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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 30송
서광 지음 / 불광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유식30송이란 마음이 발생하는 기원, 마음의 내용과 작용에 대한 탐구를 30개의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세친 또는 천친으로 번역되는 바수반두가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만을 추려서 정리한 것(20쪽)이라고 한다. 불교를 마음에 관한 가르침이라고도 하고, 불교공부를 마음공부라고도 하므로, 유식은 이러한 마음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이유는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함일 것이다. 행복이란 나의 마음자리가 과거 어디에 있었으며, 현재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통찰함으로써 보다 높은 깨달음으로써 지혜를 쌓아 나와 나 아닌 것들과의 차별을 없애고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자비롭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는 것이리라. 불교의 가르침은 중도의 길이지만, 중도란 양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두 극단 속에서 서로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115쪽)
전통적인 견해에서는 마음을 아뢰야식, 말나식, 요별경식의 세가지로 나누고, 아뢰야식은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오감각식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며, 의식은 아뢰야식, 말나식, 오감각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221쪽)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저장식, 생각식, 오감각식, 의식의 네가지로 나누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발생하는 말나식과 의식, 오감각식의 작용은 다시 아뢰야식의 종자로 되돌아 온다(221쪽)고 하여 상호 관계에 주목한다.
욕구, 결심, 기억, 집중 등의 특수한 정신작용이 오감각식에 작용하는가에 대하여도 전통적으로 긍정하는 호법(護法)의 견해와 부정하는 안혜(安慧)의 견해가 있고, 저자의 입장은 당연히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말나식(생각식)에서 작용하는 특수한 정신작용과 의식에서 작용하는 특수한 정신작용은 차이가 있다(217쪽)고 한다. 또한 아뢰야식(저장식)을 바탕으로 발생하고, 말나식(생각식)의 영향을 받는 오감각식은 처음부터 오염되어 있다고 본다.(222쪽) 뿐만아니라 말나식(생각식)이 오감각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더라도 아뢰야식을 근거로 발생하는 오감각식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223쪽)
유식30송은 처음 1송에서 25송까지는 깨달음의 내용과 목적을 설명하고 있고, 26송부터 30송까지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150쪽) 1송에서는 마음이 어떻게 마음 자체를 드러내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2송부터 16송까지는 드러난 마음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 각각의 작용과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90쪽) 17송과 18송에서 이를 다시 요약하고, 19송에서는 결과로서의 생사윤회를 강조한다.(91쪽) 특히 11송부터 14송까지는 의식의 정신요인들, 즉 선의 정신요인과 번뇌의 정신요인들로 가득하다.(159쪽)
20송은 말나식(생각식)이 계산하고 생각하는 작용으로 만들어 낸 모든 종류의 관념, 신념, 개념의 실체성을 부정(偏計所執性)하고,(101쪽) 21송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서로를 의지해서 발생하므로 상대적(依他起性)이라고 하며, 이러한 의존적 성질과 계산하고 집착하는 성질이 제거되어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圓性實性)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108쪽)
22송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이 때로는 독립적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호 의존하기도 하므로 동시에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112쪽) 23송에서는 20송부터 22송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체 현상의 본질적 속성(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사실은 고유하고 독립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119쪽)
말나식(생각식)의 고집과 주장이 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음의 병이고, 오감각식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 몸의 병이라고 한다.(122쪽) 고통의 원인이 인연(因緣)이라면 우선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나’인 인(因)과 ‘경험되어지는 대상으로서의 너’가 연(緣)으로써 조건지워지는 것임을 알고, 고통과 갈등의 일차적인 책임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인연법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고통을 멈추는 일은 그 고통의 일차적 원인인 ‘나’를 바꾸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93쪽, 94쪽, 95쪽) 사랑이 괴로운 이유는 집착하고 기대하고 요구하기 때문이다.(138쪽) 지혜로운 사랑, 즉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다.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168쪽) 우울증은 지나치게 ‘나’에 집착해 있거나, 지나치게 ‘너’에 집착해 있다가 ‘나’를 상실해 버린 경우이므로,(185쪽)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삶의 고통과 원인을 아는 것이 시급하며,(181쪽) 마음수행은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 욕심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186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불교는 나는 나와 나 아닌 모든 것의 조합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라고 한다. 그런 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가는 나’와 ‘지켜보는 나’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나’는 ‘경험 전의 나’와 ‘경험하는 나’로 또 구분해 볼 수 있다. ‘경험 전의 나’를 지배하는 마음은 잠재의식인 아뢰야식(저장식)과 자아의식인 말나식(생각식)이며, ‘경험하는 나’를 지배하는 마음은 현재의식인 감각식(오감각식과 의식)이다.
아뢰야식은 내부에 있는 일체의 것을 대상으로 삼고,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주체를 그 대상으로 삼으며, 감각식은 외부 현상인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함께 작용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오감각식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표상(表相)이라고 하며, 말나식의 작용만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또한 심상(心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실상을 구하고자 집착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상에 대한 집착마저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한다.(120쪽)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뿌리깊은 식(識)들을 지혜로 전환시켜야 하며, 그런 수행의 방법으로 5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5위로서 자량위(資量位), 가행위(加行爲),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九竟位)가 그것이다. 수행자의 자각은 아뢰야식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어야 한다.(65쪽) 심상과 표상을 없애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되는 무분별지(無分別智) 또는 직지(直知)의 단계를 넘어 일심(一心)으로 여여(如如)하게 될 때 비로소 윤회의 업을 끊고 제 자리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리라.
능가경에서 결국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을 뿐(152쪽)이라고 했듯이, 비로소 그 분별없이 여여한 마음으로 또 하나의 나를 지켜볼 수 있는 정도의 마음 단계가 되어서야 내가 없어도 내가 있는 듯이, 내가 있어도 내가 없는 듯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그 자리가 아닐까 싶다. 파도가 일어도 바다는 변함이 없으며,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잘나고, 못나고의 차이는 바람과 기압, 온도 등의 인연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파도의 크고 작음과도 같은 것이다.(127쪽) 바다에 닻을 내려서 일단 그 속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원만한 항해를 위한 최우선적인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