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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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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평생을 길 위에서 ‘사실들과 인상들을 분류하고 그것을 대조하는 일’(18쪽)로 사유한 결과로서 남긴 그의 아포리즘(잠언)은 많은 것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패배자의 값진 기록’(9쪽)이라는 옮긴이의 뜻은 아마도 에릭 호퍼(1902~1983)가 철저히 자신을 패배자 또는 적응불능자(74쪽)로 스스로를 인정하면서 사색하고 있었던 점을 분명히 한 것이리라. 그는 평등의 주장이란 ‘자신이 우위에 설 희망이 없는 문제’에서의 선택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란 좌절한 자본주의자’라는 것이 드러난다(69쪽)고 한다. 그러나 농장주 쿤제와의 대화(150쪽)에서 유추해 보면 그는 가장 안전한 삶의 방법으로 길 위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안전은 아마도 어떤 ‘자유’와 닿아 있을 법하다.

어릴적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일찍 여읜다. 그러나 시력을 잃었던 7세 부터 8년이나 지난 후에 다시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뒤의 몰입은 그의 사색을 더욱 깊게 한 것 같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면 다시 죽을 때까지 매일 일하러 가야 한다는 ‘고요한 절망’ 속에서 문득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약병을 들이키다 말고 내뱉으며, 생의 끝없는 길을 발견하고, 노동자의 삶에서 방랑자로 다시 태어남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기질의 탓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레스토랑에서 접시딲이를 하면서도 그는 늘 행복한 ‘해피’로 불렸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익히 알다시피 ‘언제나 즐거운 강아지’를 부르는 이름이다.

자살의 결심으로부터 그를 구출한 것은, 비록 낯설고 새로운 것이지만 그 ‘도시에서 도시에로 이어지는 길’(55쪽), 그 위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어떤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희망보다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의 용기’(58쪽)를 더 강조하고 있다. 결국 그를 구한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 ‘용기’였을 것이다. 괴테가 한 말은 “희망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가 아니라, “용기가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59쪽)는 것이었다고 확인한다. 그 용기로 인하여 그는 같은 길 위에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한 방랑자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자신을 포함한 부랑인 수용소의 사람들은 비록 사회의 적응불능자들이면서 인간 쓰레깃더미(73쪽)들이지만, 그 중에서 퍼낸 한 삽의 진흙에 불과한 그들의 힘만으로도 어메리카를 건설할 수 있다(67쪽)는 자부심을 보인다. 자본가란 어떤 부류로도 나눌 수 없는 각각의 종자(60쪽)이지만, 인간이라는 종자는 때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도 있다(76쪽)고 한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 혐오와 감화력과 같은 특이한 기질들이 어떤 창조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떠돌이 노동자와 부랑자들이 개척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음(75쪽)을 강조한다.자본가의 탐욕(60쪽)을 인식하면서도, 자본가에 대해서는 극히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개별적인 인식의 문제로 파악한 듯 하다.

글의 중간 중간에 언급되고 있는 동양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당대 서양 사회의 표면적 우월성을 중심에 둔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인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103쪽)며,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라고 한 그의 말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그들이 언급하는 동양의 정체는 질문할 충동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정돈된 욕망의 상태였을 수 있다.

스틸턴 박사와의 만남 이후 감귤재배의 백화현상을 해결하고 연구소에 정착할 수 있었음에도 다시 길 위로 나선 그의 선택(96쪽)은 태생적 철학가의 기질을 보여준다. 적응불능자가 인간 사회에서 맡는 특이한 역할에 대해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81쪽)해 했다. 그가 가진 기억은 모두 사람들과의 만남에 관한 것이었으며, 저술하는 생활이 금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85쪽)되었던 것이다. 의문에 대해 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가차없이 이를 외면해 버리는 그의 기질(93쪽)이 진정한 사상가로 여물게 했을 것이리라.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115쪽)이기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완전히 상실감으로부터 회복된 적이 없다(122쪽)고 고백하고 있는 헬렌과의 사랑도, 그 기대를 정당화하는 데에 대한 인생의 소비(121쪽)로 규정하고 서둘러 떠남은 두려움인가. 아니면 도피인가. 사랑인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헬렌보다는 길 위의 자신의 삶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아니 거기에서만 그의 삶이 유일하게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순간 순간의 행복은 참된 것이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자격지심과 의혹으로 가득찬 것이었다(165쪽)고 고백한다. 특이한 것에 직면할 때마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비밀을 찾아내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그의 독특한 기질(155쪽) 탓인지도 모르겠다.

돈의 위력과 관련하여서는 그는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사람은 악의 본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게 없다(161쪽)고 단언한다. 돈이 없는 사회에서는 절대 권력이 지배하게 될 것이므로 선택의 자유가 없고, 무자비한 힘이 분산될 수 없으므로 평등도 없으며, 돈의 힘은 강압이 없이도 조절될 수 있기 때문(158쪽)이라고 한다. 돈이 인간의 포악성을 회유하는 유인책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유통을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는가에 따라 악은 언제든 뿌리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다. 따라서 늘 긴장과 제어를 통해서 돈을 관리해야 한다. 그는 길 위에서 아마도 악의 뿌리까지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운명을 예술가(157쪽)로 규정하며,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적인 예술가의 힘을 동경한 다.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하므로 예술가의 본 모습도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방문객(159쪽)으로서 자신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자위한다. 일, 즉 노동은 호퍼의 철학과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테마이며, 일이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은 일일 뿐이고, 의미있는 생활은 배우는 생활(174쪽)이어야 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술의 습득을 강조한다. 인간의 손에 의한 구원(182쪽)을 신뢰했듯이 그는 자신의 노동에 의한 자부심으로 길 위의 삶을 마감하고 있다. 그는 분명 길 위에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한 ‘성실하고 책임있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사색과 성찰을 통해 짧고도 긴 의문들을 정리해 간 열정적인 사상가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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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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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밀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 그의 아내 헤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와의 관계이다. 밀이 말하는 이 책의 일부의 저자(23쪽) 이기도 한 그녀는 남편의 친구이자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밀의 나이 25세, 그녀의 나이 23세에 만나 20년이 지난 후 남편이 죽고 나서야 결혼을 하지만, 8년 만에 그녀도 세상을 떠난다. 밀의 모든 저작들이 그녀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일정한 경향의 사회적 여론, 특히 도덕적 억압도구로서의 종교적 세력 하에서 하나의 인생이 또 하나의 인생을 만나 동지의식으로 일생을 함께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의 사상의 성숙기(280쪽)에 있어 하나의 동력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때문인지 밀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여론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시 한 것이리라.

이 책에 곁들여진 역자의 해설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밀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1장의 해설에서 밀이 자유를 ‘사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로 나누고, 행동의 자유를 다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단결의 자유)’로 나눈 뒤, 그 어느 경우에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라고 주장하는 점(타자피해의 원리, 28, 284쪽)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역자의 지적대로 밀의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미성숙자나 미개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으며, 당시 영국의 식민지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28, 43쪽)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밀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토마스의 저작에서도 후진사회와 진보사회에 대한 밀의 선입견(265쪽)을 지적하고 있다. 시대의 사상은 시대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의지의 자유(Liverty of the Will)가 아니라, ’시민적•사회적 자유(Civil, or Social Liverty)’라면서, 이는 사회가 합법적으로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것(26쪽)이라고 한다. 또한 역자에 따르면 밀의 시민적•사회적 자유란 정치적 자유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306쪽, 주6)으로 이해한다. 즉 개인적 자아로서의 ‘존재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자아로서의 ‘관계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후자의 경우 밀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권력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한 것이며, ‘정치적 억압’ 못지않게 인간 정신 그 자체를 노예화시키는 ‘사회적 전제’(34쪽)에 대해서 일정한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35쪽)고 주장한다. 이는 밀의 개인적 인생역정과 관련하여 당시의 지배적 도덕률이었던 ‘종교적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함께 강조한 탓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의 권력을 제한해야 하는 이유로서 ‘다수의 폭정’(34쪽)에 대한 우려이며, 이러한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은 피지배자의 정치적 자유나 권리를 인정하거나, 공동체나 집단의 동의를 조건으로 삼는 방법(30쪽)을 제안하고 있다. 밀은 18세기 유럽의 부르조아 중심의 이른바 시민사회에서는 인민에 의한 인민의 통치라는 사상이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대부분의 현실은 최대 다수 인민의 의지이거나, 가장 활동적인 소수 인민의 의지가 대부분의 현실이라고 본 것(305쪽, 주6)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선호와 혐오가, 그 유력한 일부의 선호와 혐오가, 법과 여론의 제재에 의해 일반인이 준수해야 할 규범을 실제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38쪽)라고 한다.

우월한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나라 도덕의 대부분은 그 계급적 이익과 계급적 우월감에서 발생(37쪽)하며, 국가의 간섭은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하려하는지 또는 않는지에 따라 선택되는 것(42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타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의 근거는 ‘자기보호’원리이며, 간섭의 목적은 ‘타인에 대한 침해 방지’(42쪽)이어야 한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만 관련된 경우는 각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주권자로서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43쪽)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자유’는 ‘관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침해할 수 없다. 그것은 오늘날 헌법상의 기본권에서도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1장 자유의 세 영역에서 인간 자유의 본래영역은 가장 넓은 의미의 양심의 자유를 요구하는 의식의 내면적 영역과, 이를 표현하는 자유, 취향과 탐구의 자유, 단결의 자유를 포함(47쪽)하며,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을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의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이다.”(48쪽)라고 선언한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이를 표현하는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분리할 수 없는 것(47쪽)으로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자유’는 ‘관계의 자유’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지만, 그 제한의 폭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제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는 토론없는 진리란 독단이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대론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설령 일반적으로 공인된 의견이 단순히 진실일 뿐 아니라 완전한 진리라고 해도, 그것이 활발하고 진지하게 토론되도록 허용되지 않고 실제로 토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승인자의 대부분에게 그 합리적 근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하거나 느끼지 못하게 하여 일종의 편견으로 신봉하는 것에 그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시대’라는 것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오류는 갖는 것(62쪽)이므로, “잘못을 논박하고 그 반증을 들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의 목적을 위해 그 의견이 옳다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64쪽)이라고 한다. 즉 토론은 일종의 절차의 참여이고, 그러한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한 정의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 정신의 위대한 특성 중 하나는 잘못을 교정하는 능력이며, 그것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가능(65쪽)하다고 한다. 지혜는 열린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자신의 의견을 타인의 그것과 대조하여 잘못이 있으면 시정하여 완성한다는 지속적인 습관이야말로, 그 의견을 실천할 때 회의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자기 의견에 대해 올바른 신뢰를 갖게 하는 유일한 기초(66쪽)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르는 개인이 확실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67쪽)은 토론을 위한 ‘열린 정신’이다. 개인으로서는 ‘열린 마음’으로 지속적인 토론의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사회의 토론을 위해서는 ‘열린 제도’로서 절차 참여의 폭을 높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구성원이 참여하지 않은 폐쇄적 공동체의 결론은 신뢰를 주기 어려우므로 정당성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높다. 역자는 밀이 지혜와 열린 마음을 혼동(311쪽, 주47)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자신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에 있어 자신의 의견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자기 의견의 근거를 알아야 한다(90쪽)고 한다. 또한,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는 모든 문제에서 진리는,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두 의견의 비중차이에 따라 결정된다(91쪽)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견들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하고, 토론을 허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리는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리라.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경우는 도덕률로 정립이 될 것이며, 국가라는 공동체에 있어서는 정의의 길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정의의 전제는 그러한 의견차이, 즉 ‘다름의 인정’이고, 정의의 본질은 ‘다름의 논쟁, 그 자체’이다. 밀은 어떤 사실을 자기 관점에서만 보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92쪽)이며, 진리를 위해서는 임의적으로 반대론을 위한 ‘악마의 변호인’을 설정할 필요도 있다(93쪽)고 한다. 반대론자들에 대한 답변에 불만족함을 증명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그 답변은 만족할만한 것으로 승인될 수 없는 것(95쪽)이며, 바로 정의로운 진리가 될 수도 없는 것이리라.

현실에서의 진리는 대체로 서로 대립하는 것의 조정과 결합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포용력있는 공정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투쟁이라는 거친 방법(111쪽)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정책결정에 있어 토론의 보장을 위한 절차의 제도화와 강제적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 지성의 현 상태에서는 진리의 모든 측면을 공정하게 다루는 기회가, 의견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의 보편성(112쪽)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독교 윤리와 진리에 대하여 밀은 “오로지 기독교적 원천에서만 발전될 수 있는 윤리가 아닌 다른 종류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가 병존하지 않으면 인류의 도덕적 부활을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117쪽)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치생활영역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란 것도 인류의 도덕적 부활을 위한 필요조건들인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 아이는 성숙하면서 또 다른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인류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것이리라. 밀은 “인민이 양쪽의 의견을 듣게 되면 언제나 희망이 있다”(119쪽)고 한다.

제2장이 자유로운 의견의 형성과 표현에 관한 언급이라면 제3장은 그러한 의견에 따른 행동의 자유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그것은 ‘책임과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는 한’이라는 조건(128쪽)을 전제로 한다. 역자는 밀이 “유럽인들의 성격과 교양에 놀랄만한 다양성이 있다는 점” 때문에 동양적인 정체에 빠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19세기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이었고, 이를 일본이 우리에게 적용시켜 이른바 식민지 정체사관을 날조한 이론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127쪽)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개성의 존중을 주장한 점에는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밀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양한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이 부여되어야 한다(129쪽)고 한다. 개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모두 전제적(142쪽)이다. 인간의 정신적•도덕적 능력은, 체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사용되어져야만 개선되는 것(133쪽)이며, 인간의 본성이란 틀에 짜인 기계가 아니라 쉼없이 성장하는 나무(135쪽)이므로, 욕망과 충동도 인간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135쪽)으로서 성격을 나타내는 것(136쪽)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욕망과 충동을 균형있게 조절하는 ‘양심의 능력’일 것이다.

밀은 이 땅의 소금과 같은 소수인 천재의 독창성(143쪽)을 강조하며, 군중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단순한 불복종도 사회에 대한 하나의 봉사(148쪽)이며, 오히려 그러한 파격이 없는 시대를 중대한 위기(149쪽)라고 표현한다. 개량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의 정신인 것은 아니며, 진보의 원칙 그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형태든 개량을 사랑하는 형태든,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적어도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154쪽)고 한다.그러므로 그는 분명 당시의 진보주의자인 것 같다. 동양의 정체는 개성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며, 그들에게 있어 개량의 기회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서만 가능하다(157쪽)고 하여 외세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개성의 발현으로서 자유의 확장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모순된 점이 보인다. 개성의 발현이란 주로 독창성일 경우가 많겠지만, 연대성에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자유란 인식한 만큼의 영역일 것이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자유로 포섭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제4장 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타인과 관련되는 부분과 타인과 관계되지 않으며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부분으로 나누고, 전자의 경우는 상대적 자유의 영역으로, 후자의 경우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으로 설명한다. 전자의 경우를 ‘존재로서의 자유’, 후자를 ‘관계로서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행동의 절대적 주권자는 개인(165쪽)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5장 원리의 적용에서 밀은 교육의 다양성과 배심재판,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국가의 간섭이 지나치면 관료제와 같은 더 큰 폐해가 나타나므로 권력의 분산을 주장한다. 국가의 제도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관계의 자유’에 대한 간섭의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복지’ 사이에서 ‘정의롭게 합의된 비례의 원칙’에 따라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 교육의 한계와 관련하여 밀은 국민 교육의 전부나 대부분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에 대해 반대(225쪽)하면서, 학위나 과학적 또는 직업적 지식에 대한 공적 증명(226쪽)이 필요하며, 그것은 스스로 시험에 합격한 자 모두에게 부여되어야 하지만, 그 증명은 여론에 의해 부여되는 존중에 그쳐야 하지, 경쟁자들과 다른 이익을 부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228쪽)고 한다. 우리 사회의 교육체계도 ‘순수학문의 길’과 ‘실용학문의 길’을 구분하고, ‘전자의 학위’와 ‘후자의 자격’을 명확히 구분하여 개인과 사회가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들을 제도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우리의 현행 법제상 로스쿨을 졸업을 해야만 변호사시험을 볼 수 있는데, 로스쿨의 학비는 이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경제적 능력)을 기준으로 일반인을 처음부터 불평등하게 차별한다. 그러므로 일단은 순수한 자격시험으로서의 사법시험을 계속 존치하는 것이 누구나 접근 가능한 기회의 보장으로서 직업선택이라는 개인의 자유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교육에 관한 한 국가의 역할은 경제적 지원의 영역에 국한하여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이며, 모든 공인자격의 관리도 산업인력관리공단과 같은 공적기구를 통해 일률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역자는 밀의 자유는 주로 ‘사상의 자유’를 말하지만, ‘재산의 자유’에 있어서는 상당히 제한을 가하고, 노동자의 기업 소유와 경영, 공동생산조합, 그리고 조세에 의한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자치사회주의자’(9쪽)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점진적 사회주의자로서 영국에서 형성된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기초가 되었(282쪽)으며, 나아가 사회의 도덕적 획일성을 유지하려는 법적 강제에 대한 그의 확고한 반대와 그런 시도로부터 시민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현대의 어떤 진보적인 사고나 정책보다 앞서 있어서 ‘아나키즘적 자유론’(9쪽)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개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시장경제의 장점을 유지하는 사회가 그의 아나키즘적 유토피아(10쪽)라는 것이다. 밀이 생산자와 판매자의 자유보다는 구매자의 자유를 중시(206쪽)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주의에 대한 접근은 자본가인 생산자와 판매자의 입장보다는 구매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다가서야 하는 것이 보다 정의로운 접근의 방향일 것이다.

오늘날의 헌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생활규범으로서의 헌법의 기능을 인정함으로써 기본권의 국가에 대한 효력 뿐만 아니라, 제삼자에 대한 효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행 헌법상으로도 ‘사상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의 한 내용으로 보장되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열거되지 아니한 기본권의 존중’ 등을 그 근거로 한다. 헌법재판소도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에서의 양심은 단순한 윤리적 선악 판단보다도 더 넓은 보호범위를 지니며, 세계관ㆍ주의ㆍ신조 등까지 포함”한다(89헌마160)고 하고 있다. 이는 밀의 자유의 개념이 우리의 헌법현실에도 반영되고 있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유론을 ‘아나키즘적 자유론’이라고 하는 이유도 사회적 강제와 간섭에 대한 쉼없는 개인의 자유 확장을 요구하는 그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밀도 일종의 ‘고민하는 개량주의자’가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그 개량의 대상과 폭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다양하게 흐르는 것이리라. 역사는 오늘도 쉼없이 ‘개화’하고 있고, 어제는 이미 오늘의 관점에서 ‘미개화’인 것이다. 역사의 진보는 ‘어제의 야만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 흐름의 방향에 참여하고자하는 대중의 의지를 동시대인의 최대한의 공감으로 방해하지 않고 장려하는 것이 공동체인 국가로서의 정의로운 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또한 ‘문화시민’의 ‘문화국가’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자가 옳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자가 존재할 필요가 있으며, 반대자들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허용이 자연스럽게 진리를 발견케 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의 근본은 인간양심의 발현인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있으며, 그것의 제도화, 특히 반대자들을 위한 참여의 제도화가 ‘정의로 가는 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자유의 의미는 ‘모든 형식의 동행’인 까닭이요, 그것이 다양한 개성의 조화를 도모하는 다양성 회복의 첩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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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용산참사를 계기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문을 제목으로 하여 시작되는 이 책의 내용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훌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는 명제 하에 “아직 대한민국이 ‘훌륭한 국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7쪽)라는 전제로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으며, 독자와의 깊은 대화가 집필 목적(10쪽)이라고 한다. 전제로서의 당위라면 “국가는 훌륭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국가가 그래왔던 것처럼 더 이상 ‘국민의 적으로서의 국가’를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적, 경험적 필연으로서의 각오처럼 느껴진다.

국가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 먼저 홉스, 마키아벨리, 로크, 애덤스미스, 루소, 밀, 소로, 마르크스, 피히테, 톨스토이, 르낭, 라스키, 스코치폴, 카를포퍼, 하이에크, 케인즈, 플라톤, 베블런, 아리스토텔레스, 니버, 칸트, 베버, 베른슈타인, 맹자, 김상봉, 이남곡 등의 국가관 또는 그 사상적, 이론적 배경과 견해들을 언급하고 나서, ‘훌륭한 국가’에 대한 개념정의(284쪽)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책의 두드러진 장점은 개별 사상가들의 심오한 사상과 그 철학적, 시대적 상황 등을 이해하기 쉽게 그 원형을 중심으로 비교서술(291쪽, 주1)하면서, 끈김없이 그 연결고리를 제공하여 독자들이 국가의 본질에 거리낌 없이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수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고민의 흔적들이다.

저자는 두려움을 정서적 기반으로 여전히 유효한 홉스의 국가주의 국가론에 의존하게 될 우리의 현실(43, 112쪽)을 거듭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국민의 평화와 안전외 공공의 복지를 추가한 로크의 자유주의 국가론을 설명하면서 권력의 정당성(51쪽)을 강조한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애덤스미스가 말하는 국가의 실체는 보수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자유’와 진보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공공재’의 양면을 가진 조화론(56쪽)이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루소는 급진적 자유주의 국가론을 전개하면서 국가의 해체 또는 혁명으로 사회계약파기의 가능성(57쪽)을 거론하면서, 국가와 정부를 엄격히 분리(58쪽)했다고 전한다.

어떤 경우에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의 영역을 강조한 밀의 자유론을 언급(63쪽)하면서, 헌법 제37조 제2항의 본질적 내용의 침해금지를 강조(64쪽)한다. 악을 저지르는 국가에 대하여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를 위해 저항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단순한 자유주의라기 보다는 더 나아간 평화주의와 생태주의(70쪽)라고 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 오늘날의 지배적 담론으로서 ‘시장형 보수’(70쪽)로 이름하고 있지만, 출현할 당시에는 진보적이었으며, 이는 사회적•정치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68쪽)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주의 국가론과 자유주의 국가론이 공히 국가를 하나의 공동사회로 보고 있음에 반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은 마르크스의 국가관을 소개(75쪽)하고 있다. 즉 국가는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도구적 국가론’(77쪽)이 그것이다. 이른바 ‘종말론’이 ‘구원’을 갈구하기 위한 도구라면, ‘역사적 종말’을 예고하는 ‘마지막 혁명’은 역설적으로 소외된 자의 자유에로의 희구, ‘청년 마르크스의 소망’(83쪽)의 반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은 정의실현을 국가의 목적으로 한 ‘목적론적 국가관’과 철인정치를 제시(99쪽)했으나, 그의 정의는 계급특권을 인정한 ‘국가의 정의’이지, 계급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오늘날의 ‘국민의 정의’는 아니었다. 카를 포퍼의 제안처럼 민주주의는 악을 최소화하기 위한 부작용이 가장 적은 정치제도(109쪽)임을 알고 주권자로서 참여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으며,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108쪽)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는 ‘국민소환제도’는 채택되고 있지 않다.

애국심의 두 얼굴(115쪽)과 관련하여 피히테의 ‘살아있는 독일어’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적 찬양(119쪽)과 톨스토이의 인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유해한 허위의 감정이라는 비판(127쪽)을 소개하며, 궁극적으로 르낭의 공동체 귀속에로의 개인의지를 강조(131쪽)하고 있다. 이럴 경우 애국심은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독점적 수사(137쪽)의 혐의를 벗게 된다고 한다. 르낭의 입장에 서면, 국가라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의지들의 집합’으로 형성되어야 정의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정의는 플라톤의 정의와는 다른 것으로서, 어떤 실체의 현상으로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과정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국가를 변화시키는 두 가지의 방법, 즉 혁명과 개량과 관련하여 라스키의 혁명의 조건을 설명(145쪽)하고, 스코치폴의 혁명 후의 국가의 모습(149쪽)을 언급하며, 국가는 사멸하지 않는다는 점에 방점을 둔다. 톨스토이의 ‘굴뚝비유’(294쪽 주10)를 들면서 혁명이 권력기관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는 절망을 전하면서 각자가 스스로의 욕망을 줄이는 종교적 해결책을 모색(152쪽)했다고 한다. 굴뚝은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된다. 다만 현실적 해결책으로서는 부의 상층부 집중현상을 다소나마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적 수양이외에도, 외적 강제환기장치(송풍기, 151쪽)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정의(正義)란 정의(定意)하기 곤란한 것이므로, 정의(正義)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카를 포퍼의 견해처럼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것(155쪽)이 우선일지도 모른다. 그는 혁명을 동원하는 유토피아적 공학이 아니더라도 점진적 공학으로서 ‘민주적 간섭주의’로서 ‘방만한 자본주의’를 개선해 나갈 수 있다(156쪽)고 보았다. 또한 ‘자유의 역설’을 인정하면서 마르크스와 같이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자멸한다.”(157쪽)고 경고하고 있으며, 모든 폭력혁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혁명은 정당하다고 인정했다(160쪽)고 한다.

그러나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구별이 명백한 것도 아니고, 혁명의 결과가 애초에 바라던 바와 다르더라도 현실적으로 ‘사후에 소환되지 않는 혁명’은 ‘성공한 혁명’으로서, 그것을 정의(正義)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환되지 않는 혁명’은 ‘동시대인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후에 소환되는 혁명’은 명백히 ‘실패한 혁명’으로서 ‘불법’일 것이다. 그러한 불법은 단시간내에 드러날 수도 있지만, 장구한 세월의 성찰을 요하기도 한다. ‘정의로운 국가’라 하면 바로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소환제도’를 만드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현실적으로는 각종의 특별법들이 때로는 소환을 위한 도구로도 이용되지만, 소환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널리 활용된다. 문제는 그러한 입법의 과정에 얼마만큼 민의가 왜곡되지 않고 날것으로 생생하게 반영되는 소통의 제도적 도구를 가졌는가에 있을 것이다.

전체주의를 혐오한 포퍼와 달리, 하이에크를 언급하면서 ‘겁에 질린 자유주의자’(164쪽)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국가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지만, 자유라는 이념과 시장이라는 비인격적 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 셈(175쪽)이라고 비판한다. 개인의 자유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이다. 전자는 처음부터 계약의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계약내용으로 삼을 경우에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반한다. 후자는 ‘관계로서의 자유’이며, ‘제도로서의 자유’이다. 그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와는 달리 책임을 배제할 수 없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어서 이미 ‘공공재’다. 그러므로 사회계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후자의 경우로 제한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공공재로서의 한계를 갖는 것이다. 그것을 ‘내재적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이에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인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자유의 전부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혁명과 개량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개량의 길’이 막힌 곳에서 ‘혁명의 길’이 열린다(181쪽)고 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문명국가의 길은 하이에크의 길이 아니라, 포퍼의 길이라면서, 이 길이 열려있는 곳에서는 마르크스의 길이 열릴 가능성은 없다(182쪽)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개량을 시도(182쪽)할 것을 권고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제도화’(민주적 정당성), ‘참여의 제도화’(절차적 정당성), ‘개방의 제도화’(개방적 정당성)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열린 길 위에 있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그 길은 결핍을 보호하고, 탐욕을 제어하기 위한 공동의 가치를 세우는 일에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로 공동체의 의사형성에 가담하여 협력하는 길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이념형 보수, 자유주의 국가론은 시장형 보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진보의 국가론으로 분류하면서, 자유주의 국가론의 다양성의 가능성(185쪽)에 언급한다. 베블렌은 “인간이 만든 제도와 인간 특성에서 일어나는 진보는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이다.”(186쪽)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에서 자연은 목적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으며, 모든 학문과 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선이고, 정치의 선은 정의(203쪽)라고 한다. ‘국가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같은 것’이라는 데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입법자가 할 일은 국가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훌륭한 삶과 행복에 참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203쪽)이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일반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국가론과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사이에서 방황(200쪽)하지만, 진보자유주의자의 국가론은 자유주의 국가론의 토대 위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결합한 이른바 ‘미덕국가론’ 또는 ‘선행국가론’이라 할 수 있다(206쪽)고 한다. 선을 향하는 국가의 한 현상형태, 또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복지국가론(208쪽)은 진보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느 국가론과도 결합(209쪽)할 수 있으며, 소위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논쟁은 소모적인 ‘허위논쟁’(211쪽)에 불과하다고 한다.

니버에 따르면 도덕적 이상인 ‘개인의 이타성’과 ‘사회의 정의’는 서로 배타적인 것도, 절대적으로 모순인 것도 아니지만, 조화도 어렵다(223쪽)고 한다. 그리고 정의란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채택(223쪽)한다. 그리고 그런 정의의 실현방법으로서 ‘헌법’을 들고 있다.(226쪽) 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는다(232쪽)면서, 경제권력 또는 시장권력의 배분과 관련하여 정의의 조건(233쪽)으로 기회의 공정, 경쟁의 공정, 주체의 공정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조건은 비단 경제적 시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일반적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를 앞서 언급한 ‘민주적 정당성’,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진보자유주의자’(242쪽)로 자신을 규정한다. 또한 저자가 명명한 ‘선행국가’란 한마디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정의, 선, 미덕’을 행하는 국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진보자유주의의 선행국가’만으로 ‘착한 국가’가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선과 악은 분명히 존재하고(219쪽), 또 칸트의 선은 행복과 도덕의 일치이며 결합(254쪽)이라 하더라도, 정작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대답은 절박한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아 ‘착한 국가’의 모습은 여전히 희미하다.

베버는 국가의 본질적 특성이 폭력(256쪽)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좋은 정치인의 자질을 거론하며, 책임의식(259쪽)을 강조한다. 칸트의 ‘동기’가 아니라 ‘과정과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베버의 견해(261쪽)가 정의로운 국가의 실체에 더 부합할 수 있다. 개인적인 선의 영역에서는 동기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사회적 정의의 영역에서는 ‘과정과 결과’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이 중요하다. 또한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내포한다.(270쪽) 책임없는 자유란 없다.(271쪽) 여기서의 자유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이다. 따라서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라는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무엇인가?’(223쪽)의 물음보다 ‘어떤 정의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보다 더 명백한 정의의 실체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당위로서의 헌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인 사회적 존재로서의 국민은 끊임없이 ‘정의의 방식’에 대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정의’도 고정된 실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쉼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변질’의 위험을 안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것, 그것이 정치를 통해서 선을 추구하는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273쪽), 즉 ‘정치인’의 운명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국가’의 운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인의 실패’는 ‘정부의 실패’이지 ‘국가의 실패’는 아니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정치인에 의한 정부로 인한 국민의 불행과 역사적 퇴행을 방지하기 위한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서는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에 입각한 정치를 해야하며, 특히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연합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결론적으로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283쪽)고 한다.

자유는 두가지의 측면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바로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다. 정치를 ‘공동체의 조직과 구성, 그 작용에 관한 관계와 협상의 기술’로 정의한다면, 정치영역에 관계되는 자유는 개인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이다. ‘개인적 존재로서의 자유’가 신념의 영역이라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는 책임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치는 신념보다 책임, 즉 동기보다 과정과 결과가 중요하다. 정치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국가관의 실패는 바로 이점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혼동 또는 경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훌륭한 국가의 조건으로 안보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 복지국가의 네가지를 나열하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그 모든 것을 체현하는데 필요한 절차와 제도를 이미 가지고 있다(286쪽)고 한다. 그러면서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시민들이므로, 좋은 정당, 민주적인 정치, 효율적인 행정을 실현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참여(285쪽)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시민의 참여의 역할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필요한 절차와 제도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의 실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실패’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실패를 명확하게 인식하고서도 임기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제도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한데도 과잉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방식이 부족한 것도 현실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에서는 그 어떤 권모술수도 국민의 의지를 이기지 못한다(287쪽)는 저자의 믿음은 배반당할 위험이 높아 보인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실제로 두 번의 배반을 당했다. 저자는 책을 쓰면서 정치학자 또는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의 시각을 유지(286쪽)했음을 고백한다. 소통과 교감의 필요성(287쪽)에는 공감하며, 그가 정치인으로서 필요한 책임윤리를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음도 인정한다.

정치의 선한 목적인 정의란, “최적의 사유습성이 자연선택되는 과정에 공동체 구성원이 어떤 사항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어떤 제도적 절차에 의해 구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정의’라 함은 ‘참여의 확대와 그 절차의 보장’으로, ‘선’이라 함은 ‘자기의 유리보다 다른 사람의 불리를 먼저 고려하는 도덕적 경계’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영역인 ‘선’을 요구하기는 어렵더라도, ‘개인적 선의 사회적 제도화’가 ‘사회적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만으로도 부족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보다 ‘더 나은 정부’, 즉 ‘도덕의 제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늘 ‘길 위의 국가’가 어떻게 ‘착한 얼굴’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본다. 그러므로 도덕의 경계를 넘어 제도적으로 ‘정의로운 국가’, 즉 ‘착한 국가’를 형성하는 방법은 국가의 조직과 구성, 그 활동에 있어 가능한 한 많은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참여의 제도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치’란 ‘공동체의 조직과 구성, 그 작동에 관한 관계와 협상의 기술’이다. 그것이 정의로운 ‘정치’이기 위해서는 ‘민주적정당성’, ‘절차적정당성’, ‘개방적정당성’을 그 내용으로 하여야할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소외와 탐욕으로부터 다수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소외로부터의 보호’는 국민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고, ‘탐욕으로부터의 보호’는 과잉소유로 공동체질서의 조화를 해치는 소수세력에 대한 규제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국가는 ‘결핍된 국민’과 ‘과잉의 국민’의 두 부류의 이질적 구성원을 가진다. 국가는 ‘결핍된 국민’으로부터 멀리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우선적으로 ‘정부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실패’가 있더라도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다면 ‘국가의 실패’를 논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것을 방치할 경우 ‘국가의 실패’는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오늘날 양극화된 ‘결핍된 국민’의 소외를 배려하고, ‘과잉의 국민’들의 탐욕을 제어하면서 조화로운 동행을 모색해야한다. 주권행사자로서의 모든 국민의 국가권력에 대한 자유롭고 평등한 접근의 보장, 그것이 바로 ‘민주적 정당성’의 주된 내용이다.

‘국가의 얼굴’은 ‘개인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국가를 ‘국민의 얼굴’로 인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국가의 얼굴’을 만드는데 쉽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접근이 까다롭게 통제되거나, 소통되지 않는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구성원의 국가’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더 이상 개별 ‘국민의 얼굴’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자의 얼굴’이거나, ‘지배집단의 위장’에 불과한 것이다. ‘국가의 얼굴’을 만드는 ‘국민의 얼굴’은 ‘개인적 존재로서의 국민’의 얼굴이 아니라 당연히 ‘사회적 존재로서의 국민’의 얼굴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의로운 정치의 기술’에 따라 다양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렇더라도 ‘국민이 국가에 적응’하도록 강제해서는 안되며, ‘국가가 국민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조직의 구성부분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선택가능하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개방적 정당성’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각자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 더 나은 정부를 얻을 수 있는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206쪽)이라고 한다. 여기서 ‘더 나은 정부’이외에 한가지 더 강조할 점은 밝혀야하는 ‘개인의 책무’도 있지만, 밝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길 위의 국민’은 정작 밝히고 싶어도 밝히지 못하는 암울한 상태에 있는 경우도 많다. 개별 국민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한다면 구체적인 국가작용에 대한 접근방식으로서 ‘소통의 제도화’가 시급하다. 그것은 ‘절차적 정당성’이다. ‘민주적 정당성’은 ‘개방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당성’이 전제될수록 더욱 강화되는 것이리라.

오늘날의 ‘시대상황이라는 관계’ 속에서는 어느 국가론도 처음부터 목적론적 고려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이 국가의 목적에 치우친 견해라면, 자유주의 국가론은 국민의 자유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견해이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의 목적인 통치의 행태와 국민의 목적인 자유(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유)의 실현이 동등하게 제도적으로 소통하는 ‘동행국가’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동행국가’로서의 정당성은 ‘개방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선로로 하고 ‘민주적 정당성’을 침목으로 할 때에만 ‘결핍된 국민’과 ‘과잉의 국민’을 아우르는 이른바 국민 모두의 ‘정의로운 국민국가’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갈래의 철길이 침목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어떤 기차도 그 위를 안정적으로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선로의 길이가 길고, 받치고 있는 침목이 많을수록 분명 정의로운 그 목적지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 기차에는 ‘결핍된 국민’과 ‘과잉의 국민’이 모두 타고 있다. 그 국민은 구별되는 각 개인일 수도 있지만, 각 개인 속의 두 본성(소외와 탐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외면할 수 없는 동행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는 소외의 길 위에서는 가속의 통치술을, 탐욕의 길 위에서는 제어의 통치술을 ‘정의롭게 동원’할 수 있는 ‘유기적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동행국가론’의 실체는 ‘유기적국가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장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새는 겉으로 보기에 좌우의 날개로 날아가는 듯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때마다의 ‘바람’에 따라 좌우의 날개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의 ‘고민’으로 난다. 그러므로 그의 비상(飛上)은 그런 생존의 ‘몸부림’인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정의롭기를 바라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원하는 한 마리의 새라면, ‘고민의 몸부림’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 고민은 ‘국민과 함께하는 고민’이어야 하며, 구분과 단절이 아니라 아울러 함께하는 고민의 방법은 다각적인 ‘소통의 제도화’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정의’를 목적으로 하지만, 그 내용은 ‘참여의 확대와 그 절차의 보장’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적 정당성과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한 ‘열린 국가’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국가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국가와 국민은 더 이상의 ‘적’이 아니라 함께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연인’이 되는 지름길이다. 에리히프롬에 의하면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동행의 본질’은 ‘서로 참여하는 사랑’이다. ‘정의로운 열린 국가’만이 국민으로서의 개인을 그런 행복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며,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사람사는 세상’에 더 가까운, 더 나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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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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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이 ‘후불제민주주의’인 것은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4쪽), 민주주의를 위한 비용을 아직 국민들이 충분히 지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부로 구성된 책의 내용은, 제1부에서 ‘권력의 당위’, 제2부에서는 ‘권력의 실재’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당위로서의 헌법규범’과 ‘실재하는 헌법현실’ 사이의 갭에 관하여 저자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고민들의 기록이자, 대안의 제시이다.

그러나 헌법이라는 것이 ‘국민의 활동과 국가의 작용에 대하여 합의한 동시대인의 공감하는 가치질서’이자, ‘시대정신을 시대적 처방으로 최고 규범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본다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남아있는 추가적인 비용이란 어떤 것들일까. 그것은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다수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참여의 의지’로 시작되며,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완결(17쪽)되는 것이리라.

당위로서의 규범과 실재로서의 헌법현실의 갭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어 온 것인 한, 그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차이의 존중’, 그 ‘다름의 인정’이 정의로운 길로 가는 첫 관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권력의 실재, 즉 헌법현실은 어찌보면 더도 덜도 아닌, 꼭 그 만큼의 값을 치룬, 그 만큼의 댓가다.

저자는 현실을 ‘문화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맹복적 추종의 ‘진화적 본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성적 사유의 산물인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에 ‘진화적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44쪽)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늘 당위를 현실보다는 앞세운다. 그러므로 공백은 불가피하며,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되풀이 한다. 따라서 지금 당장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 그릇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상식과 교양이 부족한 지도자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책임한 주권자’(53쪽)라고 한다. 자유는 분명 책임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제도로서의 자유’는 처음부터 무한정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자유란 때때로 ‘도피의 대상’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뜻은 그럴수록 점점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일 것으로 판단된다.

헌법상 행복추구권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고,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음에도 개인의 표현의 자유들은 점점 위축되고 있으며, 검열의 폭은 확대(38쪽)되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헌법 제1조 제2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민의 직접적 주권행사, 그 참여의 보장(직접민주주의요소의 확대도입 등)은 제한적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대한민국이 ‘아직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한다.(59쪽) 그러나 헌법적 정당성(민주적 정당성, 절차적 정당성, 개방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존재하는 헌법현실이 아니라면, 민주공화국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다만, 지금은 ‘이만큼’의 민주공화국일 뿐이다. 물론 저자도 자신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함이므로, 그 아쉬움의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양성에 대한 관용(71쪽)도 ‘존재로서의 당위’를 위해서 더욱 그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진보와 보수는 그 자체로 선과 악인 것은 아니지만,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68쪽)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합리적’인 진보와 보수라면 단순히 추구하고 추종하는 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분열로 망하는 진보’와 ‘부패로 망하는 보수’(69쪽)의 공존, 그것이 망하는 현실의 대부분의 실체인 만큼, 사전에 조화로운 동행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에게 경쟁은 불가피한 것(86쪽)이며, 민주공화국은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한 문명의 건축물(92쪽)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가 자유와 평등을 ‘두 기둥’으로 존립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라면, 국가는 어느 하나를 전면적으로 배척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은 듯 위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은 분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으로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사회’는 이미 자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인 까닭이다.

저자는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결코 ‘복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좋은 복지정책은 경제적 번영을 추동하며, 경제적 번영은 더 좋은 복지정책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99쪽)이라고 하면서 둘 사이의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현상에 방점을 둔다. 서민들을 위한 ‘기초 소득의 보장’이 그들의 구매력을 높여 기업들에게는 ‘기본 이익률을 보장’함으로써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국민연금법의 개정과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한 것은 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284쪽)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구속하는 것(117쪽)이며, ‘표현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 범위와 방식을 정하는 것도 권력자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어야 한다(127쪽)고 강조한다. 법률상 신분제도는 용인될 수 없지만, 경제학적•사회학적 의미의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128쪽)면서, ‘선출되지 않은 시장권력’(129쪽)(특히 언론 등)에 대한 특수신분계급의 실재를 우려하고 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어린이의 인권’(145쪽)을 존중하고, 학교교육에서의 ‘체벌금지’(148쪽)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학교인권조례’가 교육자치단체별로 제정 논의 중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규제’나 ‘자율’이냐의 어떤 결론보다는 그런 결과에 이르기까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자발적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적 제도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본다. ‘맞을 짓’을 했을 경우에는 체벌을 가하되, ‘맞을 짓의 여부’판단과 ‘체벌의 정도’가 일방통행식이어서는 민주적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면적인 집단적 소유는 반드시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우려로 사유재산제도를 옹호(153쪽)하면서도,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 영토와 통일조항의 모순(155쪽)에 대해 언급하면서, 증오와 불신을 존중과 이해로 바꾸고, 적대감과 분열이 있던 곳에 공존과 화합의 정신을 싹틔운(159쪽) 지난 정부의 업적을 너무 쉽게 봉쇄해 버린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모든 결정은 같은 절차에 따라 변경될 수 있어야 함(164쪽)에도 불구하고, ‘대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장벽에 가려진 것들이 있다. 선출대상의 확대와 소환대상의 확대, 임기의 단기화, 선거제도의 조정, 전자투표활성화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184쪽)인 언론의 횡포와 관련하여 일정규모 이상의 언론에 대해서는 그 공적기능에 어울리는 투명하고 공정한 공적개입이 필요한 여지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유란 ‘스스로 감당하되 남용하지 않을 만큼의 자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은 그 누구도 정파를 초월하지 못한다.”, “대통령은 정파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운영한다.”(198쪽)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현실, 즉 권력의 실재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정당정치의 제도하에서 선출된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대통령’이어야 하지 않을까. 당위로서의 헌법규범은 대통령의 정파초월을 요구한다고 본다. 다만, 국민은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해서도 안되고, 대통령은 왕처럼 행동(211쪽)해서도 안된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영혼은 믿는 자에게만 보인다.”(261쪽)면서,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불러 내지 못하는 대통령과 장관의 책임을 강조(262쪽)하고 있다. 또한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파트단지나 주택가에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을 기획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296쪽)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도 새롭게 정보로부터의 소외계층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도 ‘작은 도서관 사업’은 정말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사업계획승인대상 공동주택의 경우는 ‘작은 도서관’이 주민 복리시설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국민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 중의 하나로 ‘무지’(313쪽)를 들면서, 정당의 민주화를 강조(314쪽)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사과하면서 정당개혁운동가로서의 희망(319쪽)을 피력하고 있다. 보수정당의 이념적 옹졸함과 천박함, 진보정당의 이념적 편협함과 경직성을 아울러 비판함과 더불어 선거제도의 개편을 그 대안으로 제시(324쪽)하고 있다. 저자의 견해처럼 결선투표없는 대통령선거와 비례대표비율이 낮은 국회의원소선거구제가 상황을 더욱 비관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비례대표비율의 제고나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저자는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그 ‘헌법애국주의자’(103쪽)이며, 고민하는 ‘자유주의자’(153쪽)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한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 저자는 ‘진보자유주의’ 또는 ‘사회자유주의’로 규정(236쪽)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사회자유주의정권’(337쪽)으로 규정하고, ‘중도통합 또는 중도진보적 이념성향’(339쪽)을 내용으로 한다고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구체화하는 조화로운 처방과 소통’이며, ‘자유는 모든 형식의 동행’이라는 사실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모의교도소실험의 결론인 악한 행동을 만드는 세가지 요소로서 사람, 상황, 그리고 시스템(368쪽)을 들고 있다. ‘썩은 사과상자’에 들어가면 ‘멀쩡한 사과’도 ‘썩은 사과’가 된다(368쪽)는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상자를 바꾸는 일, 그것은 바로 ‘제도개혁’일 것이다. 시스템으로서의 ‘제도화된 악’(373쪽)의 개혁은 헌법개정까지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현행 헌법의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아직도 남아있는 그 공간만큼의 여지들일 것이다.

현실은 끝없이 ‘학습기간’이라는 시간의 비용을 치를 수 밖에 없으며, 저자의 지적대로 지금은 오히려 ‘문명의 역주행’(110쪽)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과속’과 ‘역주행’의 험로, ‘민주주의’라는 ‘끝없는 길’ 위에서 정산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되지 않은 ‘선의 연대’(374쪽)로서 ‘선을 제도화’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명목과 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몸에 꼭 맞는 ‘맞춤 옷’처럼 편안한 헌법아래서 대중의 안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으로 인한 가슴설렘(33쪽)이 비단 저자만의 설레임이 아니라, 모두의 설레임일 때에는 다수의 인내는 이미 한계상황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청춘의 설렘’이 그 ‘짧음’에서 오는 것이라면, ‘헌법의 설렘’은 아마도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 있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다. ‘희망사기’와 ‘희망고문’이라는 편견의 벽을 넘어서는 방법도 ‘구체적 실천’의 문을 통하는 것이리라.

헌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사람사는 세상’이란 결국 ‘당위로서의 헌법규범’과 ‘실재하는 헌법현실’과의 갭, 그 최소화에 있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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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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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그것이 어머니의 인생이든, 본인의 인생이든, 딸의 인생이든, 거기에는 분명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해방에 대한 갈망’인 듯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절을 배경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첫사랑인 그 사람의 흔적을 추적한다.

자신의 인생은 비록 그런 위기의 사회 속에서도 비교적 평탄하게, 어찌보면 손쉽고도 대개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아온 듯 하다. 미군부대에서의 직장생활이라든가, 무능력한 첫사랑을 버리고 안정적인 은행원과의 결혼 등이 그 주된 증거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구슬같은 처녀’이기를 원하는 ‘일상 속의 여자’였다.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것도, 주인공은 꽤나 심각하게 그 갑갑함을 호소하고 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리 충격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아마도 그 당시 대학물까지 먹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흔쾌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어떤 불만의 강도에 비례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화의 차이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아니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내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얕보고 동화는 물론 이해까지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153쪽),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야말로 나에게는 족쇄였다.”(162쪽)

신념이든, 취향이든, 취미든지 간에 인간은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그것의 근본적인 동인은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삶의 조건’을 이루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인공의 일탈은 이별과 결혼을 한 후, 우연한 첫사랑과의 재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재회 이후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그녀는 귀여움을 잃은 채로 첫사랑의 추억은 박살이 난다.(289쪽) 결국 그것은 일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것은 첫사랑의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당혹감’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영역 속에서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이미 세월에 실려 온 각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우리들의 시간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벌레들의 시간이었을까.”하고 되묻는 독백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이다.

첫사랑은 ‘복기’가 아니라, 어찌보면 ‘다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 속에서 전체를 보는 눈을 뒤늦게 갖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처음부터 ‘벌레들의 시간’(201쪽)이나 ‘벌레들의 짓’(223쪽)은 없었으며, 그 전체가 ‘각자들의 시간’이었고, ‘각자들의 짓’이었음을 아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일 뿐, 누구를, 무엇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처럼 아이를 넷이나 둔 엄마로서, 철저히 가정을 중시하는 책임감있는 남편을 둔 여자의 일생은 분명 ‘행운’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 ‘가부장의 가치’(248쪽)를 존중하고, ‘믿음이 위안’(249쪽)이 되는 그녀의 신념은 분명 보수적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간다. 또한, 그녀는 첫아이의 출산으로 뺏길 ‘자신의 자유’와 ‘그 작은 것의 살려는 의지의 집요함’(242쪽)에 섬뜩하기도, 측은하기도 한 그런 이기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주인공에게서 찾은 ‘그 남자의 집’은 마지막 포옹처럼 담담하게 완벽했던 결별이었고, 오히려 양공주로 살았던 춘희의 그리움이 어찌보면 ‘그 남자의 집’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그녀의 마지막 안부전화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아무것도 안 그리워하면 무슨 재미로 살겠수.”(306쪽) 사람들에게는 ‘그리워할 대상의 존재가 삶의 필요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행복’이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리지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아니라, 지울 수 없는 기억 속 갈망들의 확인이 아닐까 싶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엔 그 뚜렷한 확인을 위한 자신들의 기억 속의 희미한 ‘집’들이 있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으로부터 다시금 되돌아 서 보길 원하는 ‘자신들을 위한 집’이다.

그 ‘집들로 부터의 해방’은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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