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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여자의 일생, 그것이 어머니의 인생이든, 본인의 인생이든, 딸의 인생이든, 거기에는 분명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떤 ‘해방에 대한 갈망’인 듯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시절을 배경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첫사랑인 그 사람의 흔적을 추적한다.
자신의 인생은 비록 그런 위기의 사회 속에서도 비교적 평탄하게, 어찌보면 손쉽고도 대개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살아온 듯 하다. 미군부대에서의 직장생활이라든가, 무능력한 첫사랑을 버리고 안정적인 은행원과의 결혼 등이 그 주된 증거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언제나 ‘구슬같은 처녀’이기를 원하는 ‘일상 속의 여자’였다.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것도, 주인공은 꽤나 심각하게 그 갑갑함을 호소하고 있는데,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리 충격적인 것은 아닌 듯 하다. 아마도 그 당시 대학물까지 먹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흔쾌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어떤 불만의 강도에 비례하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화의 차이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문화가 아니라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내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얕보고 동화는 물론 이해까지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153쪽), “변화를 꿈꿀 수 없는 안정감이야말로 나에게는 족쇄였다.”(162쪽)
신념이든, 취향이든, 취미든지 간에 인간은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그것의 근본적인 동인은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삶의 조건’을 이루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인공의 일탈은 이별과 결혼을 한 후, 우연한 첫사랑과의 재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재회 이후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그녀는 귀여움을 잃은 채로 첫사랑의 추억은 박살이 난다.(289쪽) 결국 그것은 일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것은 첫사랑의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당혹감’일 때가 많은 것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영역 속에서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이미 세월에 실려 온 각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우리들의 시간이고,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벌레들의 시간이었을까.”하고 되묻는 독백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이다.
첫사랑은 ‘복기’가 아니라, 어찌보면 ‘다시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 속에서 전체를 보는 눈을 뒤늦게 갖게 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처음부터 ‘벌레들의 시간’(201쪽)이나 ‘벌레들의 짓’(223쪽)은 없었으며, 그 전체가 ‘각자들의 시간’이었고, ‘각자들의 짓’이었음을 아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일 뿐, 누구를, 무엇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처럼 아이를 넷이나 둔 엄마로서, 철저히 가정을 중시하는 책임감있는 남편을 둔 여자의 일생은 분명 ‘행운’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런 ‘가부장의 가치’(248쪽)를 존중하고, ‘믿음이 위안’(249쪽)이 되는 그녀의 신념은 분명 보수적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간다. 또한, 그녀는 첫아이의 출산으로 뺏길 ‘자신의 자유’와 ‘그 작은 것의 살려는 의지의 집요함’(242쪽)에 섬뜩하기도, 측은하기도 한 그런 이기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주인공에게서 찾은 ‘그 남자의 집’은 마지막 포옹처럼 담담하게 완벽했던 결별이었고, 오히려 양공주로 살았던 춘희의 그리움이 어찌보면 ‘그 남자의 집’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싶다. 그녀의 마지막 안부전화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아무것도 안 그리워하면 무슨 재미로 살겠수.”(306쪽) 사람들에게는 ‘그리워할 대상의 존재가 삶의 필요조건’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행복’이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리지는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아니라, 지울 수 없는 기억 속 갈망들의 확인이 아닐까 싶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엔 그 뚜렷한 확인을 위한 자신들의 기억 속의 희미한 ‘집’들이 있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으로부터 다시금 되돌아 서 보길 원하는 ‘자신들을 위한 집’이다.
그 ‘집들로 부터의 해방’은 언제쯤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