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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 것인가, 함께 누릴 것인가? - 현존철학으로 제안하는 인문민주주의 ㅣ 대안연구공동체 작은 책 - 인문학, 삶을 말하다
조광제 지음 / 길밖의길 / 2015년 9월
평점 :
혼자 살 것인가, 함께 누릴 것인가?
조광제
길밖의길, 2015.
˝죽음은 은폐되어 있어야지, 함부로 세상에 나다니면 안 된다. 죽음이 예사로 눈앞에 어른거리면 생명이 날카로워져 못쓴다. 생명이 날카로워진다는 것은 그 톱니의 섬뜩함에 걸릴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오로지 나 자신만의 배타적인 섬에 감금된다는 것이다. 배타적인 생명의 톱니에 물려 버려 다른 무엇을 염두에 두지 못하게 되면, 그것으로 생명은 순전한 맹목성일 뿐, 인간됨은 소실되고 만다.˝(7)
전 세계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한국의 자살자가 많다. 그런데도 사회가 담담히 돌아가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죽음을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적인 사회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을 포착해 낸다. 죽음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개인주의가 채택된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닐까? 플라톤은 `국가`에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모여서 국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생존을 위해 국가가 조직되고, 국가를 위해 법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법이 한국에서는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최소한 많은 국민들은 법과 국가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개인주의로 넘어간다.
이 개인주의는 시작부터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국의 개인주의가 그리는 자아상은 서구의 코기토가 아니라 게임의 플레이어로 보인다. 이 게임은 온라인 게임과는 달리 남과 온전히 협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이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법은 게임의 룰이 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게임이 시작한다. 사랑은 물론이고 정의의 존재감 역시 희미해진다. 플레이어들이 씁쓸하게 되뇌이는 ˝나만 잘 되면 돼..˝나 이 악물고 주워삼키는 ˝나라도 살아남아야 해!˝같은 말이 게임의 정신을 나타낸다. 모든 개인의 움직임은 생존을 겨냥한다. 이런 사회는 전쟁터 혹은 지옥과 같다. 헬조선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나오는 열기는 삶에 쓰여진 모든 의미를 불사른다.
그러나 전쟁터와 같은 한국 사회를 치료하는 길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에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공동체를 건설할 철학적 토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지금 여기에 뚜렷히 놓여있는 나의 몸으로부터 철학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나 자신과 세상을 엮는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규범` 보다는 나와 타인이 같이 문화, 예술을 `향유`함에 초점을 맞춘다. 개인이 말라죽지 않는 공동체를 정의하기 위한 조광제 선생의 고민이 들리는 듯 하다. 그는 이를 위해 공향유의 현존철학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할 인문민주주의를 제안한다.
˝현존철학은 다음 몇 가지 기본 주장들을 바탕으로 해서 인생의 길을 열고자 한다. 첫째, 자신의 배타적인 고유성에 집착해서는안 된다는 것. 둘째, 그런 집착은 현존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진실에 어긋난다는 것. 셋째, 오히려 자신 속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찾아내어 그 타자를 실마리로 삼아 자신이 아닌 타인들과의 이른바 공현존共現存, coexistence의 심화와 확산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넷째, 그 결과, 타인들과의 공현존을 함께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한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확립한다는 것이다.˝(19)
1장 ˝배타적 실존에서 공향유의 현존으로˝는 죽음에 대항하는 대안으로 공향유를 소개한다. 여기서 죽음을 토대로 하는 사상은 대안 문화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2장 ˝공향유의 현존철학으로 본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 헌법에 담긴 공향유 정신을 보이고는 3장 ˝메르스 사태에서 본,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의 발설˝에서 이에 맞지않는 대한민국의 실태를 비평한다. 그리고 4장 ˝인문민주주의의 제안˝에서 사회를 치료할 대안 문화로 인문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이상의 내용이 조그만 64페이지짜리 책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지만 나와 저자의 분명한 불일치가 있다. 나는 죽음은 은폐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1장에 동의할 수 없다. 악, 죽음, 폭력은 날것 채로 주워삼킬 주제가 아니지만 가리고 은폐해야 할 대상 역시 아니다. 죽음과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 사회가 되풀이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것들을 배제해야 할 소음으로 취급하지 말고 삶의 중후한 음률 속에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이 펼쳐지는 장소는 공향유 정신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삶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저자의 공향유와 인문 민주주의가 좋은 대안이 된다고 본다.
그렇다. 시작부터 나와 저자의 생각이 마찰을 일으킴에도 내가 이 책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4장에 있다. 저자의 대안이 현실을 견인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여타 sns에 있는 `공유`는 조광제 선생의 공향유와 공명한다. 선생의 제안은 정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킨다. 인문 민주주의 공동체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 자유로운 개인을 향해서도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2.3. 가치는 모두가 함께 향유함으로써 더욱 심화-확산되는 데서 성립한다. 배타적인 소유를 통해 더욱 심화-확산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에서의 가치는 왜곡된 가치이다.˝(62)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독을 깨닫고 이를 고치려 하고 있다. 소비자의 힘이 강해지고, 가난한 99%의 연대가 논의되며 금융에 책임을 부여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런 와중에 거듭하는 IT 발전은 세계를 하나의 틀로 엮어내고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 역시 나와 선생의 견해가 갈리는 부분이다만, 이 어긋남이 공향유 사회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를 갈라놓지는 않는다. 이제 공향유의 문화가 이루어질 기술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함께 누리는 문화가 나타날 가능성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인간들이 모여 정치사회를 형성하는 이유는 동물적인 생존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인간 고유의 역량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것이다.˝(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