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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과'는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문학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은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삶이란 바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훌륭한 문학이라면, 치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하여 모든 훌륭한 문학은, 상처에 대한 아프고도 깊은 응시를 생명처럼 지니고 있다. 상처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그 근원을 찾아나서는 작업 없이, 치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자로 하여금 상처에 대한 깊은 사유의 계기 하나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파과'는 이미 어느 정도의 문학적 성과를 지닌 셈이다. '파과'가 이야기하는 상처는 관계의 상처, 그리고 소멸의 상처이다. 타자의 내면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근원적 차원의 소통 불가능성과 타자의 소유는 나의 소유를 제약한다는 현실적 차원의 공유 불가능성으로 인해, 인간의 삶은 끝없는 오해와 갈등, 즉 관계의 상처로 점철된다. 또한 인간의 삶은 끝없는 상실과 소멸의 삶이다. 손에 쥐었던 재화를 잃고 옆에 섰던 사람을 잃고 싱싱하던 육체를 잃고 영민했던 지력을 잃고 뜨겁거나 아렸던 감정을 잃고 마침내는 생명을 잃는다. 관계의 상처와 소멸의 상처는 인간 존재의 숙명적 비극인 것이다.
'파과'는 가장 쓰린 상처의 한가운데로 내몰린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주인공 조각은 결손가정에서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오해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까지 내몰린 끝에 결국은 무감각하게 사람의 목숨을 빼았는 킬러가 된다. 단 한 번의 따뜻한 추억조차 없이 오로지 상처뿐인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노년이 온다. 육체는 둔해지고 의식은 꺼져간다. 자신이 손에 쥔 모든 것을 상실하고 이제 자신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러한 상처를 견뎌내고 마침내 이겨내는 과정이다. 우선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그녀의 내면에 존재하는 모순이다. 그녀는 고립을 안락으로 여기고 모든 관계를 철저히 거부한다. 첫 남자에 대한 사랑마저도 가당치 않다고 여기고 자신의 아이마저도 외국으로 입양시킨다. 그것은 그녀가 다시는 관계로부터 상처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의식일 뿐이다. 그녀의 무의식에는 관계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있다. 관계에 대한 그녀의 완강한 거부는 사실 상처받지 않겠다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상처주지 않겠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 첫 남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유부남이었던 그의 아내가 받게 될 상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으며 아이를 입양시킨 것은 킬러의 아이가 겪게 될 위험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녀의 관계 거부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타적인 것이다.
노화와 소멸에 대한 그녀의 대응 역시 동일한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소멸과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있으며 늘 죽음을 준비해둔다. 더 나아가 사실 그녀는 미필적 고의의 형식으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킬러라는 고위험 작업을 예순이 넘은 나이까지 지속하는 것은 사실 죽음의 확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기 떄문이다. 상처만 주는 삶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타성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의식일 뿐이다. 그녀의 무의식에는 삶에 대한 애착이 있다. '방역작업(청부살인)' 외에 그녀가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행위는 외출할 때 늘 창문을 열어두고 가는 행위이다. 돌연한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키우던 개가 집 안에서 굶어죽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그 버려진 늙은 개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개를 살려주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식적 애착인 것이다. 그녀는 사랑할 수 없는 삶을 그래도 사랑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스스로의 이런 무의식을 자각하지 못한다.
관계의 거부와 소멸의 수용은 그녀가 상처로 가득찬 삶을 견뎌내는 방식이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그녀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므로, 고독하든 죽어가든 그냥 내버려두어도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고독과 소멸의 수용은 역설적으로 상처를 견뎌내는 방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그래도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무의식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데서 비로소 상처의 치유는 시작된다. 그러한 자각과 수용의 계기는 바로 사랑이다. 그녀는 원래의 자신처럼 선하고 순해서 속수무책으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그의 딸을 목숨을 걸고 구해줌으로써 마침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상처를 견뎌내는 방식이 역설적이었듯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 역시 역설적이다.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것일까. '파과'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는 하고 싶은 것과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그와 그의 가족을 멀리서나마 지켜보고 싶고 그와 그의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건다. 속절없이 소멸해가는, 무의미한 자신의 하찮은 목숨을 버려 소중한 것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무의미했던 자신과 자신의 삶은 소중한 것으로 변신하게 된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하기에 자신은 더 이상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며 마침내 그것을 지켜내었기에 자신은 더 이상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계속 바라보고 또 지켜야 하기에 앞으로의 자신의 삶 역시 더 이상 무가치한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랑을 통해 그녀는 소중한 것을 가지게 되었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삶 역시 소중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무엇이든 소중한 것이 되려면, 소중한 것이 있어야 한다. 소중한 것이 있어야 소중한 삶이 되고 소중한 것이 있어야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와 그의 삶은 소중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은 그리고 삶의 구원은 결국은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또다시 우리는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계의 상처는, 상처를 되돌려 주는 방식(투우)이나 관계를 거부하는 방식(조각)으로는 치유될 수 없다. 상처를 상처로 되돌려주는 방식은 상처의 무한증식을 낳을 뿐이다. 그리고 관계를 거부하는 방식은 소멸에 이를 뿐이다. 사람은 장애나 노화로 인한 육체적 소멸로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관계의 단절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다. 내가 기억할 사람도 나를 기억할 사람도 없는 상태야말로 완벽한 존재의 무화이기 때문이다. 조각의 삶은 상처받는 삶에서 상처받지 않으려는 삶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상처주지 않으려는 삶으로 변모했고 사랑을 만나서는 마침내 소중한 것을 상처로부터 지키려는 삶으로까지 나아갔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관계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식이자, 동시에 소멸에 맞서는 유일한 방식이다.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 조각의 삶은 이제 물리적 소멸로도 죽지 않는 불멸의 것으로 변모했다. 그녀가 그 싸움에서 죽었다 해도 또는 앞으로 늙어서 죽는다 해도, 그녀는 자신이 지켜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인간이 물리적 소멸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불멸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파과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과실의 부패를 뜻하기도 하고 여자의 성숙을 의미하는 16세 또는, 여자의 노화를 의미하는 64세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자의 고통스런 첫경험의 출혈을 뜻하기도 한다. 조각이 부스러지고 말라버린 손톱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넣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제목을 붙인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을 통해 그녀는 상처받고 죽어가는 삶, 속절없이 썩어가는 소멸의 삶을 아름다운 생명의 삶으로 바꾸어낸다. 사랑을 통해 64세의 그녀는 다시 16세의 소녀가 된 것이다. 사랑을 통해, 썩어가던 과일은 생명의 향기를 되찾은 것이다. 무늬는 지워지겠지만 다시 칠하면 된다. 이는 그녀가 사랑을 통해 불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직 사랑만이 죽음을 생명으로 그리고 불멸로 바꾸는 연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 동인은 바로, 역설적이게도 상처로 가득찬 그녀의 삶이다.  그녀가 사람들을 상처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것은 그녀 자신이 받은 상처가 너무도 아팠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상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자라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상처로 성숙하고 사랑으로 불멸하는 존재인 것이다. 과연 당신은 상처로 죽는 존재가 될 것인가 상처로 다시 태어나 불멸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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