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산책 - 사유하는 방랑자 헤르만 헤세의 여행 철학
헤르만 헤세 지음, 김원형 편역 / 지콜론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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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월의 따뜻한 초저녁에 태어났다. 그 시간의 온도는 평생 무의식적으로 사랑하고 추구해 온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고통스럽게 그리워했다. 추운 나라에서는 절대 살 수 없었고, 내 인생의 모든 자발적 여행은 남쪽으로 향했다.”



(pp.233-238)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를 여행으로, 특히나 예술 여행으로 이끄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왜 해마다 수백 마일을 이곳저곳으로 여행하며, 더 풍요로운 시대의 건축물과 그림 앞에서 기쁜 마음으로 서 있고,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의 삶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걸까. 왜 우리는 기차와 배에서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외국 대도시 거리의 풍경을 홀로 관찰하는 걸까. 한때 나는 이것이 일종의 배움에 대한 열망과 교양을 쌓으려는 욕구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오래된 성당의 프레스코화에 대해 노트를 가득 채웠고, 식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고대 조각상의 사진을 샀다. 그러다가 이에 지쳐 풍경과 이국적인 민속 문화만이 나의 관심을 끄는, 더 가난한 나라로의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때는 이 수수께끼같은 여행 충동이 일종의 모험심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 중에 겪은 일은 모험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잘못 배송된 가방, 도난당한 외투, 뱀이 있는 방, 모기가 들끓는 침대 등을 모험으로 본다면 모를까.

아니다, 이것도 정답이 아니다. 지금은 교양에 대한 갈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도시 전체와 큰 성당들, 큰 박물관들은 그냥 지나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우연히 발견하고 만나는 것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집중적으로, 더 섬세하게 즐기고 있다. 여행의 모험성에 대한 믿음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15년 전이나 10년 전, 혹은 5년 전보다 결코 더 적게 여행하거나 혹은 줄어든 열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더 지적으로 변모하거나, 흐릿하게 경험하는 삶의 일부를 대체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특히나 이는 순수한 미적 충동의 발현을 대체한다. 이 충동을 우리 민족에게선 거의 사라졌지만, 그리스인들과 독일인들, 그리고 위대한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은 가지고 있고, 아시아 어디에서나 여전히 찾아 볼 수 있다. (...)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에도 흐려지지 않는 순수한 관찰, 즉 눈과 귀, 코, 촉각이 스스로 충분해지는 이러한 훈련. 이것이 바로 우리 중 더 섬세한 사람들이 깊이 그리워하는 낙원이다.

여행 중에 우리는 이를 가장 잘, 가장 순수하게 추구할 수 있다. 미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언제든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할 집중력을,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은 최소한 이런 구속에서 벗어난 날들과 시간 동안에는 얻을 수 있다. 이때는 고향과 일상의 어떤 걱정이나 업무도 우리를 따라올 수 없다.

이런 여행의 기분 속에서 우리는 집에서는 거의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몇 점의 훌륭한 그림 앞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조용하게 감사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건축물의 조화로운 울림에 매료되어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일 수 있으며, 풍경의 선을 깊이 있고 즐겁게 따라갈 수 있다. 그때 우리의 욕망, 관계, 소망, 걱정의 흐릿한 형체는 도리어 우리에게 그림이 된다. 거리와 시장의 삶, 물과 땅 위의 햇빛과 그림자의 유희, 나무 꼭대기의 형태, 동물의 울음소리와 움직임,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행동 등이 말이다. 여행하는 동안 내면에서 이것을, 즉 목적 지향적인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찾지 않는 사람은 공허하게 돌아올 것이며, 기껏해야 교양의 지루만 약간 채우고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이 순수한 관찰과 이타적 수용을 향한 미적 충동에는 더 넓고 높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이는 단순히 어두운 쾌락에 대한 갈망일 뿐일까. 단지 무시된 힘과 욕구, 숨겨진 배고픔과 숨겨진 에로티시즘, 숨겨진 분노, 숨겨진 약점에 대한 복수와 경고의 고통일 뿐일까. 그런데도 왜 만테냐의 작품을 보는 것이 아름다운 도마뱀을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는 것일까. 왜 나에게는 지오토나 루카 시뇨렐리가 그린 작품이 있는 예배당에서 보내는 1시간이, 해변에서 보내는 1시간보다 더 소중할까. 근본적으로 우리가 찾고 갈망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인간적인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산을 볼 때, 우연한 현실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확인한다. 내가 보는 능력과 선을 느끼는 능력을 즐긴다. 아름답고 낯선 풍경 속에서 나는 결코 문화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경을 통해 내 감각과 생각을 시험하며 문화를 연습하고 사랑하며 즐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감사하며 기꺼이 예술로 돌아간다. 그래서 대담한 건축물, 아름답게 그려진 벽, 훌륭한 음악, 가치 있는 그림이 결국 정복되지 않은 자연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 모호한 탐색에 대한 더 큰 만족을 준다.

나는 이 미적 충동이 추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나쁜 본능과 습관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최선의 것에 대한 확신, 인간 정신에 대한 우리의 비밀스러운 믿음의 확신이라고 생각한다. 바다에서의 편안한 해수욕, 즐거운 공놀이, 용감한 눈 속 산행이 내 육체적 자아를 확인시키고, 그 최선의 욕망과 예감을 인정하며, 그 욕구에 건강함으로 응답하듯이, 순수한 관찰에서는 인간 문화의 거대한 보물, 정신적 업적이 인류 전체에 요구하는 믿음에 응답한다. 티치아노의 그림이 내 예감을 실현하고, 내 안의 충동을 확인하고, 꿈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내가 티치아노의 그림을 즐기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 생각에 우리는 여행을 통해 낯선 것을 경험하고, 인류의 이상을 가장 깊은 곳에서 찾는 사람들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 모차르트의 음악, 토스카나의 대성당이나 그리스 신전이 우리의 존재를 깨닫고 심화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 문화의 의미, 깊은 통일성, 그리고 불멸성에 대한 갈망을 여행 중에 특별히 깊게 느낀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핮는 순간조차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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