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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용산참사를 계기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문을 제목으로 하여 시작되는 이 책의 내용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훌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는 명제 하에 “아직 대한민국이 ‘훌륭한 국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7쪽)라는 전제로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으며, 독자와의 깊은 대화가 집필 목적(10쪽)이라고 한다. 전제로서의 당위라면 “국가는 훌륭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국가가 그래왔던 것처럼 더 이상 ‘국민의 적으로서의 국가’를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적, 경험적 필연으로서의 각오처럼 느껴진다.
국가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 먼저 홉스, 마키아벨리, 로크, 애덤스미스, 루소, 밀, 소로, 마르크스, 피히테, 톨스토이, 르낭, 라스키, 스코치폴, 카를포퍼, 하이에크, 케인즈, 플라톤, 베블런, 아리스토텔레스, 니버, 칸트, 베버, 베른슈타인, 맹자, 김상봉, 이남곡 등의 국가관 또는 그 사상적, 이론적 배경과 견해들을 언급하고 나서, ‘훌륭한 국가’에 대한 개념정의(284쪽)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장점은 개별 사상가들의 심오한 사상과 그 철학적, 시대적 상황 등을 이해하기 쉽게 그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서술(291쪽, 주1)하면서, 끈김없이 그 연결고리를 제공하여 독자들이 국가의 본질에 거리낌 없이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수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고민의 흔적들이다.
저자는 두려움을 정서적 기반으로 여전히 유효한 홉스의 국가주의 국가론에 의존하게 될 우리의 현실(43, 112쪽)을 거듭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국민의 평화와 안전외 공공의 복지를 추가한 로크의 자유주의 국가론을 설명하면서 권력의 정당성(51쪽)을 강조한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애덤스미스가 말하는 국가의 실체는 보수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자유’와 진보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공공재’의 양면을 가진 조화론(56쪽)이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루소는 급진적 자유주의 국가론을 전개하면서 국가의 해체 또는 혁명으로 사회계약파기의 가능성(57쪽)을 거론하면서, 국가와 정부를 엄격히 분리(58쪽)했다고 전한다.
어떤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의 영역을 강조한 밀의 자유론을 언급(63쪽)하면서, 헌법 제37조 제2항의 본질적 내용의 침해금지를 강조(64쪽)한다.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대하여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를 위해 저항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단순한 자유주의라기 보다는 더 나아간 평화주의와 생태주의(70쪽)라고 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 오늘날의 지배적 담론으로서 ‘시장형 보수’(70쪽)로 이름하고 있지만, 출현할 당시에는 진보적이었으며, 이는 사회적•정치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68쪽)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주의 국가론과 자유주의 국가론이 공히 국가를 하나의 공동사회로 보고 있음에 반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은 마르크스의 국가관을 소개(75쪽)하고 있다. 즉 국가는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도구적 국가론’(77쪽)이 그것이다. 이른바 ‘종말론’이 ‘구원’을 갈구하기 위한 도구라면, ‘역사적 종말’을 예고하는 ‘마지막 혁명’은 역설적으로 소외된 자의 자유에로의 희구, ‘청년 마르크스의 소망’(83쪽)의 반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은 정의실현을 국가의 목적으로 한 ‘목적론적 국가관’과 철인정치를 제시(99쪽)했으나, 그의 정의는 계급특권을 인정한 ‘국가의 정의’이지, 계급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오늘날의 ‘국민의 정의’는 아니었다. 카를 포퍼의 제안처럼 민주주의는 악을 최소화하기 위한 부작용이 가장 적은 정치제도(109쪽)임을 알고 주권자로서 참여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으며,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108쪽)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는 ‘국민소환제도’는 채택되고 있지 않다.
애국심의 두 얼굴(115쪽)과 관련하여 피히테의 ‘살아있는 독일어’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적 찬양(119쪽)과 톨스토이의 인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유해한 허위의 감정이라는 비판(127쪽)을 소개하며, 궁극적으로 르낭의 공동체 귀속에로의 개인의지를 강조(131쪽)하고 있다. 이럴 경우 애국심은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독점적 수사(137쪽)의 혐의를 벗게 된다고 한다. 르낭의 입장에 서면, 국가라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의지들의 집합’으로 형성되어야 정의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정의는 플라톤의 정의와는 다른 것으로서, 어떤 실체의 현상으로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과정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국가를 변화시키는 두 가지의 방법, 즉 혁명과 개량과 관련하여 라스키의 혁명의 조건을 설명(145쪽)하고, 스코치폴의 혁명 후의 국가의 모습(149쪽)을 언급하며, 국가는 사멸하지 않는다는 점에 방점을 둔다. 톨스토이의 ‘굴뚝비유’(294쪽 주10)를 들면서 혁명이 권력기관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는 절망을 전하면서 각자가 스스로의 욕망을 줄이는 종교적 해결책을 모색(152쪽)했다고 한다. 굴뚝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된다. 다만 현실적 해결책으로서는 부의 상층부 집중현상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적 수양이외에도, 외적 강제환기장치(송풍기, 151쪽)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정의(正義)란 정의(定意)하기 곤란한 것이므로, 정의(正義)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카를 포퍼의 견해처럼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것(155쪽)이 우선일지도 모른다. 그는 혁명을 동원하는 유토피아적 공학이 아니더라도 점진적 공학으로서 ‘민주적 간섭주의’로서 ‘방만한 자본주의’를 개선해 나갈 수 있다(156쪽)고 보았다. 또한 ‘자유의 역설’을 인정하면서 마르크스와 같이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자멸한다.”(157쪽)고 경고하고 있으며, 모든 폭력혁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혁명은 정당하다고 인정했다(160쪽)고 한다.
그러나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구별이 명백한 것도 아니고, 혁명의 결과가 애초에 바라던 바와 다르더라도 현실적으로 ‘사후에 소환되지 않는 혁명’은 ‘성공한 혁명’으로서, 그것을 정의(正義)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환되지 않는 혁명’은 ‘동시대인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후에 소환되는 혁명’은 명백히 ‘실패한 혁명’으로서 ‘불법’일 것이다. 그러한 불법은 단시간내에 드러날 수도 있지만, 장구한 세월의 성찰을 요하기도 한다. ‘정의로운 국가’라 하면 바로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소환제도’를 만드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현실적으로는 각종의 특별법들이 때로는 소환을 위한 도구로도 이용되지만, 소환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널리 활용된다. 문제는 그러한 입법의 과정에 얼마만큼 민의가 왜곡되지 않고 날것으로 생생하게 반영되는 소통의 제도적 도구를 가졌는가에 있을 것이다.
전체주의를 혐오한 포퍼와 달리, 하이에크를 언급하면서 ‘겁에 질린 자유주의자’(164쪽)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국가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자유라는 이념과 시장이라는 비인격적 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 셈(175쪽)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의 자유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이다. 전자는 처음부터 계약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계약내용으로 삼을 경우에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한다. 후자는 ‘관계로서의 자유’이며, ‘제도로서의 자유’이다. 그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와는 달리 책임을 배제할 수 없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어서 이미 ‘공공재’다. 그러므로 사회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후자의 경우로 제한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공공재로서의 한계를 갖는 것이다. 그것을 ‘내재적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이에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인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자유의 전부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혁명과 개량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개량의 길’이 막힌 곳에서 ‘혁명의 길’이 열린다(181쪽)고 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문명국가의 길은 하이에크의 길이 아니라, 포퍼의 길이라면서, 이 길이 열려있는 곳에서는 마르크스의 길이 열릴 가능성은 없다(182쪽)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개량을 시도(182쪽)할 것을 권고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제도화’(민주적 정당성), ‘참여의 제도화’(절차적 정당성), ‘개방의 제도화’(개방적 정당성)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열린 길 위에 있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그 길은 결핍을 보호하고, 탐욕을 제어하기 위한 공동의 가치를 세우는 일에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로 공동체의 의사형성에 가담하여 협력하는 길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진보의 국가론으로 분류하면서, 자유주의 국가론의 다양성의 가능성(185쪽)에 언급한다. 베블렌은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이다.”(186쪽)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자연은 목적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으며,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선이고, 정치의 선은 정의(203쪽)라고 한다. ‘국가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같은 것’이라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입법자가 할 일은 국가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훌륭한 삶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203쪽)이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일반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국가론과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사이에서 방황(200쪽)하지만, 진보자유주의자의 국가론은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결합한 이른바 ‘미덕국가론’ 또는 ‘선행국가론’이라 할 수 있다(206쪽)고 한다. 선을 향하는 국가의 한 현상형태, 또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복지국가론(208쪽)은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느 국가론과도 결합(209쪽)할 수 있으며, 소위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논쟁은 소모적인 ‘허위논쟁’(211쪽)에 불과하다고 한다.
니버에 따르면 도덕적 이상인 ‘개인의 이타성’과 ‘사회의 정의’는 서로 배타적인 것도, 절대적으로 모순인 것도 아니지만, 조화도 어렵다(223쪽)고 한다. 그리고 정의란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채택(223쪽)한다. 그리고 그런 정의의 실현방법으로서 ‘헌법’을 들고 있다.(226쪽) 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232쪽)면서, 경제권력 또는 시장권력의 배분과 관련하여 정의의 조건(233쪽)으로 기회의 공정, 경쟁의 공정, 주체의 공정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조건은 비단 경제적 시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일반적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를 앞서 언급한 ‘민주적 정당성’,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진보자유주의자’(242쪽)로 자신을 규정한다. 또한 저자가 명명한 ‘선행국가’란 한마디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정의, 선, 미덕’을 행하는 국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진보자유주의의 선행국가’만으로 ‘착한 국가’가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선과 악은 분명히 존재하고(219쪽), 또 칸트의 선은 행복과 도덕의 일치이며 결합(254쪽)이라 하더라도, 정작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대답은 절박한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아 ‘착한 국가’의 모습은 여전히 희미하다.
베버는 국가의 본질적 특성이 폭력(256쪽)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좋은 정치인의 자질을 거론하며, 책임의식(259쪽)을 강조한다. 칸트의 ‘동기’가 아니라 ‘과정과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베버의 견해(261쪽)가 정의로운 국가의 실체에 더 부합할 수 있다. 개인적인 선의 영역에서는 동기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사회적 정의의 영역에서는 ‘과정과 결과’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이 중요하다. 또한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내포한다.(270쪽) 책임없는 자유란 없다.(271쪽) 여기서의 자유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이다. 따라서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라는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무엇인가?’(223쪽)의 물음보다 ‘어떤 정의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보다 더 명백한 정의의 실체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당위로서의 헌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인 사회적 존재로서의 국민은 끊임없이 ‘정의의 방식’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정의’도 고정된 실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쉼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273쪽), 즉 ‘정치인’의 운명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국가’의 운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인의 실패’는 ‘정부의 실패’이지 ‘국가의 실패’는 아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정치인에 의한 정부로 인한 국민의 불행과 역사적 퇴행을 방지하기 위한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서는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에 입각한 정치를 해야하며, 특히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결론적으로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283쪽)고 한다.
자유는 두가지의 측면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바로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다. 정치를 ‘공동체의 조직과 구성, 그 작용에 관한 관계와 협상의 기술’로 정의한다면, 정치영역에 관계되는 자유는 개인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이다.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가 신념의 영역이라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는 책임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치는 신념보다 책임, 즉 동기보다 과정과 결과가 중요하다. 정치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국가관의 실패는 바로 이점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혼동 또는 경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훌륭한 국가의 조건으로 안보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 복지국가의 네가지를 나열하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그 모든 것을 체현하는데 필요한 절차와 제도를 이미 가지고 있다(286쪽)고 한다. 그러면서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시민들이므로, 좋은 정당, 민주적인 정치, 효율적인 행정을 실현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참여(285쪽)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민의 참여의 역할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필요한 절차와 제도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의 실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실패’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실패를 명확하게 인식하고서도 임기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제도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한데도 과잉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방식이 부족한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에서는 그 어떤 권모술수도 국민의 의지를 이기지 못한다(287쪽)는 저자의 믿음은 배반당할 위험이 높아 보인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실제로 두 번의 배반을 당했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정치학자 또는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의 시각을 유지(286쪽)했음을 고백한다. 소통과 교감의 필요성(287쪽)에는 공감하며, 그가 정치인으로서 필요한 책임윤리를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음도 인정한다.
정치의 선한 목적인 정의란,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에 공동체 구성원이 어떤 사항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어떤 제도적 절차에 의해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정의’라 함은 ‘참여의 확대와 그 절차의 보장’으로, ‘선’이라 함은 ‘자기의 유리보다 다른 사람의 불리를 먼저 고려하는 도덕적 경계’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영역인 ‘선’을 요구하기는 어렵더라도, ‘개인적 선의 사회적 제도화’가 ‘사회적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만으로도 부족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보다 ‘더 나은 정부’, 즉 ‘도덕의 제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길 위의 국가’가 어떻게 ‘착한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본다. 그러므로 도덕의 경계를 넘어 제도적으로 ‘정의로운 국가’, 즉 ‘착한 국가’를 형성하는 방법은 국가의 조직과 구성, 그 활동에 있어 가능한 한 많은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참여의 제도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치’란 ‘공동체의 조직과 구성, 그 작동에 관한 관계와 협상의 기술’이다. 그것이 정의로운 ‘정치’이기 위해서는 ‘민주적정당성’, ‘절차적정당성’, ‘개방적정당성’을 그 내용으로 하여야할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소외와 탐욕으로부터 다수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소외로부터의 보호’는 국민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고, ‘탐욕으로부터의 보호’는 과잉소유로 공동체질서의 조화를 해치는 소수세력에 대한 규제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국가는 ‘결핍된 국민’과 ‘과잉의 국민’의 두 부류의 이질적 구성원을 가진다. 국가는 ‘결핍된 국민’으로부터 멀리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우선적으로 ‘정부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실패’가 있더라도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다면 ‘국가의 실패’를 논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것을 방치할 경우 ‘국가의 실패’는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오늘날 양극화된 ‘결핍된 국민’의 소외를 배려하고, ‘과잉의 국민’들의 탐욕을 제어하면서 조화로운 동행을 모색해야한다. 주권행사자로서의 모든 국민의 국가권력에 대한 자유롭고 평등한 접근의 보장, 그것이 바로 ‘민주적 정당성’의 주된 내용이다.
‘국가의 얼굴’은 ‘개인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국가를 ‘국민의 얼굴’로 인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국가의 얼굴’을 만드는데 쉽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접근이 까다롭게 통제되거나, 소통되지 않는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구성원의 국가’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더 이상 개별 ‘국민의 얼굴’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자의 얼굴’이거나, ‘지배집단의 위장’에 불과한 것이다. ‘국가의 얼굴’을 만드는 ‘국민의 얼굴’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국민’의 얼굴이 아니라 당연히 ‘사회적 존재로서의 국민’의 얼굴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의로운 정치의 기술’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렇더라도 ‘국민이 국가에 적응’하도록 강제해서는 안되며, ‘국가가 국민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조직의 구성부분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선택가능하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개방적 정당성’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각자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 더 나은 정부를 얻을 수 있는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206쪽)이라고 한다. 여기서 ‘더 나은 정부’이외에 한가지 더 강조할 점은 밝혀야하는 ‘개인의 책무’도 있지만, 밝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길 위의 국민’은 정작 밝히고 싶어도 밝히지 못하는 암울한 상태에 있는 경우도 많다. 개별 국민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한다면 구체적인 국가작용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소통의 제도화’가 시급하다. 그것은 ‘절차적 정당성’이다. ‘민주적 정당성’은 ‘개방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당성’이 전제될수록 더욱 강화되는 것이리라.
오늘날의 ‘시대상황이라는 관계’ 속에서는 어느 국가론도 처음부터 목적론적 고려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이 국가의 목적에 치우친 견해라면, 자유주의 국가론은 국민의 자유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견해이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의 목적인 통치의 행태와 국민의 목적인 자유(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의 실현이 동등하게 제도적으로 소통하는 ‘동행국가’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동행국가’로서의 정당성은 ‘개방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선로로 하고 ‘민주적 정당성’을 침목으로 할 때에만 ‘결핍된 국민’과 ‘과잉의 국민’을 아우르는 이른바 국민 모두의 ‘정의로운 국민국가’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갈래의 철길이 침목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어떤 기차도 그 위를 안정적으로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선로의 길이가 길고, 받치고 있는 침목이 많을수록 분명 정의로운 그 목적지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 기차에는 ‘결핍된 국민’과 ‘과잉의 국민’이 모두 타고 있다. 그 국민은 구별되는 각 개인일 수도 있지만, 각 개인 속의 두 본성(소외와 탐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외면할 수 없는 동행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는 소외의 길 위에서는 가속의 통치술을, 탐욕의 길 위에서는 제어의 통치술을 ‘정의롭게 동원’할 수 있는 ‘유기적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동행국가론’의 실체는 ‘유기적국가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장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새는 겉으로 보기에 좌우의 날개로 날아가는 듯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때마다의 ‘바람’에 따라 좌우의 날개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의 ‘고민’으로 난다. 그러므로 그의 비상(飛上)은 그런 생존의 ‘몸부림’인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정의롭기를 바라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원하는 한 마리의 새라면, ‘고민의 몸부림’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 고민은 ‘국민과 함께하는 고민’이어야 하며, 구분과 단절이 아니라 아울러 함께하는 고민의 방법은 다각적인 ‘소통의 제도화’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정의’를 목적으로 하지만, 그 내용은 ‘참여의 확대와 그 절차의 보장’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 ‘열린 국가’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국가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국가와 국민은 더 이상의 ‘적’이 아니라 함께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연인’이 되는 지름길이다. 에리히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동행의 본질’은 ‘서로 참여하는 사랑’이다. ‘정의로운 열린 국가’만이 국민으로서의 개인을 그런 행복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며,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사는 세상’에 더 가까운, 더 나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변모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