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단테라는 이름과 ‘신곡(神曲)’이라는 제목에 놀라 서둘러 눈을 돌려버릴지도 모를 분들을 위해 먼저 밝혀둘 게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 단테의 운문 ‘신곡’을 국내의 젊은 이탈리아학자가 꼭꼭 씹어서 흥미진진한 기행문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마침 역자의 스승인 한국외국어대 한형곤 교수는 운문 ‘신곡’을 30여년 동안 개정작업을 해가며 완결판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무려 968쪽이다.
신곡은 잘 알려진 대로 단테의 순전한 상상이 빚어낸 ‘저 세계’ 이야기다. 보기에 따라서는 환상 속의 기행문이며 동시에 선악(善惡)이 갈등하는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보고서이고,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그려낸 자화상이기도 하다. 문학이자 심리학이자 사회학이며 그 근본에 인간중심의 신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1495년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단테 | |
30대 중반의 단테.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올바른 길을 잃고서, 나는/어두운 숲 속에 있었다.” 위대한 서사시의 첫 시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때 그의 곁에 ‘아이네이스’의 작가인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난다. 단테가 늘 흠모해 ‘아버지, 스승, 시인’이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먼저 ‘영원한 어둠과 저주의 땅’ 지옥 여행에 나선다. 입구 쪽에는 비교적 죄가 가벼운 영혼들이 벌을 받고 있다. ‘선악에 무관심했던 자들’이다. 여기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9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는 무절제의 죄, 폭력의 죄, 사기와 배반의 죄 등 3개로 나뉜다. 한 마디로 남에게 피해를 줄수록, 특히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줄수록 벌은 강해진다.
단테가 지옥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다양하다. 자신의 친척부터 시작해 정적(政敵), 당대의 유명한 정치가나 추기경, 심지어 악명 높았던 몇몇 교황들까지 등장한다. 동시에 고대 그리스신화의 인물들과 성경의 주요인물들까지 지옥 구석구석에서 기상천외한 방식의 벌을 받고 있다.
책을 쓴 박 교수는 ‘신곡’ 탄생 이후 서양화가들이 줄기차게 이를 소재로 그려온 그림들을 거의 페이지마다 실었다. 덕분에 책 읽기는 더욱 입체적이 되고, 한층 높아진 우리의 고전 소화 역량에 뿌듯함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 왼쪽은 천국에서 만난 단테와 베아트리체. 오른쪽은 화를 잘 내는 자들이 진흙 늪에서 고통받는 스틱스 숲의 모습. | |
무시무시한 지옥을 여행하는 데 걸린 시간은 3일, 그리고 두 사람은 ‘정죄(定罪)와 희망의 땅’ 연옥 여행에 나선다. 연옥 여행에도 3일이 걸린다.
출발에 앞서 단테의 이마에는 일곱 개의 P자가 새겨진다. 그리고 교만, 질투, 분노, 태만, 인색과 낭비, 탐욕, 애욕 등 7개의 권역으로 이뤄진 연옥의 언덕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P자가 하나씩 지워진다. 연옥은 죄를 씻는 곳이다. 연옥의 끝에 있는 레테(망각)의 강을 건넘으로써 마침내 단테는 천국의 입구에 들어선다.
이제 베르길리우스와 헤어져야 할 시간.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여기까지가 한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평생 흠모했으면서도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 사랑을 이루지 못한 마음의 연인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천국의 안내는 베아트리체가 맡는다. 천국은 지옥이나 연옥과 달리 서열이 없다. 모두가 함께 축복과 환희와 덕으로 가득찬 곳, 그러나 재미는 없는지 하루 만에 여행은 끝난다.
선악을 일깨우는 책으로보다는 상상의 기행문 정도로 읽어본다는 말 자체도 어쩌면 지옥으로 가는 죄 하나를 더 얹는 것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21세기를 살면서 14세기 사람처럼 책을 읽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래서 또 교만의 죄까지 짓게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