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유식 30송
서광 지음 / 불광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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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30송이란 마음이 발생하는 기원, 마음의 내용과 작용에 대한 탐구를 30개의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세친 또는 천친으로 번역되는 바수반두가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만을 추려서 정리한 것(20쪽)이라고 한다. 불교를 마음에 관한 가르침이라고도 하고, 불교공부를 마음공부라고도 하므로, 유식은 이러한 마음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이유는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함일 것이다. 행복이란 나의 마음자리가 과거 어디에 있었으며, 현재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통찰함으로써 보다 높은 깨달음으로써 지혜를 쌓아 나와 나 아닌 것들과의 차별을 없애고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자비롭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는 것이리라. 불교의 가르침은 중도의 길이지만, 중도란 양 극단의 중간이 아니라 두 극단 속에서 서로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115쪽)

전통적인 견해에서는 마음을 아뢰야식, 말나식, 요별경식의 세가지로 나누고, 아뢰야식은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오감각식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며, 의식은 아뢰야식, 말나식, 오감각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221쪽)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저장식, 생각식, 오감각식, 의식의 네가지로 나누고, 아뢰야식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발생하는 말나식과 의식, 오감각식의 작용은 다시 아뢰야식의 종자로 되돌아 온다(221쪽)고 하여 상호 관계에 주목한다.

욕구, 결심, 기억, 집중 등의 특수한 정신작용이 오감각식에 작용하는가에 대하여도 전통적으로 긍정하는 호법(護法)의 견해와 부정하는 안혜(安慧)의 견해가 있고, 저자의 입장은 당연히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말나식(생각식)에서 작용하는 특수한 정신작용과 의식에서 작용하는 특수한 정신작용은 차이가 있다(217쪽)고 한다. 또한 아뢰야식(저장식)을 바탕으로 발생하고, 말나식(생각식)의 영향을 받는 오감각식은 처음부터 오염되어 있다고 본다.(222쪽) 뿐만아니라 말나식(생각식)이 오감각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르더라도 아뢰야식을 근거로 발생하는 오감각식은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223쪽)

유식30송은 처음 1송에서 25송까지는 깨달음의 내용과 목적을 설명하고 있고, 26송부터 30송까지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과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150쪽) 1송에서는 마음이 어떻게 마음 자체를 드러내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2송부터 16송까지는 드러난 마음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 각각의 작용과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90쪽) 17송과 18송에서 이를 다시 요약하고, 19송에서는 결과로서의 생사윤회를 강조한다.(91쪽) 특히 11송부터 14송까지는 의식의 정신요인들, 즉 선의 정신요인과 번뇌의 정신요인들로 가득하다.(159쪽)

20송은 말나식(생각식)이 계산하고 생각하는 작용으로 만들어 낸 모든 종류의 관념, 신념, 개념의 실체성을 부정(偏計所執性)하고,(101쪽) 21송은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서로를 의지해서 발생하므로 상대적(依他起性)이라고 하며, 이러한 의존적 성질과 계산하고 집착하는 성질이 제거되어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圓性實性)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108쪽)

22송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이 때로는 독립적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상호 의존하기도 하므로 동시에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112쪽) 23송에서는 20송부터 22송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체 현상의 본질적 속성(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사실은 고유하고 독립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119쪽)  

 


말나식(생각식)의 고집과 주장이 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마음의 병이고, 오감각식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것이 몸의 병이라고 한다.(122쪽) 고통의 원인이 인연(因緣)이라면 우선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나’인 인(因)과 ‘경험되어지는 대상으로서의 너’가 연(緣)으로써 조건지워지는 것임을 알고, 고통과 갈등의 일차적인 책임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인연법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고통을 멈추는 일은 그 고통의 일차적 원인인 ‘나’를 바꾸면 되는 것이라고 한다.(93쪽, 94쪽, 95쪽) 사랑이 괴로운 이유는 집착하고 기대하고 요구하기 때문이다.(138쪽) 지혜로운 사랑, 즉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다.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168쪽) 우울증은 지나치게 ‘나’에 집착해 있거나, 지나치게 ‘너’에 집착해 있다가 ‘나’를 상실해 버린 경우이므로,(185쪽)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삶의 고통과 원인을 아는 것이 시급하며,(181쪽) 마음수행은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 욕심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186쪽)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불교는 나는 나와 나 아닌 모든 것의 조합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라고 한다. 그런 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가는 나’와 ‘지켜보는 나’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나’는 ‘경험 전의 나’와 ‘경험하는 나’로 또 구분해 볼 수 있다. ‘경험 전의 나’를 지배하는 마음은 잠재의식인 아뢰야식(저장식)과 자아의식인 말나식(생각식)이며, ‘경험하는 나’를 지배하는 마음은 현재의식인 감각식(오감각식과 의식)이다.

아뢰야식은 내부에 있는 일체의 것을 대상으로 삼고,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주체를 그 대상으로 삼으며, 감각식은 외부 현상인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함께 작용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오감각식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표상(表相)이라고 하며, 말나식의 작용만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또한 심상(心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실상(實相)을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실상을 구하고자 집착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상에 대한 집착마저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한다.(120쪽)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뿌리깊은 식(識)들을 지혜로 전환시켜야 하며, 그런 수행의 방법으로 5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5위로서 자량위(資量位), 가행위(加行爲),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九竟位)가 그것이다. 수행자의 자각은 아뢰야식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어야 한다.(65쪽) 심상과 표상을 없애고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되는 무분별지(無分別智) 또는 직지(直知)의 단계를 넘어 일심(一心)으로 여여(如如)하게 될 때 비로소 윤회의 업을 끊고 제 자리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리라.

능가경에서 결국 행위자는 없고, 행위만 있을 뿐(152쪽)이라고 했듯이, 비로소 그 분별없이 여여한 마음으로 또 하나의 나를 지켜볼 수 있는 정도의 마음 단계가 되어서야 내가 없어도 내가 있는 듯이, 내가 있어도 내가 없는 듯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그 자리가 아닐까 싶다. 파도가 일어도 바다는 변함이 없으며,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잘나고, 못나고의 차이는 바람과 기압, 온도 등의 인연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파도의 크고 작음과도 같은 것이다.(127쪽) 바다에 닻을 내려서 일단 그 속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원만한 항해를 위한 최우선적인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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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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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시리아인과 유대인과의 사이의 혼혈로 태어난 종족을 말하며, 유대인으로부터는 이민족으로서 배타적으로 차별 취급되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강도피해를 구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빗대어 진정으로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묻고 있으며, 착한 사마리안법이란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 적극적인 구호의무를 이행할 것을 강조하는 규범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선한 사마리안 법에 해당하는 응급의료법의 경우, 외면에 대한 처벌규정은 없고 선한 취지의 행위를 장려하기 위한 면책규정이라는 점에서 본래의 착한 사마리안법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의 저자도 결국은 나쁜 사마리안들에게 그들의 개명된 이기주의(333쪽)와 도덕적 의무(335쪽)에 호소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노엄 촘스키의 추천사(6쪽)에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그동안 ‘세계화’의 이름으로 정통 경제이론을 내세운 ‘경제발전의 원리’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교리인지를 폭로하면서, 사악한 삼총사(IMF, 세계은행, WTO)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의 경고는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의 부자나라들은 신자유주의에 배치되는 높은 관세와 보조금 정책 등으로 부자가 되었음에도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신들이 했던 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할 것’(35쪽)을 강요함으로써 곤경에 처한 개발도상국들을 도와주기는 커녕 이용만 하려는 속셈을 가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다. 
  


1945년 이후의 세계화의 진실은 통제된 세계화의 시기였던 1950~1970년대가 성장이나 분배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반면에, 1980년대 이후 급격하고 통제되지 않은 최근에 있어서는 성장과 안정, 분배의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고 적고 있다.(54, 57쪽) 196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의 경험도 경제발전의 관점에서는 적절히 통제된 성공적인 사례로 기술되고 있다.

부자나라들의 의도는 그들의 영향력으로 그들이 원하는대로의 세계경제규칙을 만들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조의 조건이나, 융자의 조건으로 삼는 민주주의나 정부의 분권화, 중앙은행의 독립,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의 사안도 충분히 개발도상국의 개별 사정에 맞게 고려되어야지 사악한 삼총사의 의도대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정부의 권한을 축소, 분권화하고 중앙은행을 독립시키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취약한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무장해제를 당하는 무방비의 상태로 내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민주주의와 시장이 반드시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것만은 아니라고도 한다.(265쪽)

사실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와 ‘1달러 1표’의 시장원리는 상호 충돌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266쪽) 신자유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시장의 ‘탈정치화’를 주장하면서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깨어있는 시민의 1표로 끊임없이 시장을 감시하는 민주적인 통제시스템의 구축과 유지에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소위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시장, 자유무역정책을 강요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자나라 사람들의 건망증을 질타하고 있다.(100쪽) 그러나 건망증이라기 보다는 영국 대처수상의 언급처럼 ‘대안없음’(66쪽)을 핑계로 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개발도상국들에 있어서 외국인 직접투자는 ‘악마와의 거래’일 수 있으며(157쪽), 재분배프로그램없이 저성장과 소득불평등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중앙은행 독립성부여도 신중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237쪽) 또한 누적 채무를 지탱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상당기간 적자 예산을 운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으므로(240쪽) 재정건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도 바람직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정책들이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까닭은 정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라며,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문화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발전하는 것(300쪽)으로서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로 상호작용하는 것(301쪽)이지, 문화가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288쪽) 또한 문화에 근거해 경제발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후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296쪽)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비판적으로 사악한 삼총사의 권고를 따를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조업에 대한 보호와 투자(323쪽)를 함으로써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개선하려는 의지(321쪽)를 가지고 시장에 대항하라(318쪽)고 주장하고 있다. 1947년의 마셜플랜처럼 나쁜 사마리아인 행세를 하지 않는 것이 부자나라들에게 오히려 이익이 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개명된 이기주의’에 거듭 호소하고 있다.(333쪽)

우리나라는 부자 나라인가, 가난한 나라인가? 부자 나라라면 사다리를 걷어치울만큼 지붕 위에서 떠밀리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또 그래도 도덕적으로 괜찮은 것인가?  가난한 나라라면 우리는 충분히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제조업, 그 밖의 고부가가치산업에 대한 보호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한미FTA에서 미국의 자동차산업보호를 위한 추가협상 내지는 재협상요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소고기시장을 개방하고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양극화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나라는 영원히 가난해야 하는가? 그것이 비단 가난한 자들의 책임 뿐인가? 되돌릴 수 없는 고속도로 위의 무한질주 같은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 우리는 과연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적절한 변속을 하면서 가장 알맞은 파도를 골라 타고 있는 것인가? ‘이기주의’는 과연 ‘개명’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문외한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끝나지 않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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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는 법 - 운명은 정해져 있으나 바꿀 수 있다
정공 강설, 이기화 옮김 / 불광출판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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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운명은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할 인간의 굴레인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자를 ‘개조론’으로, 후자를 ‘숙명론’으로 명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제목으로 보아 이 책은 ‘개조론’의 입장에서 과오를 고치고 선행을 쌓아서 최대한 겸손한 마음으로 운명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대학교수인 옮긴이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대만 정공법사의 ‘수복적덕조명법 요범사훈강기(修福積德造命法 了凡四訓講記)’를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Silent Voices’가 영역한 것을 번역하여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3쪽) ‘요범사훈(了凡四訓)’은 명나라의 원요범(袁了凡, 1533~1606)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의 아들 원천계(袁天啓)에게 선과 악을 가리고, 허물을 고쳐 선행을 쌓음으로써 운명을 바꾸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이다.(4쪽)

사람의 일생은 외부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내부적으로 지배 당한다. 따라서 각자에게 일어나는 일의 원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현재의 일들은 과거의 일들의 결과이며, 미래의 일들의 씨앗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쁜 수확은 과거 나쁜 파종의 영향이며, 지금 좋은 씨앗을 뿌리는 일은 나중에 좋은 열매를 맺을 당연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리라.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운곡대사는 다른 사람을 위한 선행을 실행할 것을 권하고, 정공법사는 수학적 개념인 고정된 상수(常數)와 변하는 변수(變數)의 관계로 설명한다. 즉 상수는 과거의 업으로 변할 수 없으며, 변수는 현재의 업으로 조절 가능한 것이고, 미래는 이 상수와 변수의 조합으로 전개된다고 한다.(332쪽) 그렇다면 현재 조절 가능한 변수로서의 조건인 좋은 파종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운명을 바꾸는 원리는 이 인과법칙의 조건적 측면에 기초를 두고, 원인은 과거에 만들어져 변할 수 없으나, 조건은 항상 변할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57쪽) 우선 말과 행동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므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조심해야 하고(118쪽), 과오를 고치기 위해서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알고,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데는 용감할 것을 강조한다.(123쪽)

인생은 단지 한 호흡에 있음을 알고, 다음 호흡이 오기(숨이 넘어가기)까지 서둘러 허물을 고쳐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행동을 통하여 고치는 방법, 이치를 통하여 고치는 방법, 마음을 통하여 고치는 방법이 있으며(154쪽), 이치를 깨달아 행동과 함께 마음으로부터 바꾸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하고 있다.(155쪽)

그 행동과 마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제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불교에서는 아낌없이 주고(布施), 친절한 말을 쓰며(愛語), 진실로 남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고(利行), 동료와 함께 협조하는(同事) 사섭법(四攝法)을 중생을 인도하고 감화하는데 이용한다고 한다.(288쪽)

모든 존재들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고(同體大悲), 하나를 닦는 것이 모든 것을 닦는 것(一修一切修)이라고 한다.(99쪽) 모든 것은 운명에 달려 있지만, 운명을 바꾸는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324쪽) 비록 스스로는 과오를 범한 적이 없고, 범하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보다는 낫다는 완벽한 겸손의 마음에 이를 때 비로소 과거의 업들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 온 탕아(蕩兒)가 황금보다 더욱 귀중하다고 한다.(140쪽) 장애의 마음과 미혹들을 내려놓고 어지러운 식(識)들을 지혜로 전환시키기 위해(轉識成智) 무한한 수행의 방법인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할 때 비로소 해탈을 얻음으로써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리라. 한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 한 세상을 내려 놓는 것이다. 한 마음을 내려 놓고도 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면 여전히 길 위에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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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 심상사성, 성공학으로 읽는 금강경
우승택 지음 / 장승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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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사성(心想事成) 금강경(우승택, 장승, 2008)

-성공학으로 읽는 금강경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금강석과 같이 견고한 지혜를 얻어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님의 말씀으로서, 줄여서 금강경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의 대표경전으로서 402년 중국의 구마라집(鳩摩羅什)에 의해 한자로 번역된 후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고려대장경. 수록본을 기본으로 해설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5쪽)

금융업계 종사자로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얻어 보시의 마음으로 쉽게 설명한다고 하고 있으나, 그래도 초심자로서는 이해하기가 결코 만만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중간 중간에 저자 나름의 직장생활에서나 인간관계 속에서의 체험담들이 낯선 장애를 걷어내고 쉽게 본질에 그나마 가까이 접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금강경은 석가모니가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제자인 수보리와 문답 형식의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40여년 만에 설하신 경전으로서 양나라 황제의 아들 소명태자에 의해서 다시 32부분으로 나누어 소제목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15쪽)

게송은 경전 구조의 한 부분으로 교리나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데 쓰이는 운문체의 부분인데, 게송 중에서도 경전의 주요한 내용을 요약하여 핵심적으로 나타내 보인 게송을 사구게(四句偈)라고 하며, 금강경에는 모두 4개의 사구게가 나온다.(64쪽)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起心)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무릇 모든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안다면 바로 여래(부처)를 보게 된다.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며, 소리・향기・맛・촉감・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며,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고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만일 나를 형상으로 보기를 원하거나 음성으로 구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므로 결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일체 우리가 의도하고 도모하고자 하는 것들은 마치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이므로 마땅히 그와 같이 알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몸에 깃든 무수한 마음들은 크게 두가지 방향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이요, 또 하나는 타인에게로 향하는 마음일 것이다. 굴복시켜야 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일 것이고, 항상 내어야 하는 마음은 분명 타인을 위한 마음(보시)일 것이다.(應無所住 行於布施) 그러한 마음들이 어느 하나에 머물지 않도록(一相無相)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如法受指) 하나의 세상(一體同觀)을 제대로 볼 수가 있는 것이리라.(如理實見)

저자는 불교가 가난을 추구하는 종교는 결코 아니며, 자신의 태만을 ‘마음 비움’으로 가장하고 그로 인한 ‘가난’을 ‘무소유’로 가장하는 사람들이 싫다(158쪽)고 하고 있다. ‘무소유’란 ‘소유하되 집착하지 마라’는 의미이므로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心想事成)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과 ‘부’를 생각하는 자체가 어떤 착(着)을 갖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므로 진리는 ‘오직 할 뿐’일 것이다. 나머지는 여여(如如)하게 받아들일 일,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마음의 연습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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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쏴라 -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숭산행원 지음, 현각 엮음, 양언서 옮김 / 김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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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쏴라



종교의 궁극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참 나를 발견하여 현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리라.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그의 제자 현각스님이 엮은 이 책에서는 항상 바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 즉 생각 이전의 원점에 머물라는 점을 강조한다.


나라는 존재도 나를 인식함으로써 존재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 나라는 생각조차 떨쳐 버림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조차도 눈(眼)이 눈(眼)을 보려는 것과 같아(38쪽) 길을 잘못 들게 하는 요인이 되므로 ‘오직 할 뿐’(正念, 14, 62쪽)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런 생각없이 정진하되, 완전히 고요한 적정(寂靜), 즉 부동심(不動心)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을 끊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란 이름으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존재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써 아마도 부처를 만나면 그 부처까지도 쏘아서 없애버리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주위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 진리가 아닌 것은 없고, 모든 진리들은 생각의 여지없이 찰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마치 물 위를 걷는 사람처럼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보다 빨리 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진리를 강조하시는 셈인가.

“순간을 유지하면 당신과 신은 결코 분리되지 않아요”(68쪽)

하나의 우주가 음양의 질서로 교차하고, 하나의 국가가 보수와 진보의 가치로 어지럽고, 한 사람이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着)과 벗어나려는 마음(脫)이 싸우고 있는 것은 고통스런 현실의 삶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을 내려 놓음(放下着)으로써 평화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생각 때문에 싸우고, 개념 때문에 싸우는 것은 결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른다면 생각도 없어질 것이므로 싸울 일도 없어질 것인가.

마음의 공부란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연습을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연습을 전생에서 잘 해 온 사람은 이생에서의 삶은 물 위를 걷듯이 비교적 순탄하겠지만, 그 연습을 게을리 한 사람의 삶은 각종의 장애에 부닥치는 일들이 많을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마음의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한들, 애초에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다시 업을 쌓는 일일 것이며, 내생에 다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리라.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들이 있듯이 말이다.

아마도 지금의 생(生)은 지난 생(生)의 결과인 동시에 다음 생(生)의 원인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각자 예비・음모적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무엇을 예비하고 어떤 음모를 왜 하는가에 따라 참 나를 찾게 되는 결정적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많이 읽거나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이 종종 길을 잘못 찾는 이유는 집착하고 분별하려는 생각 때문(224쪽)이므로, 지식이 아닌 무엇이 본성(自性, 佛性)인지를 꿰뚫어 보려는 지혜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게으르고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본성(自性, 佛性)에 가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끊임없이 생각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 생각이 몸을 뒤죽박죽으로 잘못 흔들지 못하게 마음의 방향을 항상 올바로 향하도록 끊임없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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