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의 고백 - 돈과 시장을 이긴 미완의 철학
조지 소로스 지음, 이건 옮김 / 북돋움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억만장자의 고백
조지 소로스, 이건 역.
북돋움, 2014.


“그러나 오늘의 나를 만든 이 개념의 틀 자체는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고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방법으로, 예부터 철학자들이 널리 연구해온 주제입니다.”(p.17)


조지 소로스는 네 장에 걸쳐 자신의 개념 체계를 소개한다. 1, 2장에서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오류성과 재귀성을 설명하고, 3장과 4장에 걸쳐 열린 사회와 도덕성을 덧붙인다. 이 개념들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쓸모없어 보이기도 하다. 이는 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듯 하나 결국 금융시장의 챔피언에 머무는 소로스의 정체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설픈 철학도 행세 때문에 독자들은 여간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아쉽게도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투자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부록에서 보이는 그의 태도로 볼 때, 자신의 설명 자체가 시장에 끼칠 영향을 막으려는 것 같다. 소로스의 선택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의 전작, “금융의 연금술”(국일증권경제연구소, 1998)을 찾아봐야 한다.

이제 그의 개념체계를 살펴보자. 먼저 오류성은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을 의미한다. 행태경제학과 심리학의 업적을 통해 인간 인식의 불완전함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소로스는 여기에 엉성한 철학적 개념을 끼얹는데, 바로 재귀성이다. 재귀성은 인간의 오류가 객관적인 현실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로스는 인간을 두 기능으로 파악한다. 한 기능은 현실을 인식하고 다른 기능은 현실을 조작한다. 문제는 이 두 기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사실이고 더 큰 문제는 소로스가 갑자기 재귀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재귀성에 대한 그의 설명은 피카소의 그림보다 혼란스럽다. 다행히 그가 말하는 재귀적 피드백 고리는 보다 명료하다.

“사람들의 생각은 사건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사건 흐름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이 연속적이고 순환하므로 피드백(feedback) 고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 순환 과정은 관점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상황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p.29)

이 재귀적 피드백 고리를 설명하기 위해 소로스는 현실을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으로 나눈다. 외부 현실은 객관적이고 단 하나뿐이지만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상이 맺힌다. 현실의 주관적인 측면은 여러 개가 존재할 수 있다. 행동을 통해 현실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이 연결되면서 피드백 고리가 나타난다. 피드백 고리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긍정적 피드백 고리는 마음속의 상을 강화하지만 부정적 피드백 고리는 현실의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의 차이를 상쇄한다.


2장에서 피드백 고리는 ‘거품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금융 시장에 적용된다. 이 모델은 과학적 모델보다는 현실과 기대가 어긋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에 가깝다. 거품 모델을 설명하기 전에는 긍정적 피드백 고리와 금융 시장을 연결지은 말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소로스는 가치투자자와는 달리 금융 시장을 `장기적으로는 저울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투표 계산기`로 보지 않는다.

“나는 금융 시장이 펀더멘탈을 바꿔놓을 수 있으며, 그 결과 시장 가격과 펀더멘탈이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p.47)

소로스는 레버리지 효과를 들며 이를 간단히 입증한다. 이 문구는 소로스에게 있어 금융 시장이 일종의 아고라라는 점을 암시한다. 소로스의 아고라는 사회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는 지금은 반파된 효율적 시장가설 추종자를 반박하는 한편 가치투자자가 시장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실제 기업은 시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치투자자의 선택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소로스가 옳다면, 가치투자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치투자자는 금융계의 보수주의자다. 이들은 가치에 대한 신조를 고백하는 한편 현실에도 빠르게 적응했다. 벤자민 그레이엄은 투자 기업의 수를 늘렸고 워렌 버핏은 기업 자체의 성장성마저 꿰뚫어보았다. 피터 린치는 기업의 인기를 생활 속에서 먼저 확인하여 이 위험을 줄였다. 조셉 칼란드로는 “투자 천재들의 가치투자 실전 운용법”(부크홀릭, 2010)에서 소로스의 거품 모델을 수용했고 이를 통해 거시 경제의 변동에서 기회를 찾으려 한다. 물론 그의 거품 모델이 현실과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재귀성 개념을 설명하는 것도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다른 두 개념은 어떨까? 3장에서는 소로스가 스승에게 물려받은 ‘열린 사회’가 등장한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조지 소로스의 열린 사회가 같은지는 잘 모르겠다. 또한 소로스의 열린 사회에서 균형이 일반적일지도 의문이다. 소로스는 열린 사회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나 목적 자체로서나 더 바람직한 사회조직 형태”(p.90)라고 단언한다.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말할 수 있는 열린 사회는 그가 바라마지 않는 사회의 이상형으로 보인다. 아마 그는 이 이상을 바탕으로 사회의 조직을 평가하지 않을까?


소로스는 4장에서 도덕성을 언급하지만 재귀성을 설명할 때처럼 횡설수설한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도덕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소로스는 도덕성의 존재를 말하고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대리인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책임의 필요설을 설파하지만, 책임의 방향성이 어디를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물거리고 만다.


나심 탈레브의 평가가 옳았다. 소로스의 책을 접하기 전에는 칼 포퍼의 사상을 실천하는 제자로 생각했었다. 탈레브는 “행운에 속지 마라”(중앙북스, 2010)에서 소로스를 치켜 올리는 와중에 그를 깎아내린다. 옮긴이의 말에 그 비판의 요지가 들어있다.

“탈레브는 소로스가 단지 지성인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 우월한 지위를 얻으려 했던 것이라고 보았다. 여자를 유혹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통하지 않자, 마침내 빨간색 페라리를 장만한 사내와 같다고 비유했다.”(p.8)

이 문장은 소로스의 철학적 소양을 날카롭게 평가하는 말이다. 예컨대, 그의 열린 사회가 합의할 균형에 과연 진리가 있을까? 객관적 현실과 진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가 말하는 도덕성과 진리의 관계는? 철학자라면 빠져들고 마는 진선미의 유혹조차 그를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소로스는 재귀성을 설명할 때 엄밀한 정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재귀성에 대한 추상적 명제들은 어설픈 아포리즘들이 가닥가닥 엉킨 실뭉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그가 언급하는 사례를 종합하여 유추하는 것이다. 물론 사례를 수집하는 내내 두괄식으로 쓰인 요점들이 머리를 산만하게 휘젓는다.


소로스의 책은 내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오류성과 재귀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좋은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 소로스는 포퍼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재귀성에 대한 소로스의 횡설수설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질문이 나오는 이유는 재귀적 피드백 고리 때문이다. 재귀성으로 뭉쳐서 설명하는 인간의 두 기능, 피드백 고리, 인간 불확실성의 원리는 포퍼보다는 현상학이나 해석학에 가까워 보인다. 현상학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반성하는 능력과 해석하는 능력이 있다. 자기의 체험을 경험하는 능력과 타인의 체험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이는 소로스가 말하는 현실의 주관적 측면과 유사하다.

그가 잠깐 설명하고 지나가는 자기 재귀성도 흥미롭다. 그는 타자의 시선 자체도 나의 행동을 조작한다는 점을 놓친다. 먼 과거의 산물인 파놉티콘을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메이요와 뢰슬리스버거가 실시한 호손 실험도 불완전하게나마 이를 입증하니까. 이는 타인의 선택에도 흔들리는 금융시장 참가자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개념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온갖 선택의 순간에도 유용하다. 나아가 객관적 현실, 진리, 영원, 가치, 나의 선택의 연결 관계에 대한 질문들도 파생된다. 그리고 균형이 아닌 세상에서 이익을 취하는 기술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로스가 금융시장에서 사용한 차익거래 말이다. 아무래도 그의 전작을 들춰봐야겠다.


그렇다면 과연 소로스는 포퍼를 잘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소로스는 철학자의 방법을 따르는 사상가라기보다는 천재에 가깝다. 그의 사상이라고 내놓은 재귀성이 검증의 칼날이 닿지 않는 영역에 있다는 점, 스스로 고백하듯 객관적 현실을 ‘일종의 신앙’처럼 여긴다는 점을 고려한 결론이다. 사실 그가 검증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능력이었다. 그는 프랑수아 줄리앙이 “전략”(교유서가, 2015)에서 묘사한 천재적 능력을 소유했음을 보였다.

“천재적 능력은 무엇인가? 정확히 말해 천재적 능력은 선행하는 모든 모델화들, 참모본부 회의실에서 세운 모든 계획들을 무시하고 직접 마주친 상황에서 생기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즉 ‘주도’ 요인들을 재빨리 포착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천재적 능력’은 유럽적 합리성에 파국을 드러내는 것에 구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유럽적 합리성을 파열시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계획되 행동을 갑자기 내버리고 영감과 즉흥성을 도움으로서 요청하니 말이다.”
(프랑수아 줄리앙, 전략, p.27)

소로스가 사용한 기법이 널리 알려진 자본기법에 불과하다고 해서 그의 생각도 한 물 갔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그 차익거래를 해 냈기 때문에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모델의 통제를 벗어난 순간을 지배했으므로. 철학적으로도 엄밀하지 않고 검증의 영역조차 빗겨가는 소로스의 개념은 그가 바라보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체계들이 소로스로 하여금 모델의 측정치 너머의 영역을 직관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니 탈레브의 비평은 극찬에 가깝다. 전쟁터와 같은 금융시장 속에서, 소로스가 실제로 ‘빨간 페라리를 장만’해 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로 평가받길 바라는 소로스로서는 씁쓸하겠지만.

이제 그를 포퍼와 더불어 생각해 보자. 요즘은 자본주의의 도덕적 후유증이 드러나는 때라 그런지 사상적 문맥을 드러내는 자본가들이 눈에 띈다. 자본주의의 적자 중에 사상가를 등에 엎고 활동하는 사람을 하나 꼽자면 피터 틸이 있다. 그는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자본 속에 녹여내는 사람이다. 그와 소로스를 비교해보면 지라르와 포퍼 이론의 윤곽이 드러난다. 공통점은 둘 다 전체주의를 싫어하고 이론 속에서 군중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사업가에서 투자자로 변한 틸의 커리어는 지라르 이론의 다산성을 보여준다. 마치 포퍼 이론의 다산성을 소로스가 보여주었듯 말이다. 그렇기에 과거 여러 나라의 통화 체제를 황폐화시키며 보여준 소로스의 비도덕성은 포퍼의 한계일 수도 있다. 포퍼를 읽어가며 짚어봐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1장에서 사회과학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소로스의 비판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심지어 한 발 더 나가고 싶다. 도대체 이들은 왜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는가? 내로라 하는 지식인이 대부분 안전지대에서 몸을 사리는 것 같다. 이미 진흙탕과 단단히 묶인 상황인데, 그 길을 밟는 게 그토록 두려운가? 소로스와 틸을 사회에 참여하게 몰아가게 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가가 진단한 현대의 위기다. 이 사회의 임박한 파국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지식인들이 내게 보이지 않는 데서 노력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마는, 사회를 바꾸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쓰고 있다고 자평하는 소로스가 사회에 더 도움이 될까 두렵다.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가 평가하듯, 새로운 경작물을 자라게 한 농부가 철학사 상의 모든 현자보다 인류에 공헌을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실리콘벨리의 창업가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 같다. 사상가들은 자본의 논리를 좀 더 공부해야 한다. 안전지대에만 머무르거나 학교로 도피하지 말고 자본주의 안에서 싸우는 이들이 필요하다. 조지 소로스와 피터 틸처럼.

끝으로 책의 번역 혹은 편집에 대해 아쉬운 점 하나만 지적하자. 진리관에 대해 명확한 주석이 없다는 것이다. 1장의 재귀성을 설명하는 부분에 명제적 진리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나름대로의 진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에서 다루는 진리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었다면 소로스의 생각을 이해하기 좀 더 쉬웠지 않았을까.

내가 읽은 책이 2014년 개정판인데, 소로스가 스승으로 모시는 칼 포퍼(Karl Popper)를 ‘카를 포퍼’로,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을 ‘아이제이어 벌린’으로 옮긴 걸 고려하면 편집자가 정말 이 방향에서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다. 최고의 투자 전문 번역가를 모셔온 것을 보아하니 이 책을 투자 철학서로만 여긴 것 같다. 아아 현실의 주관적 측면이 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살 것인가, 함께 누릴 것인가? - 현존철학으로 제안하는 인문민주주의 대안연구공동체 작은 책 - 인문학, 삶을 말하다
조광제 지음 / 길밖의길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혼자 살 것인가, 함께 누릴 것인가?
조광제
길밖의길, 2015.


˝죽음은 은폐되어 있어야지, 함부로 세상에 나다니면 안 된다. 죽음이 예사로 눈앞에 어른거리면 생명이 날카로워져 못쓴다. 생명이 날카로워진다는 것은 그 톱니의 섬뜩함에 걸릴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오로지 나 자신만의 배타적인 섬에 감금된다는 것이다. 배타적인 생명의 톱니에 물려 버려 다른 무엇을 염두에 두지 못하게 되면, 그것으로 생명은 순전한 맹목성일 뿐, 인간됨은 소실되고 만다.˝(7)

전 세계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한국의 자살자가 많다. 그런데도 사회가 담담히 돌아가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죽음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적인 사회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을 포착해 낸다. 죽음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개인주의가 채택된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닐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모여서 국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국가가 조직되고, 국가를 위해 법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법이 한국에서는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최소한 많은 국민들은 법과 국가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인주의로 넘어간다.

이 개인주의는 시작부터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국의 개인주의가 그리는 자아상은 서구의 코기토가 아니라 게임의 플레이어로 보인다. 이 게임은 온라인 게임과는 달리 남과 온전히 협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이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법은 게임의 룰이 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게임이 시작한다. 사랑은 물론이고 정의의 존재감 역시 희미해진다. 플레이어들이 씁쓸하게 되뇌이는 ˝나만 잘 되면 돼..˝나 이 악물고 주워삼키는 ˝나라도 살아남아야 해!˝같은 말이 게임의 정신을 나타낸다. 모든 개인의 움직임은 생존을 겨냥한다. 이런 사회는 전쟁터 혹은 지옥과 같다. 헬조선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나오는 열기는 삶에 쓰여진 모든 의미를 불사른다.

그러나 전쟁터와 같은 한국 사회를 치료하는 길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에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공동체를 건설할 철학적 토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지금 여기에 뚜렷히 놓여있는 나의 몸으로부터 철학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나 자신과 세상을 엮는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규범` 보다는 나와 타인이 같이 문화, 예술을 `향유`함에 초점을 맞춘다. 개인이 말라죽지 않는 공동체를 정의하기 위한 조광제 선생의 고민이 들리는 듯 하다. 그는 이를 위해 공향유의 현존철학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할 인문민주주의를 제안한다.

˝현존철학은 다음 몇 가지 기본 주장들을 바탕으로 해서 인생의 길을 열고자 한다. 첫째, 자신의 배타적인 고유성에 집착해서는안 된다는 것. 둘째, 그런 집착은 현존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진실에 어긋난다는 것. 셋째, 오히려 자신 속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찾아내어 그 타자를 실마리로 삼아 자신이 아닌 타인들과의 이른바 공현존共現存, coexistence의 심화와 확산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넷째, 그 결과, 타인들과의 공현존을 함께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한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확립한다는 것이다.˝(19)

1장 ˝배타적 실존에서 공향유의 현존으로˝는 죽음에 대항하는 대안으로 공향유를 소개한다. 여기서 죽음을 토대로 하는 사상은 대안 문화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2장 ˝공향유의 현존철학으로 본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공향유 정신을 보이고는 3장 ˝메르스 사태에서 본,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의 발설˝에서 이에 맞지않는 대한민국의 실태를 비평한다. 그리고 4장 ˝인문민주주의의 제안˝에서 사회를 치료할 대안 문화로 인문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이상의 내용이 조그만 64페이지짜리 책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지만 나와 저자의 분명한 불일치가 있다. 나는 죽음은 은폐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1장에 동의할 수 없다. 악, 죽음, 폭력은 날것 채로 주워삼킬 주제가 아니지만 가리고 은폐해야 할 대상 역시 아니다. 죽음과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 사회가 되풀이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것들을 배제해야 할 소음으로 취급하지 말고 삶의 중후한 음률 속에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이 펼쳐지는 장소는 공향유 정신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삶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저자의 공향유와 인문 민주주의가 좋은 대안이 된다고 본다.

그렇다. 시작부터 나와 저자의 생각이 마찰을 일으킴에도 내가 이 책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4장에 있다. 저자의 대안이 현실을 견인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여타 sns에 있는 `공유`는 조광제 선생의 공향유와 공명한다. 선생의 제안은 정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킨다. 인문 민주주의 공동체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로운 개인을 향해서도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2.3. 가치는 모두가 함께 향유함으로써 더욱 심화-확산되는 데서 성립한다. 배타적인 소유를 통해 더욱 심화-확산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에서의 가치는 왜곡된 가치이다.˝(62)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독을 깨닫고 이를 고치려 하고 있다. 소비자의 힘이 강해지고, 가난한 99%의 연대가 논의되며 금융에 책임을 부여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런 와중에 거듭하는 IT 발전은 세계를 하나의 틀로 엮어내고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 역시 나와 선생의 견해가 갈리는 부분이다만, 이 어긋남이 공향유 사회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를 갈라놓지는 않는다. 이제 공향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기술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함께 누리는 문화가 나타날 가능성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인간들이 모여 정치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는 동물적인 생존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인간 고유의 역량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것이다.˝(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의 힘 - 최상의 리듬을 찾는 내 안의 새로운 변화 그림의 힘 시리즈 1
김선현 지음 / 8.0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그림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그림의 '힘'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림에 관심을 가질 핑계도 제공하구요. 마음에 드는 점을 꼽자면, 책에 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다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머 - 인터넷시대에 던지는 新문명비판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기동 옮김 / 프리뷰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머
캐스 R. 선스타인. 이기동 역
프리뷰. 2009.

법학자 캐스 R. 선스타인이 루머에 대해 쓴 얇은 책이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책 자체의 분량은 짧은 것을 보니 편집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용의 탁월함으로도 충분하다. 이 책의 매력적인 부분은 루머의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과정인데 문자만 나열된다는 단점이 있다. 도표를 그려 가며 읽기를 권한다.

무리 속의 인간에게는 정보와 동조의 폭포수 현상과 중심 극단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루머를 확산시켜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온 `사상의 자유시장`을 무력화한다. 즉 사상의 자유시장은 기존의 생각만큼 자유로운 시장이 아닌 셈이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한다고 자부하지만 본성상 거짓에 끌리는 경향을 지니며, 사상의 시장에는 독과점 사상들이 즐비하다.

저자가 주의를 기하며 증명하는 인간상은 `이성적으로는 부정하지만 겉으로는 찬성을 표하는 사람`이다. 이는 지식인이 사회의 압력에 굴복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인상깊다. 과연 사회적 압력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내가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 살지 않아서 다행일 뿐이다.

루머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주제이다. 저자는 최신의 실험 결과(행동경제학의 편향)를 소개하는 데 멈추지 않고 법학자의 눈으로 새로운 지평을 바라본다. 루머가 어떻게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를 최대한 저지할 수 있는지(위축효과)를 이토록 짧은 글에 종합해내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다시 초점을 개인에게 맞춰보자. 인간의 편향이 진리가 아닌 거짓을 따른다면 개인은 어떻게 해야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아마 해답은 간략한 문제해결 프로세스보다는 수많은 질문과 성찰의 연쇄에 가까울 것이다. 인식론적 파산이라는 아쉬움이 찾아오지만 인간의 한계는 어쩔수 없다고 본다.

사상의 자유시장이 비록 독과점 시장일지라도 개인의 입장에서 이는 매우 강력한 이념이다. 단 하나의 이론으로 개인 혹은 사회를 환원해낼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며 사상들 간의 치열한 접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이는 매우 기초적인 원칙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라 확신한다. 혹시 삶의 궤적은 원칙과 모순 사이에서 얼마나 균형을 잘 잡느냐에 따라 그 미적 수준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문


테오도르 W. 제닝스 교수는 시카고 신학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책의 소개에 의하면 성서신학 및 구성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비전공자로서 그의 전문분야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는 이 책에서 퀴어 신학을 전개하려 한다. 퀴어 신학은 1990년대부터 전개되었다. 2000년에 달하는 기독교 전통 안에는 퀴어에 친향적인 해석이 들어있지 않다. 즉 퀴어 신학은 매우 새로운 전통인 셈이다.

1997년에 나온 리처드 헤이스의 `신약의 윤리적 비전`에는 `진지한 신약학자들은 퀴어 신학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짧게 언급되어 있는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급진전된 동성애자의 인권을 (그리고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듯한 퀴어 신학을) 고려할 때, 기존 기독교 전통 측은 성서에서 퀴어 신학을 해석해 내려는 시도에 응답하는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차정식 교수는 `바울신학 탐구`에서 바울과 테클라를 엮어 동성애를 건드리는 데 그치는 반면 테오도르 제닝스 교수는 예수 전승을 곧바로 건드린다. 역시 해방신학을 전공으로 하기 때문에 이토록 전투적인 걸까?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가 죄(의 결과)임을 명시하지 않았나(참조할 만한 글 http://mimoonchurch.com/?p=1579)? 그래서 바울을 우회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예수에 대한 해석에 도달한 것일까? 호쾌하면서도 아슬아슬하다.

제닝스 교수는 서문에서 그가 착수할 작업의 목표를 제시한다. 예수의 성애적 집착을 예수 전통에서 공정하게 추론해 낸다는 것이다. 왠지 `전문가용, 매우 어려움`을 돌려서 말한 것 같다. 비전문가에다 심지어 해당 전공의 진입장벽을 뚫고 들어갈 만한 제반지식이 없는 나로써는 이 책을 읽고 비평할 엄두가 안 난다만 내가 속한 보수적 기독교의 지평 밖을 살펴볼 좋은 기회라고 본다.

무엇보다 새로운 전통(과 공동체)이 생겨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어서 즐겁다. 동양의학과 한의학의 현대의학에 대한 분투에 눈길이 가는 것 처럼 이 새로운 신학에 주목하게 된다.




"이 책에는 예수 전승들에서 공정하게 추론할 수 있는 동-성애적 관계들 쪽으로 예수의 성애적인 집착과 태도에 대해 무언가를 시사하고 있는 복음서 텍스트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끈질기게 탐색하기 위한 시도가 담겨 있다. 젠더와 오늘날 `결혼 및 가족 가치`라 불리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남자의 애인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과 그러한 관계를 향한 예수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증거는 현대의 이성애주의heterosexism 및 동성애혐오homophobia와 양립할 수 없다. 나는 이 연구가 교회와 사회에서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그리고 양성애자의 긍정을 위하여 중요하면서도 영속적인 변화를 낳기 위한 계속되는 시도에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