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밀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 그의 아내 헤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와의 관계이다. 밀이 말하는 이 책의 일부의 저자(23쪽) 이기도 한 그녀는 남편의 친구이자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밀의 나이 25세, 그녀의 나이 23세에 만나 20년이 지난 후 남편이 죽고 나서야 결혼을 하지만, 8년 만에 그녀도 세상을 떠난다. 밀의 모든 저작들이 그녀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일정한 경향의 사회적 여론, 특히 도덕적 억압도구로서의 종교적 세력 하에서 하나의 인생이 또 하나의 인생을 만나 동지의식으로 일생을 함께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의 사상의 성숙기(280쪽)에 있어 하나의 동력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때문인지 밀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적 여론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시 한 것이리라.

이 책에 곁들여진 역자의 해설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밀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1장의 해설에서 밀이 자유를 ‘사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로 나누고, 행동의 자유를 다시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단결의 자유)’로 나눈 뒤, 그 어느 경우에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라고 주장하는 점(타자피해의 원리, 28, 284쪽)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역자의 지적대로 밀의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미성숙자나 미개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으며, 당시 영국의 식민지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있다(28, 43쪽)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밀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토마스의 저작에서도 후진사회와 진보사회에 대한 밀의 선입견(265쪽)을 지적하고 있다. 시대의 사상은 시대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분명 아쉬운 대목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의지의 자유(Liverty of the Will)가 아니라, ’시민적•사회적 자유(Civil, or Social Liverty)’라면서, 이는 사회가 합법적으로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것(26쪽)이라고 한다. 또한 역자에 따르면 밀의 시민적•사회적 자유란 정치적 자유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306쪽, 주6)으로 이해한다. 즉 개인적 자아로서의 ‘존재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자아로서의 ‘관계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후자의 경우 밀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 뿐만 아니라, 사회권력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한 것이며, ‘정치적 억압’ 못지않게 인간 정신 그 자체를 노예화시키는 ‘사회적 전제’(34쪽)에 대해서 일정한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35쪽)고 주장한다. 이는 밀의 개인적 인생역정과 관련하여 당시의 지배적 도덕률이었던 ‘종교적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함께 강조한 탓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의 권력을 제한해야 하는 이유로서 ‘다수의 폭정’(34쪽)에 대한 우려이며, 이러한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은 피지배자의 정치적 자유나 권리를 인정하거나, 공동체나 집단의 동의를 조건으로 삼는 방법(30쪽)을 제안하고 있다. 밀은 18세기 유럽의 부르조아 중심의 이른바 시민사회에서는 인민에 의한 인민의 통치라는 사상이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대부분의 현실은 최대 다수 인민의 의지이거나, 가장 활동적인 소수 인민의 의지가 대부분의 현실이라고 본 것(305쪽, 주6)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선호와 혐오가, 그 유력한 일부의 선호와 혐오가, 법과 여론의 제재에 의해 일반인이 준수해야 할 규범을 실제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38쪽)라고 한다.

우월한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나라 도덕의 대부분은 그 계급적 이익과 계급적 우월감에서 발생(37쪽)하며, 국가의 간섭은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하려하는지 또는 않는지에 따라 선택되는 것(42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타인의 자유에 대한 간섭의 근거는 ‘자기보호’원리이며, 간섭의 목적은 ‘타인에 대한 침해 방지’(42쪽)이어야 한다고 한다. 오로지 자신만 관련된 경우는 각자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주권자로서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43쪽)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재의 자유’는 ‘관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침해할 수 없다. 그것은 오늘날 헌법상의 기본권에서도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1장 자유의 세 영역에서 인간 자유의 본래영역은 가장 넓은 의미의 양심의 자유를 요구하는 의식의 내면적 영역과, 이를 표현하는 자유, 취향과 탐구의 자유, 단결의 자유를 포함(47쪽)하며,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을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의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이다.”(48쪽)라고 선언한다.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이를 표현하는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분리할 수 없는 것(47쪽)으로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자유’는 ‘관계의 자유’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지만, 그 제한의 폭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제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는 토론없는 진리란 독단이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대론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설령 일반적으로 공인된 의견이 단순히 진실일 뿐 아니라 완전한 진리라고 해도, 그것이 활발하고 진지하게 토론되도록 허용되지 않고 실제로 토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승인자의 대부분에게 그 합리적 근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하거나 느끼지 못하게 하여 일종의 편견으로 신봉하는 것에 그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시대’라는 것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오류는 갖는 것(62쪽)이므로, “잘못을 논박하고 그 반증을 들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의 목적을 위해 그 의견이 옳다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64쪽)이라고 한다. 즉 토론은 일종의 절차의 참여이고, 그러한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한 정의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 정신의 위대한 특성 중 하나는 잘못을 교정하는 능력이며, 그것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가능(65쪽)하다고 한다. 지혜는 열린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자신의 의견을 타인의 그것과 대조하여 잘못이 있으면 시정하여 완성한다는 지속적인 습관이야말로, 그 의견을 실천할 때 회의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자기 의견에 대해 올바른 신뢰를 갖게 하는 유일한 기초(66쪽)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르는 개인이 확실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67쪽)은 토론을 위한 ‘열린 정신’이다. 개인으로서는 ‘열린 마음’으로 지속적인 토론의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사회의 토론을 위해서는 ‘열린 제도’로서 절차 참여의 폭을 높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구성원이 참여하지 않은 폐쇄적 공동체의 결론은 신뢰를 주기 어려우므로 정당성을 상실하게 될 우려가 높다. 역자는 밀이 지혜와 열린 마음을 혼동(311쪽, 주47)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자신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에 있어 자신의 의견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자기 의견의 근거를 알아야 한다(90쪽)고 한다. 또한,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는 모든 문제에서 진리는,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두 의견의 비중차이에 따라 결정된다(91쪽)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견들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하고, 토론을 허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리는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리라.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경우는 도덕률로 정립이 될 것이며, 국가라는 공동체에 있어서는 정의의 길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정의의 전제는 그러한 의견차이, 즉 ‘다름의 인정’이고, 정의의 본질은 ‘다름의 논쟁, 그 자체’이다. 밀은 어떤 사실을 자기 관점에서만 보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92쪽)이며, 진리를 위해서는 임의적으로 반대론을 위한 ‘악마의 변호인’을 설정할 필요도 있다(93쪽)고 한다. 반대론자들에 대한 답변에 불만족함을 증명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그 답변은 만족할만한 것으로 승인될 수 없는 것(95쪽)이며, 바로 정의로운 진리가 될 수도 없는 것이리라.

현실에서의 진리는 대체로 서로 대립하는 것의 조정과 결합의 문제이지만, 그러한 포용력있는 공정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투쟁이라는 거친 방법(111쪽)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정책결정에 있어 토론의 보장을 위한 절차의 제도화와 강제적 실천이 중요한 것이다. 인간 지성의 현 상태에서는 진리의 모든 측면을 공정하게 다루는 기회가, 의견의 다양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의 보편성(112쪽)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독교 윤리와 진리에 대하여 밀은 “오로지 기독교적 원천에서만 발전될 수 있는 윤리가 아닌 다른 종류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가 병존하지 않으면 인류의 도덕적 부활을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117쪽)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치생활영역에서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란 것도 인류의 도덕적 부활을 위한 필요조건들인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 아이는 성숙하면서 또 다른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됨으로써 인류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것이리라. 밀은 “인민이 양쪽의 의견을 듣게 되면 언제나 희망이 있다”(119쪽)고 한다.

제2장이 자유로운 의견의 형성과 표현에 관한 언급이라면 제3장은 그러한 의견에 따른 행동의 자유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그것은 ‘책임과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는 한’이라는 조건(128쪽)을 전제로 한다. 역자는 밀이 “유럽인들의 성격과 교양에 놀랄만한 다양성이 있다는 점” 때문에 동양적인 정체에 빠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19세기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이었고, 이를 일본이 우리에게 적용시켜 이른바 식민지 정체사관을 날조한 이론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127쪽)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개성의 존중을 주장한 점에는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밀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다양한 성격에 자유로운 영역이 부여되어야 한다(129쪽)고 한다. 개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모두 전제적(142쪽)이다. 인간의 정신적•도덕적 능력은, 체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사용되어져야만 개선되는 것(133쪽)이며, 인간의 본성이란 틀에 짜인 기계가 아니라 쉼없이 성장하는 나무(135쪽)이므로, 욕망과 충동도 인간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135쪽)으로서 성격을 나타내는 것(136쪽)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욕망과 충동을 균형있게 조절하는 ‘양심의 능력’일 것이다.

밀은 이 땅의 소금과 같은 소수인 천재의 독창성(143쪽)을 강조하며, 군중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단순한 불복종도 사회에 대한 하나의 봉사(148쪽)이며, 오히려 그러한 파격이 없는 시대를 중대한 위기(149쪽)라고 표현한다. 개량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의 정신인 것은 아니며, 진보의 원칙 그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형태든 개량을 사랑하는 형태든,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적어도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154쪽)고 한다.그러므로 그는 분명 당시의 진보주의자인 것 같다. 동양의 정체는 개성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며, 그들에게 있어 개량의 기회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서만 가능하다(157쪽)고 하여 외세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개성의 발현으로서 자유의 확장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모순된 점이 보인다. 개성의 발현이란 주로 독창성일 경우가 많겠지만, 연대성에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자유란 인식한 만큼의 영역일 것이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자유로 포섭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제4장 개인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한계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타인과 관련되는 부분과 타인과 관계되지 않으며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부분으로 나누고, 전자의 경우는 상대적 자유의 영역으로, 후자의 경우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으로 설명한다. 전자의 경우를 ‘존재로서의 자유’, 후자를 ‘관계로서의 자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행동의 절대적 주권자는 개인(165쪽)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5장 원리의 적용에서 밀은 교육의 다양성과 배심재판,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국가의 간섭이 지나치면 관료제와 같은 더 큰 폐해가 나타나므로 권력의 분산을 주장한다. 국가의 제도라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관계의 자유’에 대한 간섭의 경우에도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복지’ 사이에서 ‘정의롭게 합의된 비례의 원칙’에 따라야 할 것이다.

특히 국가 교육의 한계와 관련하여 밀은 국민 교육의 전부나 대부분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에 대해 반대(225쪽)하면서, 학위나 과학적 또는 직업적 지식에 대한 공적 증명(226쪽)이 필요하며, 그것은 스스로 시험에 합격한 자 모두에게 부여되어야 하지만, 그 증명은 여론에 의해 부여되는 존중에 그쳐야 하지, 경쟁자들과 다른 이익을 부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228쪽)고 한다. 우리 사회의 교육체계도 ‘순수학문의 길’과 ‘실용학문의 길’을 구분하고, ‘전자의 학위’와 ‘후자의 자격’을 명확히 구분하여 개인과 사회가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들을 제도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우리의 현행 법제상 로스쿨을 졸업을 해야만 변호사시험을 볼 수 있는데, 로스쿨의 학비는 이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경제적 능력)을 기준으로 일반인을 처음부터 불평등하게 차별한다. 그러므로 일단은 순수한 자격시험으로서의 사법시험을 계속 존치하는 것이 누구나 접근 가능한 기회의 보장으로서 직업선택이라는 개인의 자유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교육에 관한 한 국가의 역할은 경제적 지원의 영역에 국한하여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이며, 모든 공인자격의 관리도 산업인력관리공단과 같은 공적기구를 통해 일률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역자는 밀의 자유는 주로 ‘사상의 자유’를 말하지만, ‘재산의 자유’에 있어서는 상당히 제한을 가하고, 노동자의 기업 소유와 경영, 공동생산조합, 그리고 조세에 의한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자치사회주의자’(9쪽)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점진적 사회주의자로서 영국에서 형성된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기초가 되었(282쪽)으며, 나아가 사회의 도덕적 획일성을 유지하려는 법적 강제에 대한 그의 확고한 반대와 그런 시도로부터 시민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현대의 어떤 진보적인 사고나 정책보다 앞서 있어서 ‘아나키즘적 자유론’(9쪽)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개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시장경제의 장점을 유지하는 사회가 그의 아나키즘적 유토피아(10쪽)라는 것이다. 밀이 생산자와 판매자의 자유보다는 구매자의 자유를 중시(206쪽)한 점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주의에 대한 접근은 자본가인 생산자와 판매자의 입장보다는 구매자인 동시에 소비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다가서야 하는 것이 보다 정의로운 접근의 방향일 것이다.

오늘날의 헌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생활규범으로서의 헌법의 기능을 인정함으로써 기본권의 국가에 대한 효력 뿐만 아니라, 제삼자에 대한 효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행 헌법상으로도 ‘사상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의 한 내용으로 보장되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열거되지 아니한 기본권의 존중’ 등을 그 근거로 한다. 헌법재판소도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양심의 자유에서의 양심은 단순한 윤리적 선악 판단보다도 더 넓은 보호범위를 지니며, 세계관ㆍ주의ㆍ신조 등까지 포함”한다(89헌마160)고 하고 있다. 이는 밀의 자유의 개념이 우리의 헌법현실에도 반영되고 있는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유론을 ‘아나키즘적 자유론’이라고 하는 이유도 사회적 강제와 간섭에 대한 쉼없는 개인의 자유 확장을 요구하는 그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밀도 일종의 ‘고민하는 개량주의자’가 아니었던가 싶다. 물론 그 개량의 대상과 폭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다양하게 흐르는 것이리라. 역사는 오늘도 쉼없이 ‘개화’하고 있고, 어제는 이미 오늘의 관점에서 ‘미개화’인 것이다. 역사의 진보는 ‘어제의 야만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 흐름의 방향에 참여하고자하는 대중의 의지를 동시대인의 최대한의 공감으로 방해하지 않고 장려하는 것이 공동체인 국가로서의 정의로운 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또한 ‘문화시민’의 ‘문화국가’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다수자가 옳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대자가 존재할 필요가 있으며, 반대자들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허용이 자연스럽게 진리를 발견케 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의 근본은 인간양심의 발현인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있으며, 그것의 제도화, 특히 반대자들을 위한 참여의 제도화가 ‘정의로 가는 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자유의 의미는 ‘모든 형식의 동행’인 까닭이요, 그것이 다양한 개성의 조화를 도모하는 다양성 회복의 첩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