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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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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지구가 작아진다는 것이 아니라 정보통신이나 교통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이동이나 소통이 점점 쉬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세상은 조금씩 획일화 되어간다. 세상 사람은 대부분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의사의 말이 반드시 건강을 찾아줄거라 믿고 따른다. 미국에 사는 사람이나 한국에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시간이라는 인위적인 수치에 삶을 맞추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시간을 지키며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살게 되었다.

새뮤얼 버틀러는 1872에레혼에서의 무용담을 발표했다. ‘에레혼nowhere를 거꾸로 뒤집어 만든 이름이다. ‘에레혼은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라이다. ‘에레혼에서는 질병을 죄악이자 부도덕으로 여긴다. 몸에 질병이 생기면 죄인이 되어 재판을 받고 처벌당하게 된다. 반면 부도덕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마치 우리 세상에서 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듯 한다. 이웃 사람들은 부도덕에 대해 위로의 말을 전하고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하길 기원한다. 부도덕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교정관(에레혼에서 교정관은 마치 우리 세상의 의사들처럼 강력한 사회적 권위를 갖는다.)이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매우 불합리한 처방을 내 놓아도 한번 의심하는 법 없이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우리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당연히 축복받아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레혼에서는 영혼 불멸한 존재였던 태어나지 않은 자가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난다. ‘태어나지 않은 자는 태어남으로써 유한한 삶을 살아가게 되고 결국 죽게 되어 소멸한다. 즉 태어남은 소멸로 가는 시작, 즉 저주인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자는 태어나기로 결심하고 결혼한 사람 곁을 맴돌며 끊임없이 고문한다. 그들은 결혼한 부부가 보호해준다고 동의했을 때 고문을 멈추고 잉태된다. 그래서 에레혼에서는 부모와 자식관계는 원수와도 같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출생증서를 만드는데, 아직 이성이 없는 아이를 억지로 꼬집어 울음으로 그 동의를 대신하는 이 출생증서는 아이가 나라의 법에 따라 책임을 지며 아이의 잘못은 부모에게 책임이 없으며 그를 죽일 권리가 부모에게 있다는 내용이다.

가 에레혼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갈등은 가지고간 시계에서 비롯되었다. 에레혼에는 기계가 없다. ‘가 에레혼에 도착하기 500년 전 에레혼에서는 기계를 모두 파괴했다. 에레혼에서 기계를 파괴하는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기계의 책이라는 책 때문인데 요약하자면 기계가 계속 발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계에게 자의식이 생길 것이고, 기계가 스스로 생식하게 될 때 인간은 오히려 기계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책이다. 그래서 기계를 소지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고, 기계는 오직 박물관에서만 망가진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에레혼에서의 여정을 통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없다면 사회가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한 많은 당연한 것들이 정 반대로 되어 있는 에레혼은 나쁘지 않게 유지되고 있다. 모든 기계를 없애도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세상 밖으로 나가 교역하지 않고 숨겨져 있어도 나라를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에레혼 사람들도 우리가 볼 때 불필요해 보이는 체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음악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에레혼에는 음악은행이라는 체제가 있고 관련 규범이 있는데 는 그때도 지금도 이 체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에레혼에는 두 가지 통화가 사용되는데, 그 중 음악은행의 통화는 상업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렇지만 음악은행에 계좌를 계설하고 저금을 하면 사회적으로 칭송받는다. 마치 우리세계에서 교회에 헌금을 내듯 에레혼 사람들은 음악은행에 예금을 한다.

처음 는 돈을 모으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에 용기를 냈을 때 믿지 못할 경험과 아내를 얻을 수 있었다. 에레혼은 우리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볼 기회다. 도덕과 종교와 사회를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들을 의심하고 잘못된 도덕, 종교, 사회에 대해 반박하고 하다못해 열기구를 타고 탈출하기라도 한다면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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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함의 숭배 -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사회를 실패로 이끄는가
크리스토퍼 헤이즈 지음, 한진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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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정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를 운용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당연히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신 결정해줄 적임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적임자들만 찾으면 사회가 매끄럽게 굴러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39) 우리는 엘리트에 대해 다소 이중적인 태도를 갖는데 하나는 엘리트는 부패하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태도는 엘리트를 동경하며, 가능하다면 엘리트가 되어 그 특권을 향유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헤이즈는 똑똑함의 숭배(Christoper Hayes, Twilight of the Elite, 크리스토퍼 헤이즈 지음, 한진영 옮김, 갈라파고스, 2017)에서 엘리트주의의 실패를 고발하고, 엘리트주의 저변에 있는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자동차에서 수상한 잡음이 들리면 우리는 정비로소 간다. 그 이유는 정비사가 차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낼 지식이 있고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 정도로 정직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차에 관한 한 정비사는 권위자다. 대중의 삶에서 주요 기관과 그 기관을 운영하는 엘리트는 정비사 역할을 한다. 그들이 맡은 임무는 국정을 운영하고, 시장이나 사회에 생기는 문제점을 진단해 해결하는 것이다. 정비사건 자금관리사건 상원의원이건 우리가 권위자에게 바라는 것은 능력이 있을 것 똑똑하고, 지식이 풍부하고, 수완이 있을 것 과 권위를 이용해 다른 속샘을 관철시키거나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34) 하지만 우리는 권위자들의 능력도 윤리의식도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게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나라를 망쳤는데도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인종, , 성적 취향에 따른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겠다는 약속이지만, 그 대신 인간은 능력과 진취성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인식하에 새로운 계급을 인정하는 신념이다. 능력주의를 적극 변호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정당화하는데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그것은 도덕적 근거와 실용적 근거이다. 능력주의의 도덕적 정당성은 간단한다. 그것은 능력주의가 모든 사람을 그의 가치에 맞게 대접한다는 것, 즉 재능이 있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보상을 받고, 무지하고 나태한 사람은 그 대가를 받게 한다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차별의 근거는 피부색, 종교, 성 같은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특징이 아니라, 지적 능력이나 자기 단련 같은 본질적인 특징이다. 즉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피부색이 아니라 내면의 요소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다.(88)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두 번째 근거는 능력주의가 꼭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효율적이기는 하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볼 때 이 주장은 반박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것이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의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해도 이론상의 주장일 뿐 현장에서 적용되는 능력주의는 이론과 전혀 다르다. 부자 집안의 머리 나쁜 자제들이 시험 성적이 낮은 아이들과 함께 하층계급에 내던져진 것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억울함과 박탈감에서 온 분노를 못 이겨 결국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실패한 것은 능력주의가 잘 작동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91)

능력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 사회는 두 가지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첫 번째는 차이의 원칙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은 천차만별이므로 이러한 선천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가장 열정적이고 가장 능력 있는 이들에게 가장 힘들고 중요하며 보상도 많은 일을 배정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이동의 원칙이다. 이는 실적을 올리면 보상을 받고 실패를 하면 응당한 대가를 받는 모종의 경쟁과정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동의 원칙이 무시되면 능력주의는 곧 소수의 독재가 된다.(97) 능력주의의 치열한 경쟁의 압박 속에서도 부정행위를 막는 요소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사회적 또는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처벌을 감수해야 할 처벌의 두려움이다.(147)

능력주의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첫째 능력주의 철칙으로 엘리트가 된 사람은 도전받을 거라는 불안감에 자신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치워버리게 되고, 엘리트의 자격은 점점 능력이 아니라, 다른 요인 , 집안, 권력 같이 능력과는 관계없는 것 으로 결정된다. 이 같이 능력주의 시스템이 초래한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다 결국 사회 이동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즉 차이의 원칙에 의해 이동의 원칙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완벽하다. 가장 자격 있는 사람들, 가장 실력 있는 사람들이 가장 책임이 무겁고 중요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원칙에 어떻게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능력주의의 장점을 과대평가하고 그 대가는 과소평가한다. 능력주의가 허약한 이유는 이 원칙이 안고 있는 모순 때문이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능력주의 신봉자들이 장점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불평등이 오히려 그 체제를 와해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능력주의의 철칙이다.(333)

둘째 능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합의 불가능 이다. 사회의 엘리트가 되어 엘리트로서의 일을 잘 시행하는 것에는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 이 능력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는 똑똑함이 곧 능력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의 엘리트들을 사로잡고 있는 수많은 집착 중에서 똑똑함에 대한 집착만큼 두드러지는 것도 없다. 능력주의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가치는 지능이다. 엘리트에 속한 사람들에게 명석하다는 말은 최고의 찬사다. 높은 지능은 권력층에게 빠져서는 안 될 필수적인 덕목이지만, 능력주의 사회의 특징은 똑똑함의 칭송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단계, 즉 똑똑함을 숭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명석함은 순위를 매길 수 있고, 그래서 부에 순위를 매기듯 지능에도 순위를 매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회에서 지능은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된다.(253) 능력 있는 엘리트가 되려면 똑똑함은 필수 덕목이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혜와 판단력, 공감능력, 윤리적인 엄격함도 똑같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특성들은 거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런 다양한 덕목이 없이 두뇌만 비상한 사람은 굉장히 위험하다. 하지만 공감능력은 명석함보다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반면 명석함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매료시키며,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겁먹게 한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모이면 갈등과 언쟁이 일어나지만, 결국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강하게 밀어붙인 방향으로 결정나는 경우가 많다.(259)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낮고, 그래서 타인의 감정과 욕구를 추론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않는다. 혹은 권력이 강해지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러한 능력이 쇠퇴한다. 이 말은 우리 사회의 주요 기관과 조직의 고위직 엘리트들은 타인의 관점에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을 고위직이 내리는 결정에 반영시키고 싶어도 그런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할 체제가 자리 잡아야 한다.(291)

능력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결과의 평등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 기회도 불평등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매우 평등한 조건에서 시작해야 진정한 능력주의가 꽃핀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역설이다. 그러므로 능력주의를 원한다면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결과의 실질적 평등을 중요시 하는 사회, 사회복지와 사회적 연대 의식을 고취하는 사회, 평등한 기회와 노력을 통한 계층 이동이 활발한 사회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333)

결과의 완전한 평등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민주주의 사회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우리 할 일이 끝났다고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다.(335)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과제는 모두가 느끼는 좌절감과 분노, 소외감을 모아 이념을 초월한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면 정치적 상상력을 더 적극적으로 발휘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질서를 구상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더 평등한 조직을 만들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러려면 현 체제에 맞서 싸울 뿐 아니라 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연합, 기관, 그리고 지지층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는 물러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다. 가장 토대가 되는 기관들과 정면으로 맞서 직접 개혁해야 한다. 이빨과 발톱과 칼을 무기 삼아 터무니없는 이득을 얻는 세력에 맞서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시민들의 유기적인 풀뿌리식 협동은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안된다.(359)

평등사회는 절대 최종적인 단계가 아니며, 민주주의는 절대 안정적인 균형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과정일 뿐, 변화는 다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변화를 가져올 주체가 바로 우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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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숀 쉬한 지음, 조준상 옮김 / 필맥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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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전과 복지를 보장받는 대가로 정부의 지배를 받아들인다.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형태의 정부라는 존재를 정당화한다. 우리는 기꺼이 정부와 더불어 살아나가고자 한다.(105) 이런 일반적인 생각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아나키스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나키스트에 대한 인식은 왜곡되어 있다. ‘구레나룻을 기른, 미친 살인자라는 아나키스트의 이미지가 뿌리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론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그리고 테러리스트의 폭행을 하나로 연결해 보도했고, 많은 대중 소설과 영화는 비합리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이라는 아나키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27)

하지만 지금 우리시대에 온갖 권위와 위계가 평등을 제한 할 수록 아니키즘에 대한 탐구는 의미 있을 것이다. 스타벅스와 빅맥을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는 세계는 기대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고 최고 수준의 축구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세계를 기대할 수는 없다. 평등주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만큼이나 지구촌에서 엄격히 통제된다.(228)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아니키즘이 요구된다.

아나키즘적 사고에 깔린 근본적인 신념은 무엇일까? 아나키즘은 혁명적이고, 위계적 권위를 거부한다. 아나키즘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질서를 열망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아나키즘은 강요되거나 집중화하거나 위계적인 권위에 대해서는 그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비판과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런 형태의 권위가 구현된 제도와 조직, 사상과 예술은 사람들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능력을 통제하거나 억압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이전과 같은 비현실적인 상상의 시대를 불러오자는 게 아니라, 일상의 삶에 책임을 지는 가운데 복잡한 현대 사회에 맞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가는 과제를 짊어지는 것이다.(30) 즉 아나키즘적 사고의 핵심에는 사람들이 각자 스스로의 자유, 존엄성, 창조성에 근거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하며, 자신의 운명을 가능한 한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경제체제 속에서 살면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34)

아나키라는 말은 고대그리스어 아나르코스에서 유래했다. ‘지도자가 없음또는 정부가 없음을 뜻하는 이 단어의 어원은 아나키즘의 특징을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대부분이 경험해 온 유일한 정부 형태, 다시 말해 단일 국가의 중앙집중화한 권위의 필요성에 대한 거부다.(45) 아나키즘이 국가권력의 결과들에 반대하는 데는 하나의 근본적인 자유지상적 원칙, 곧 권위와 복종에 관한 수많은 관념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자유지상적 원칙이 바탕에 깔려 있다.(55)

아나키즘이 정부 형태로서의 국가를 거부하는 데는 구체적인 이유들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격언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50) 권력이 집중되고 무책임하다면 어떤 체제의 정부가 들어서든 반드시 결함을 갖는다는 전제에서 아니키즘은 출발한다. 독재가 강요되는 경우에는 굳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런 아나키즘적 전제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키스트들은 민주적인 사회에 대해서도 이러한 전제를 견지한다.(51)

이런 아나키즘에는 역설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전통적 아나키즘의 파괴적 측면은 혁명적 행동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역시 전통적인 사고와 결부된 것이다. 그런 파괴적인 접근방식은 이제 거꾸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확대하고 강화하려는 오늘날 지구적 자본주의의 특징이 됐다.(234) 그리고 1923년 말라테스타가 죽기 하루전에 마지막으로 공책에 써넣은 구절을 보면, “폭탄을 던져 한 행인을 숨지게 한 그가 선언한다. 자신은 사회의 한 희생자로서 사회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그러나 그 가엾은 희생자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어도 항변할 수 없다. ‘그럼 내가 사회인가?’(161) 마지막으로 아나키즘적인 것으로 통하는 것들을,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방식으로 실천한 사람들은 5년 정도 지난 뒤에는 오히려 자신이 전복하겠다고 했던 조직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214)

아나키스트들은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보다 좀 더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보며, 그런 경우의 권위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 양육이나 의약 분야, 그리고 과학의 특정 분야에서는 아나키스트들도 권위를 행사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56) 아니키즘이 거부하는 것은 삶을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경제적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게임으로 보는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이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소외의 원인은 사람들의 수요 충족에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에 있다는 확신을 마르크스와 공유한다. (230)

아니키스트들은 삶을 조직하는 더 나은 방식을 지향하는 열정을 갖고 있고,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상상력을 버리고 현실과 저열한 타협을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확신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234) 아나키스트들은 너무나 견고해 보이는 현실을 찢어내고, 바로 지금 여기서 대안을 실행하고자 한다.(234) 아나키즘은 신념과 원칙들의 조합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이다. 자유롭게 스스로 창출되는 비위계적이고 탈중앙화한 조직, 연대, 행동양식들이 바로 아나키즘이며, 이런 것들이 바로 아나키즘을 혁명적으로 만든다.(237) 아나키즘이란 미래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 사건들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들을 창조하는 살아있는 힘 · · · 인간의 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모든 형태의 반란정신이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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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 여름언덕 공동선 총서 1
제임스 C. 스콧 지음, 김훈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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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사거리 도로에서 그나마 사고를 막아주는 것은 신호등이다. 신호등은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교통을 통제해 위험을 막고, 통행을 원활하게 한다. 이런 너무도 당연한 상식에 대해서 제임스 스콧은 삐딱한 시선으로 딴지를 건다. 『우리 모두 아나키스트다』(James C. Scott, Two Cheers For Anarchism, 김훈 옮김, 여름언덕, 2014)에서 제임스 스콧은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의 법칙’을 말하며 우리에게 주위를 살펴보고 신호등 규칙을 위반하여 도로를 횡단할 것을 주문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서 발명된 신호등은 보행자, 마차, 자동차, 자전거 간에 오랜 세월 통용되어왔던 상호 양보와 타협을 교통 기술자의 판단으로 대체했다. 그것의 목적은 공학적으로 설계된 조정 계획을 사람들에게 강제함으로써 사고를 예방하자는 데 있었다.
그 결과 대체로 길 어느 쪽에서도 다가오는 차량이 전혀 없는 게 분명한데도 수십 명의 행인이 신호들이 바뀌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들은 습관 때문에, 혹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전자적 법규명령을 어김으로써 받게 될 최종적인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네 독자적인 판단을 정지시키고 있었다.(135)
우리의 일상은 질서 잡혀 있다. 우리는 질서는 좋은 것 이라는 질서 속에 살고 있다. 제임스 스콧은 우리에게 아니키스트의 안경을 쓸 것을 주문한다. 아나키스트의 안경을 쓰면 규칙, 질서, 세계화, 균질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된다. 질서는 토속적 질서를 무너뜨린다. 국가 표준어가 각 지역의 사투리를 대체해왔다. 널리 일반화된 자유보유토지제가 지방의 복잡한 토지 사용관례를, 정연하게 계획된 지역사회와 주택지구가 무계획적인 낡은 지역사회와 주택지구를, 대규모 공장과 농장이 장인의 생산방식과 소작농과 혼합농을 대체해왔다. 표준적인 작명방식과 신분증명관행이 각 지역의 무수히 많은 작명 관습을 대체해 왔다. 대규모로 이루어 지는 관개와 전력공급 계획이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관개와 연로채취 시스템을 대체해왔다. 통제와 유용에 저항하는 성향을 지닌 풍경은 위계적 조정을 하기 쉽게 해주는 풍경으로 대체되어왔다.(78)
어떤 토속적인 것들이 소멸했다 해서 슬퍼할 이유는 거의 없다. 성냥과 세탁기 같은 기술적인 진보가 부싯돌과 부싯깃, 빨래판 같은 것을 대체해줬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고된 노역을 덜어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모든 것에 맞서서 토속적인 모든 것을 옹호해주려고 난리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균질화를 지향하는 막강한 세력들이 그렇게 분별력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사실상 모든 토속적인 것을 자기네가 보편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북대서양 지역의 토속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가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정치, 경제, 문화적 다양성의 대대적인 축소요, 언어와 문화와 재산 시스템과 정치 형태의 대대적인 균질화다. 특히나 그런 것을 떠받쳐주는 모든 양식의 감성과 생활세계의 균질화이기도 하다.(102) 그러면 단지 요리법, 음악, 춤, 고유 의상들만이 이국적이고 민속적인 것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도 일반 상품들처럼 철저히 상업화 된 형태로.(103) 우리가 몇백미터쯤 뒤로 물러나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세계 어디를 가나 사실상 동일한 획일적 질서, 곧 국가, 비슷하게 조직된 비슷한 형태의 내각 조직도 같은 것들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99)
질서는 토속적인 질서를 소멸시키고 획일화 시키지만, 그리 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제복을 입지 않은 학생들이 한 테이블 주위에 모여 앉아있거나 바닥에 앉아있는 교실에서보다 제복 차림의 학생들이 반듯하게 열 지어 늘어서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교실에서 더 질높은 학습이 이루어 진다는게 과연 당연하고 합당한 결론일까?(92) 이처럼 규칙, 질서의 불완전함은 파리 택시기사들의 그레브 드 젤(greve de zele)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파리 택시기사들은 합의에 의해서, 그리고 큐가 떨어지면 느닷없이 도로법에 명기된 모든 규정을 철저히 지키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파리의 교통이 거의 마비상태에 이른다. 그들은 많은 법규를 적절하고도 현명하게 무시해야만 파리 교통의 흐름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법규들을 철저히 따르기만 하는 것으로 파리 교통을 간단히 마비시킬 수 있었다.(90) 법규가 많을수록 사람은 그 법규 내에서 최대한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일테면 법규가 정하지 않은 예절은 모조리 무시해버린다.(137)
교도소나 정신병원 같은 ‘제도화’의 가장 가혹한 형태 속에서는 때로 “시설 신경증”이라고 부르곤 하는 인격 장애가 발생한다. 그것은 장기적인 제도화 그 자체가 빚어낸 직접적인 결과다. 그런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어떤 일도 솔선해서 하지 않고, 주위 환경에 대한 모든 관심을 상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고,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다.(133) 이런 ‘시설 신경증’이 우리에게까지 전염되지 않았을까?
토속질서를 무너뜨리고, 효율적이지도 않으면서 인간을 시설 신경증에 빠지게 만드는 질서는 국가의 작품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국가들이 항상 곡식과 세금을 빼먹기가 더 수월한 생산 단위들을 선호하는 것은 일반적인 법칙이 되어오다시피 했다. 국가는 기업농과 집단농장과 프랜테이션을 좋아했으며 소농들의 농업과 소규모 거래를 통제하는 국영 마케팅 보드를 선호해왔다. 국가들은 대기업과 은행을, 소기업보다 대규모 기업진단을 더 선호해왔다. 그런 기업집단이 소기업보다 덜 효율적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재정당국자들의 입장에서는 감시하고 통제하고 과세하기가 더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다. 국가의 재정 통제력이 자꾸 더 널리 확산될수록 그 그물망에서 빠져나가려는 비공식적이고 보고되지 않은 ‘회색’ 혹은 ‘검은’경제가 더욱더 번성할 소지가 있다. 거대한 기업집단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보유하고 있는 부가 엄청나기에 그들이 권력회의에서 특권적인 자리를 보장받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143)
국가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약속이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은 잔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이루어진 주요한 정치개혁의 대다수는 시민 불순종, 폭동, 법률위반, 공공질서 교란 같은 큰 사건들이 동반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고, 그런 소동은 극적인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가끔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데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경제 불황이나 세계대전처럼 불가항력적인 엄청난 힘이 작용하지 않을 경우 대의기관과 국민들에 의한 선거가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 듯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산과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며, 최상위 부자계급이 그런 이점에 힘입어 정치적인 영향력을행사할 수 있고 또 언론과 문화에도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준 것이 급진적인 정치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인 의회정치는 대규모 개혁을 촉진시키는 장치라기 보다 무능함을 상징하는 장치에 더 가깝다. 이런 평가가 대체로 사실이라면 우리는 법률 위반과 질서 교란이 민주적정치변화에 기여했다는 역설과 직면해야 한다.(52)
제임스 스콧은 법질서와 당당히 맞서야만 우리가 온갖 질서와 규칙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과거 3백 년 동안 일어난 모든 위대한 해방운동들도 시초에는 경찰력뿐 아니라 법질서와 정면으로 맞섰다. 소수의 용감한 이들이 법과 관습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그런 해방운동들의 대다수는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하고 좌초하고 말았을 것이다. 분노와 좌절감으로 촉발된 그런 교란 행위들은 그들의 주장이 기존의 제도적, 법적 매개변수들 안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줬다. 그러므로 법률을 위반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속에는 혼란의 씨를 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의로운 법률질서가 자리 잡게 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내재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의 법규들이 과거의 그것들보다 더 너그럽고 자유롭다고 한다면 그런 이득의 상당 부분은 법률 위반자들 덕분에 얻은 것이다.(59)
제임스 스콧은 우리가 투사가되어 나라 전체를 바꿀 혁명을 일으키라고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순응하고 있는 질서와 규율이 과연 무엇을 위한 질서인지 한번만 더 생각해보길 바라는 것이다. 생각하는데로 살지 않으면 사는데로 생각하게 된다는 어느 격언이 있다. 나를 둘러싼 질서와 규칙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규칙에 따르는 사람이 될 뿐이다.

나는 노이브란데부르크의 신호등 규칙을 무시하고 도로를 횡단하는 아주 평범한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무 이유 없이 법률을 위반하라고 촉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몇 분의 시간을 절약하자는 하찮은 이유에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었고, 나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순응하곤 하는 습관이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다 부조리하다는 데 동의할 만한 상황을 빚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증해 보여주려는 뜻에서 그렇게 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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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평등 -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 토러스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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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야누스 같은 존재이다.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로마신화의 신으로 문의수호신이며 이중적인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려 노력했다. 인간은 타인과 평등함을 추구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존재인가? 크리스토퍼 보엠은 『숲속의 평등』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Christopher Boehm, Hierarchy in the Forest ; The Evolution of Egalitarian Behavier(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토로스북 2017.)에서 야누스의 얼굴과도 같은 인간의 여러 본성의 모습 가운데 정치적인 면에 주목한다.
인간의 정치적인 본성은 평등주의적이다. 우리의 최초의 선구자는 아마도 대략 500만년이나 700만년 전에 살았던 아프리카 유인일 것이다. 사라져버린 조상인 이들 호미노이드들은 정치적 연합을 형성함으로써, 일반 구성원들이 알파 개체들의 권력을 줄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반 구성원들은 알파 개체에 완전히 종속되었을 것이며, 알파 개체들은 권력을 행사하여 일반 구성원들을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우리 진화의 직접적인 선구자는 신체적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유랑민으로 살아가던 후기 구석기 수렵 무리들이 바로 오늘날과 비슷한 평등주의 기풍과 평등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8) 이러한 평등주의 속에서는 연합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하위자가 되었을 개체들이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막는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크고 단결된 정치적 연합을 아주 지혜롭게 형성한다. 연합한 하위자들은 그들 중에서 좀 더 독단적인 알파 유형들을 계속하여 깔아 뭉갠다. 따라서 평등주의는 실제적으로 별난 유형의 정치적 위계이다. 다시 말해 약자가 힘을 합하여 적극적으로 강자를 지배하는 정치적 위계이다.(22)
평등주의적인 무리나 부족에서 급부상자가 될 것 같은 인물은 지배하고자 하는 특별한 성향을 학습하였거나 선천적으로 가진 정치적 야심에 찬 개체들이다. 집단 지도자, 샤면, 숙달된 사냥꾼, 살인을 저지른 정신병자, 혹은 비범한 힘이나 강한 의지를 가진 정치적 야심가들과 같은 급부상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도덕 공동체는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단결한다. 일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지배는 아주 강력해서, 체계를 뒤엎지 않고도 지도자 역할을 유용하게 발달시킬 수 있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지도자를 감시함으로써, 일반 구성원들은 그들이 심각한 수준의 어떠한 권위도 쌓지 못하도록 한다. 이런 제제는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는데 급부상자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고 추방하고 때로는 살해해버릴 정도이다.
이런 인간의 평등주의적인 본성은 현대에도 발현된다. 평등원칙의 점진적인 전개는 신의 섭리와도 같은 것이며 민주주의를 제어하는 것은 신 자체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것과 같다는 토크빌의 말 처럼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독제권력을 극복하고 민주화 사회를 건설했다. 과거 5천년 이상, 인간은 평등적이라기보다는 위계적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과거 수 세기 동안 상당한 정치적 중앙집권화가 필요한 커다란 나라들에서도 실현가능할 만큼, 산발적이지만 이러한 추세를 뒤집는 아주 성공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이러한 노력들이 일어났으며, 최근에 와서는 다른 지역, 특히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생겨났다.(23)
한편 인간은 위계적인 본성 또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정치적 본성은 정통적인 위계의 형성을 선호하며, 이는 침팬지들이나 고릴라들, 혹은 추장제나 국가에 사는 인간들의 본성과 같다. 그러한 사회 내에서는 그 위계의 꼭대기에서 우위를 가지고 다스리는 하나 혹은 다수의 상위 서열 개체들이 순종적이지만 때로는 매우 화를 잘내는 일반적인 구성원들을 통제한다(33)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이 인간의 본성에는 평등과 위계 모두가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보엠은 평등의 본성은 곧 특별한 유형의 위계라고 말한다. 이 책이 평등주의와 그 자연사에 관한 것이라면 “Hierarchy in the forest(숲속의위계)”라는 원서의 제목에 대하여 의문이 들 것이다. 이 제목은 이 책이 평등이 아니라 지배에 관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평등주의란 단순히 위계의 부재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주의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위계, 즉 반 위계적인 태도들에 기초하는 흥미로운 유형의 위계이다.(32)
인간의 본성은 평등함을 추구하는지 혹은 위계를 추구하는지 알기 힘들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 사회는 평등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위계의 사회이다. 학자들이 선호하는 역사적인 준거점은 변함없이 고대 그리스이며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 남자들이 평등한 존재로서 행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제도화된 노예제가 아테네에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여자들은 단순히 재산이었단 사실에도 불구하고(24) 또한 권력을 사유화한 지배자를 몰아낸 대단히 평등주의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어떤 일을 하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 토크빌이 주장한 대중여론에 의해 개인의 의견이 사라지는 ‘부드러운 전제’의 시작이 보이는 것만 같다. 평등과 위계는 마치 반대되는 개념인 듯 하지만 어디서나 함께 나타난다.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다. 우리는 모두 비둘기파이자 동시에 매파이다(363)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보노노와 침팬지가 다르고, 침팬지와 인간이 다르듯 인간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인간이 몇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떤 전제주의적인 아프리카 고등 유인원보다 훨씬 더 폭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심지어 선천적으로 위계적이지만 수컷들의 권력이 암컷들의 연합에 의해서 강력하게 상쇄되는 유인원인 보노노 보다도 인간은 더 평등주의적일 수도 있다.(65)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본성을 규정하고 그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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