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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우연히 어떤 이성을 만났다. 아름다운 외모, 당당하고 스스럼없는 태도로 순식간에 당신을 사로잡는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보는데 말을 섞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다. 알고 있는 배경지식과 유머 코드가 완벽하게 잘 맞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돌려 말해도 상대방은 찰떡같이 그 말의 뜻을 알아채고는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돌려준다. 대화의 핑퐁이 아, 너무나도 흥미롭다. 당신과 상대는 동시에 생각한다.
‘이럴 수가.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우리에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 <그해 여름>으로 이름을 알린 안드레 애치먼의 장편소설 <여덟 밤>은 이렇게 우연히 만난 남녀가 8일 동안 사랑에 함께 잠수하기까지의 일들을 그린 소설이다. 한 줄로 설명하자면 이렇게나 간단하지만, 안드레 애치먼 특유의 섬세하고도 섬세한 묘사와 사랑스러운 문장을 아낌없이 듬뿍 담아 8일간의 이야기를 무려 766쪽으로 풀어냈다.
생각만 해도 떨리는 기분이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를 온통 그로 물들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얼마나 될 것이며, 내가 꿈에 그리던 이와 사랑에 빠질 확률은?
🔖 “사람은 관계를 꿈꿀 수 있고 관계 속에 있게 될 수도 있지만, 꿈꾸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동시에 될 수는 없죠. 아니면 될 수도 있을까요, 클라라?”
첫인상의 설렘을 기억하는 것처럼, 나는 여덟 밤중에서 첫 번째 밤이 가장 인상 깊었다. 우연히 만난 이성, 이끌림, 호기심, 더 알고 싶은 욕망, 서로에 대한 예측과 기대. 아직은 상대를 다 알지 못하기에 불안한 마음 위로 피어나는 로맨틱한 감정과 상상들. 안드레 애치먼은 떨리고 긴장되는 말 한마디 한마디 사이의 수많은 생각과 마음의 소란함에 청진기와 현미경을 들이대고 세포를 하나하나 분석해 기록한다.
두 사람의 일주일을 읽어내는 것은 꼭 연애 프로그램의 게스트가 되어 VR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척 좋아하는 영화 #어떤만남 (Une rencontre, 2014 소피 마르소, 프랑수아 클루제 주연)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연한 만남에서 걷잡을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지만 다음 번 만남을 운명에 맡기고 헤어지는 두 사람을 보여준다.
아무튼, 프란츠와 클라라의 대화를 엿보고 있으면 이런 상대를 만난다는 건 꿈에 가까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대화하며 독일어나 불어로 종종 바꿔 말해도 전혀 이질감 없이 통하고,
대중적이진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시를 둘은 똑같이 외우고 있고,
말장난과 농담의 결을 같은 주파수로 파악할 수 있고,
둘만이 통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고
그런 언어유희가 난무하는 대화가 서로 너무나도 즐거운 관계.
그러자 그런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게 어떤 면에서는 두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주춤거려 답답하게 느껴졌던 프란츠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사랑의 가치와 사랑에 빠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해 내는 안드레 애치먼. 그는 고귀하고 소중한 순간과 경험을 진심으로 전달한다. 세상에는 당신과 주파수가 꼭 맞고 서로의 언어로 함께 사전을 만들어갈 누군가가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비채 #여덟밤 #안드레애치먼 #도서증정 #장편소설추천 #사랑이야기
혼자 있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그런데도 사랑받고 싶어요. … 나는 사랑을 원해요, 다른 이들이 아니라. 나는 로맨스를 원해요. 나는 반짝임을 원해요. 나는 우리 삶에 마법을 원해요. 그게 몫이 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적게 존재하니까.
그리움이이란 우리를 우리라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우리라는 사람보다도 나아지게 만들어주므로, 그리움이란 심장을 채워주므로, 우리가 그럼에도 그리워하기로 작심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를 더더욱 행복하게 한 것은, 떨어져 보낸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우리가 다시 함께였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가 오늘이 흘러가게 된 방식을 내가 좋아하게 했다는 점, 내 삶과 내가 삶을 살던 방식을 좋아하게 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내 삶과 삶의 방식의 얼굴이자, 나를 되쏘아보는 세상을 향한 나의 눈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법이기에 마법처럼 닥쳐왔고, 모든 마법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색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향기, 새로운 습관을 안내해 들여오면서 이것저것에 새로운 의미, 새로운 패턴, 새로운 웃음, 새로운 억양의 베일을 벗겨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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