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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을 길 위에서 ‘사실들과 인상들을 분류하고 그것을 대조하는 일’(18쪽)로 사유한 결과로서 남긴 그의 아포리즘(잠언)은 많은 것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패배자의 값진 기록’(9쪽)이라는 옮긴이의 뜻은 아마도 에릭 호퍼(1902~1983)가 철저히 자신을 패배자 또는 적응불능자(74쪽)로 스스로를 인정하면서 사색하고 있었던 점을 분명히 한 것이리라. 그는 평등의 주장이란 ‘자신이 우위에 설 희망이 없는 문제’에서의 선택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란 좌절한 자본주의자’라는 것이 드러난다(69쪽)고 한다. 그러나 농장주 쿤제와의 대화(150쪽)에서 유추해 보면 그는 가장 안전한 삶의 방법으로 길 위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안전은 아마도 어떤 ‘자유’와 닿아 있을 법하다.
어릴적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일찍 여읜다. 그러나 시력을 잃었던 7세 부터 8년이나 지난 후에 다시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뒤의 몰입은 그의 사색을 더욱 깊게 한 것 같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면 다시 죽을 때까지 매일 일하러 가야 한다는 ‘고요한 절망’ 속에서 문득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약병을 들이키다 말고 내뱉으며, 생의 끝없는 길을 발견하고, 노동자의 삶에서 방랑자로 다시 태어남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기질의 탓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레스토랑에서 접시딲이를 하면서도 그는 늘 행복한 ‘해피’로 불렸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익히 알다시피 ‘언제나 즐거운 강아지’를 부르는 이름이다.
자살의 결심으로부터 그를 구출한 것은, 비록 낯설고 새로운 것이지만 그 ‘도시에서 도시에로 이어지는 길’(55쪽), 그 위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어떤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희망보다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의 용기’(58쪽)를 더 강조하고 있다. 결국 그를 구한 것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 ‘용기’였을 것이다. 괴테가 한 말은 “희망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가 아니라, “용기가 없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59쪽)는 것이었다고 확인한다. 그 용기로 인하여 그는 같은 길 위에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당당한 방랑자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자신을 포함한 부랑인 수용소의 사람들은 비록 사회의 적응불능자들이면서 인간 쓰레깃더미(73쪽)들이지만, 그 중에서 퍼낸 한 삽의 진흙에 불과한 그들의 힘만으로도 어메리카를 건설할 수 있다(67쪽)는 자부심을 보인다. 자본가란 어떤 부류로도 나눌 수 없는 각각의 종자(60쪽)이지만, 인간이라는 종자는 때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도 있다(76쪽)고 한다. 약자 속에 내재하는 자기 혐오와 감화력과 같은 특이한 기질들이 어떤 창조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떠돌이 노동자와 부랑자들이 개척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음(75쪽)을 강조한다.자본가의 탐욕(60쪽)을 인식하면서도, 자본가에 대해서는 극히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개별적인 인식의 문제로 파악한 듯 하다.
글의 중간 중간에 언급되고 있는 동양 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당대 서양 사회의 표면적 우월성을 중심에 둔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인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103쪽)며,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라고 한 그의 말에 비추어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그들이 언급하는 동양의 정체는 질문할 충동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정돈된 욕망의 상태였을 수 있다.
스틸턴 박사와의 만남 이후 감귤재배의 백화현상을 해결하고 연구소에 정착할 수 있었음에도 다시 길 위로 나선 그의 선택(96쪽)은 태생적 철학가의 기질을 보여준다. 적응불능자가 인간 사회에서 맡는 특이한 역할에 대해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81쪽)해 했다. 그가 가진 기억은 모두 사람들과의 만남에 관한 것이었으며, 저술하는 생활이 금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85쪽)되었던 것이다. 의문에 대해 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가차없이 이를 외면해 버리는 그의 기질(93쪽)이 진정한 사상가로 여물게 했을 것이리라.
과도한 욕망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억누르는 수단(115쪽)이기 때문이었을까. 실제로 완전히 상실감으로부터 회복된 적이 없다(122쪽)고 고백하고 있는 헬렌과의 사랑도, 그 기대를 정당화하는 데에 대한 인생의 소비(121쪽)로 규정하고 서둘러 떠남은 두려움인가. 아니면 도피인가. 사랑인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헬렌보다는 길 위의 자신의 삶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아니 거기에서만 그의 삶이 유일하게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순간 순간의 행복은 참된 것이 아니었으며, 모든 것이 자격지심과 의혹으로 가득찬 것이었다(165쪽)고 고백한다. 특이한 것에 직면할 때마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비밀을 찾아내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그의 독특한 기질(155쪽) 탓인지도 모르겠다.
돈의 위력과 관련하여서는 그는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사람은 악의 본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며, 인간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게 없다(161쪽)고 단언한다. 돈이 없는 사회에서는 절대 권력이 지배하게 될 것이므로 선택의 자유가 없고, 무자비한 힘이 분산될 수 없으므로 평등도 없으며, 돈의 힘은 강압이 없이도 조절될 수 있기 때문(158쪽)이라고 한다. 돈이 인간의 포악성을 회유하는 유인책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유통을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는가에 따라 악은 언제든 뿌리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다. 따라서 늘 긴장과 제어를 통해서 돈을 관리해야 한다. 그는 길 위에서 아마도 악의 뿌리까지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운명을 예술가(157쪽)로 규정하며,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적인 예술가의 힘을 동경한 다. 친숙성은 생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하므로 예술가의 본 모습도 영원한 이방인이거나 방문객(159쪽)으로서 자신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자위한다. 일, 즉 노동은 호퍼의 철학과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테마이며, 일이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은 일일 뿐이고, 의미있는 생활은 배우는 생활(174쪽)이어야 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술의 습득을 강조한다. 인간의 손에 의한 구원(182쪽)을 신뢰했듯이 그는 자신의 노동에 의한 자부심으로 길 위의 삶을 마감하고 있다. 그는 분명 길 위에 있는 그대로의 삶을 마주한 ‘성실하고 책임있는 자유주의자’이면서, 사색과 성찰을 통해 짧고도 긴 의문들을 정리해 간 열정적인 사상가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