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 ㅣ 민음의 시 207
김명인 지음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누군가를 품어 범벅에 꽃은 저(箸)라’
아마도 나는 이 시집을 손에 들고 밤을 샐 모양이다.
봄밤이다.
시인의 ‘기차는'
‘열애의 한 때를 떠올리며’
‘작은 역사’ '꽃그늘에 주저앉아‘
‘비애의 원근들'’에 젖고 있겠다.
‘발치에 닿은 이별이라고 서둘러야 할 까닭은 없지만'
‘저문다는 것’
‘엉엉 울일 아니라는 듯 입술 걸어 잠그고’ 는 있지만
‘눈자위엔 속울음 그렁그렁 번져’ 가겠다.
오늘은 극빈,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철 늦은 바다도 그렇다, 가난에
저리도록 멍들었으니
기근도 무성하면 의혹이 되는
천 길 수심 앞이다
어른거리는 수평선도 텅텅 비우고
채울 줄 모른다, 알을 비운 성게처럼
서로에게 들이밀 것 살청(殺靑)밖에 없는 창상이여!
창칼이 부딪혀 공명하는 쇳소리
참, 멀리까지 굽이친다
-「살청밖에 없는」
시인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천길 수심’의 ‘바다’가 불러일으킨 시상을 두 겹 세 겹으로 휘감아서 풀어 놓는다.
먼저 ‘천 길 수심’의 ‘수심’은 마음의 수심(愁心)으로도, 바다의 수심(水深)으로도 읽힌다.
또 '살청(殺靑)'은 다의적 의미를 활용하여 이미지를 중첩시켜 놓는다.
“덜 익은 보리를 찧어서 만든 죽”이라는 의미에 착안한 ‘극빈’, '기근‘, ’비우다‘ 등 가난 이미지.
“대나무를 불에 쬐어 대나무의 푸른빛을 없애는 일.”이라는 의미에 착안한 ’하늘‘ 과 ’바다‘, '수심', 수평선’ 등의 ’푸른 색‘ 이미지와 대나무에서 연상되는 ’창상‘과 ’창칼‘의 상처 이미지.
세 겹, 네 겹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들은 "기록”이라는 뜻의 살청(殺靑)의 의미에도 닿아 있다.
‘서로에게 들이밀 것' ’창상‘ 밖에 없어서 ‘멍’이 들어 저린 가슴의 수심(愁心),
‘어른거리는 것’들, 꽉 찬 속엣것들 모두 비워내는 일이라서 푸른 마음의 살청(殺靑)!
‘살청(殺靑) 밖에 없어서’ 또 ‘창상’을 입는,
삶의 비의에 대한 기록-살청(殺靑)-이
이 시집 곳곳에 담겨 있다.
그가 묻는다,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언제쯤 박음질된 안면일까, 희미하던 눈코입이
실밥처럼 매만져진다
무심코 넘겨 버린 무수한 현재들, 그 갈피에
그가 접혀 있다 해도
생생한 건 엎질러 놓은 숙맥(菽麥)이다
중심에서 기슭으로 번져 가는 어느 주름에
저 사람은 나를 접었을까?
떠오르지 않아서 밋밋한 얼굴로
곰곰이 각별해지는 한 사람이 앞에 서 있다
-「각별한 사람」
'기억‘을 잃어버리고 '숙맥'이 되어 '밋밋한 얼굴'로 앉아있는 '저 사람'에게 "저를 기억하시겠어요?"라고 물으며 서 있는 한 사람.
'콱콱’ 가슴 ‘결리는’ '나(그)'도, '늬 누고?’ 묻듯 '그(나)‘의 ’눈코잎‘을 더듬어 보는 '저 사람'도 서로에게 '각별'하다 못해 사무치는 사람!
‘박음질’과 ‘주름’으로 비유되는 기억과 망각, '그-저사람-나'의 관계 설정 앞에서
나는 그만 헉, 무릎이 꺾이고 만다.
‘나’가 ‘그’로 접혀져 버린 ‘나’의 ‘각별한 사람’ 앞에서 ‘나’의 ‘각별한 사람’이 낯선 ‘저 사람‘이 되어 있는 삶의 비의를
함몰되기 쉬운 감정 확 걷어내고 단 열 줄 안에 빚어놓은 섬뜩한 절창이다.
시의 물결,
시의 파문
'참, 멀리까지 굽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