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평등 -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 토러스북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야누스 같은 존재이다.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로마신화의 신으로 문의수호신이며 이중적인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려 노력했다. 인간은 타인과 평등함을 추구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존재인가? 크리스토퍼 보엠은 『숲속의 평등』 강자를 길들이는 거꾸로 된 위계 Christopher Boehm, Hierarchy in the Forest ; The Evolution of Egalitarian Behavier(크리스토퍼 보엠 지음, 김성동 옮김, 토로스북 2017.)에서 야누스의 얼굴과도 같은 인간의 여러 본성의 모습 가운데 정치적인 면에 주목한다.
인간의 정치적인 본성은 평등주의적이다. 우리의 최초의 선구자는 아마도 대략 500만년이나 700만년 전에 살았던 아프리카 유인일 것이다. 사라져버린 조상인 이들 호미노이드들은 정치적 연합을 형성함으로써, 일반 구성원들이 알파 개체들의 권력을 줄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일반 구성원들은 알파 개체에 완전히 종속되었을 것이며, 알파 개체들은 권력을 행사하여 일반 구성원들을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우리 진화의 직접적인 선구자는 신체적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유랑민으로 살아가던 후기 구석기 수렵 무리들이 바로 오늘날과 비슷한 평등주의 기풍과 평등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8) 이러한 평등주의 속에서는 연합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하위자가 되었을 개체들이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를 막는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크고 단결된 정치적 연합을 아주 지혜롭게 형성한다. 연합한 하위자들은 그들 중에서 좀 더 독단적인 알파 유형들을 계속하여 깔아 뭉갠다. 따라서 평등주의는 실제적으로 별난 유형의 정치적 위계이다. 다시 말해 약자가 힘을 합하여 적극적으로 강자를 지배하는 정치적 위계이다.(22)
평등주의적인 무리나 부족에서 급부상자가 될 것 같은 인물은 지배하고자 하는 특별한 성향을 학습하였거나 선천적으로 가진 정치적 야심에 찬 개체들이다. 집단 지도자, 샤면, 숙달된 사냥꾼, 살인을 저지른 정신병자, 혹은 비범한 힘이나 강한 의지를 가진 정치적 야심가들과 같은 급부상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도덕 공동체는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단결한다. 일반 구성원들에 의한 이러한 지배는 아주 강력해서, 체계를 뒤엎지 않고도 지도자 역할을 유용하게 발달시킬 수 있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지도자를 감시함으로써, 일반 구성원들은 그들이 심각한 수준의 어떠한 권위도 쌓지 못하도록 한다. 이런 제제는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는데 급부상자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고 추방하고 때로는 살해해버릴 정도이다.
이런 인간의 평등주의적인 본성은 현대에도 발현된다. 평등원칙의 점진적인 전개는 신의 섭리와도 같은 것이며 민주주의를 제어하는 것은 신 자체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것과 같다는 토크빌의 말 처럼 한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독제권력을 극복하고 민주화 사회를 건설했다. 과거 5천년 이상, 인간은 평등적이라기보다는 위계적으로 지내왔다. 그러나 과거 수 세기 동안 상당한 정치적 중앙집권화가 필요한 커다란 나라들에서도 실현가능할 만큼, 산발적이지만 이러한 추세를 뒤집는 아주 성공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이러한 노력들이 일어났으며, 최근에 와서는 다른 지역, 특히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도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생겨났다.(23)
한편 인간은 위계적인 본성 또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정치적 본성은 정통적인 위계의 형성을 선호하며, 이는 침팬지들이나 고릴라들, 혹은 추장제나 국가에 사는 인간들의 본성과 같다. 그러한 사회 내에서는 그 위계의 꼭대기에서 우위를 가지고 다스리는 하나 혹은 다수의 상위 서열 개체들이 순종적이지만 때로는 매우 화를 잘내는 일반적인 구성원들을 통제한다(33) 야누스의 두 얼굴 같이 인간의 본성에는 평등과 위계 모두가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보엠은 평등의 본성은 곧 특별한 유형의 위계라고 말한다. 이 책이 평등주의와 그 자연사에 관한 것이라면 “Hierarchy in the forest(숲속의위계)”라는 원서의 제목에 대하여 의문이 들 것이다. 이 제목은 이 책이 평등이 아니라 지배에 관한 것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평등주의란 단순히 위계의 부재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주의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위계, 즉 반 위계적인 태도들에 기초하는 흥미로운 유형의 위계이다.(32)
인간의 본성은 평등함을 추구하는지 혹은 위계를 추구하는지 알기 힘들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 사회는 평등을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위계의 사회이다. 학자들이 선호하는 역사적인 준거점은 변함없이 고대 그리스이며 완전한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 남자들이 평등한 존재로서 행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제도화된 노예제가 아테네에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여자들은 단순히 재산이었단 사실에도 불구하고(24) 또한 권력을 사유화한 지배자를 몰아낸 대단히 평등주의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어떤 일을 하건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 토크빌이 주장한 대중여론에 의해 개인의 의견이 사라지는 ‘부드러운 전제’의 시작이 보이는 것만 같다. 평등과 위계는 마치 반대되는 개념인 듯 하지만 어디서나 함께 나타난다.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다. 우리는 모두 비둘기파이자 동시에 매파이다(363)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보노노와 침팬지가 다르고, 침팬지와 인간이 다르듯 인간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인간이 몇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떤 전제주의적인 아프리카 고등 유인원보다 훨씬 더 폭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심지어 선천적으로 위계적이지만 수컷들의 권력이 암컷들의 연합에 의해서 강력하게 상쇄되는 유인원인 보노노 보다도 인간은 더 평등주의적일 수도 있다.(65)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본성을 규정하고 그에 따르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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