안작물들은 잘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농민들의 삶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니 대체 무슨 일일까? 농민들은 재배한 대안작물들을 팔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길에 수많은 검문소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만나는 탈레반, 경찰, 도적들이 모두 농민들을 세우고 통행료와 뇌물을 요구하므로 이 과정을 잘 거쳐서 시장에 도착했다고 해도 결국 농민들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양귀비를 재배했을 때는 작물의 특성상 소비하는 쪽에서 직접 구매하러 왔기 때문에 농민들 입장에서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서도 잘 살 수 있었다. 즉 마약을 근절한다는 명목으로 양귀비 재배를 막는데 사용하는 자금을 아프가니스탄의 도로 치안 유지에 지원하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인 것이다.

 

 

작가는 에필로그 6. 중국을 경계하라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의 자본주의는 식민주의 역사와 싸우고 있다. 콩고 동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서양 탓으로 돌리는 국가에 투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윤리적 난제에 발목을 잡혔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 식민지 수탈에 대한 나쁜 기억에서 자유로운 중국이 움직이고 있다.(중략) 주의하지 않으면 서양의 어수룩한 윤리 의식이 양심 없는 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꼴이 될 수 있다. 서양의 진화된 자본주의가 현재 동양의 노골적인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277쪽)

 

이는 식민지 지배주체로서 서양이 느끼는 죄책감은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리고 작가가 접한 중국의 경우를 일반화하여 ‘동양의 노골적인 자본주의’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한가? '서양의 진화된 자본주의'란 표현은 적절한가?

 

아마도 이 책을 기점으로 당분간 경제 관련 서적에 손이 많이 갈 것 같다. 어떤 행동의 동기, 기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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