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마리아인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시리아인과 유대인과의 사이의 혼혈로 태어난 종족을 말하며, 유대인으로부터는 이민족으로서 배타적으로 차별 취급되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강도피해를 구해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에 빗대어 진정으로 어려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해 묻고 있으며, 착한 사마리안법이란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 적극적인 구호의무를 이행할 것을 강조하는 규범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선한 사마리안 법에 해당하는 응급의료법의 경우, 외면에 대한 처벌규정은 없고 선한 취지의 행위를 장려하기 위한 면책규정이라는 점에서 본래의 착한 사마리안법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의 저자도 결국은 나쁜 사마리안들에게 그들의 개명된 이기주의(333쪽)와 도덕적 의무(335쪽)에 호소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노엄 촘스키의 추천사(6쪽)에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그동안 ‘세계화’의 이름으로 정통 경제이론을 내세운 ‘경제발전의 원리’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교리인지를 폭로하면서, 사악한 삼총사(IMF, 세계은행, WTO)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의 경고는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의 부자나라들은 신자유주의에 배치되는 높은 관세와 보조금 정책 등으로 부자가 되었음에도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신들이 했던 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할 것’(35쪽)을 강요함으로써 곤경에 처한 개발도상국들을 도와주기는 커녕 이용만 하려는 속셈을 가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다. 
  


1945년 이후의 세계화의 진실은 통제된 세계화의 시기였던 1950~1970년대가 성장이나 분배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반면에, 1980년대 이후 급격하고 통제되지 않은 최근에 있어서는 성장과 안정, 분배의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고 적고 있다.(54, 57쪽) 196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의 경험도 경제발전의 관점에서는 적절히 통제된 성공적인 사례로 기술되고 있다.

부자나라들의 의도는 그들의 영향력으로 그들이 원하는대로의 세계경제규칙을 만들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조의 조건이나, 융자의 조건으로 삼는 민주주의나 정부의 분권화, 중앙은행의 독립,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의 사안도 충분히 개발도상국의 개별 사정에 맞게 고려되어야지 사악한 삼총사의 의도대로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정부의 권한을 축소, 분권화하고 중앙은행을 독립시키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단이 취약한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무장해제를 당하는 무방비의 상태로 내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민주주의와 시장이 반드시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것만은 아니라고도 한다.(265쪽)

사실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와 ‘1달러 1표’의 시장원리는 상호 충돌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반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266쪽) 신자유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시장의 ‘탈정치화’를 주장하면서 형식적으로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깨어있는 시민의 1표로 끊임없이 시장을 감시하는 민주적인 통제시스템의 구축과 유지에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소위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시장, 자유무역정책을 강요해 왔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자나라 사람들의 건망증을 질타하고 있다.(100쪽) 그러나 건망증이라기 보다는 영국 대처수상의 언급처럼 ‘대안없음’(66쪽)을 핑계로 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개발도상국들에 있어서 외국인 직접투자는 ‘악마와의 거래’일 수 있으며(157쪽), 재분배프로그램없이 저성장과 소득불평등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중앙은행 독립성부여도 신중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237쪽) 또한 누적 채무를 지탱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상당기간 적자 예산을 운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으므로(240쪽) 재정건전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도 바람직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정책들이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까닭은 정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라며,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문화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발전하는 것(300쪽)으로서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로 상호작용하는 것(301쪽)이지, 문화가 모든 차이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288쪽) 또한 문화에 근거해 경제발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후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296쪽)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비판적으로 사악한 삼총사의 권고를 따를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조업에 대한 보호와 투자(323쪽)를 함으로써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개선하려는 의지(321쪽)를 가지고 시장에 대항하라(318쪽)고 주장하고 있다. 1947년의 마셜플랜처럼 나쁜 사마리아인 행세를 하지 않는 것이 부자나라들에게 오히려 이익이 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개명된 이기주의’에 거듭 호소하고 있다.(333쪽)

우리나라는 부자 나라인가, 가난한 나라인가? 부자 나라라면 사다리를 걷어치울만큼 지붕 위에서 떠밀리거나 미끄러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또 그래도 도덕적으로 괜찮은 것인가?  가난한 나라라면 우리는 충분히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제조업, 그 밖의 고부가가치산업에 대한 보호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한미FTA에서 미국의 자동차산업보호를 위한 추가협상 내지는 재협상요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소고기시장을 개방하고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양극화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나라는 영원히 가난해야 하는가? 그것이 비단 가난한 자들의 책임 뿐인가? 되돌릴 수 없는 고속도로 위의 무한질주 같은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 우리는 과연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적절한 변속을 하면서 가장 알맞은 파도를 골라 타고 있는 것인가? ‘이기주의’는 과연 ‘개명’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문외한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끝나지 않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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