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책 한 권이 세계의 비열한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모른다. 거기까지만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걸어 다니는 동네의 일만으로도 벅차다. 비열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개인들이다.-19쪽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 아니라도 가격 흥정에 무례라는 건 없다. 고객은 자기 경험과 방식대로 얼마든지 가격을 후려칠 수 있다. 장사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래도 남으면 파는 거고, 손해다 싶으면 안 팔면 그뿐이다. -43쪽
삶을 바꾸려면 버릇을 바꾸어야 하는데, 버릇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 먼저 바꿀 수가 없다. -61쪽
각기 다른 인과관계가 우연을 거쳐 한 지점에서 만나고, 만나고 보니 우연은 다 필연이었다는 게 드러나야 한다.-83쪽
사방이 아주 고요하면 예민해지는 게 아니라 둔한 방심 상태가 된다. 그런 방심 상태가 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띈다. '존재'만 하던 것들이 슬며시 자기를 드러낸다. 의미라는 것도 그럴지 모른다. 절망이나 깊은 슬픔으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면, 현실적 의미들이 사라진 곳에서 다른 차원의 의미가 올라온다. 자각은 갑작스러워야 자각이다. -93쪽
그냥 내 마음에 걸린다. 앞사람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는데 말해 주지 않고 지나칠 때처럼 마음이 찜찜하다. -95쪽
진실은 믿는 것이지 밝혀서 아는 게 아니다.-98쪽
세상과 대결하지 말자. 나에게 있는 것만 가지고 살자.-102쪽
죽은 자에겐 욕망이 없다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라고. 여자의 눈빛은 간절했다. 얼마 전에 마주친 남자아이도 그랬다. 그 간절함은 욕망과는 다른 것이었다. 산 자의 눈빛에는 자아가 깔린 욕망이 있다. 죽은 자는 다만 염원하고 소망한다. 간절히 무엇인가를 바라지만 그건 욕망이 아니라 다만 그리움이다. -125쪽
나는 우연을 안 믿거든요. 안 믿는 게 아니라 다 필연이라고 생각하지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필요해서 생긴다는 거지요. 당연히,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저마다 세상에 기여하는 자기 역할이 있어요. 그럼 나는 어디에 필요한 존재였을까... 그걸 알고 싶어요. 나는 왜 태어났느냐 이거지요. -129쪽
장 선생을 생각했다. 누구에 대해 쓰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를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스한 무게의 삶을 산다. -235쪽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쓰지 않는다. 단순한 일이다.-236쪽
산 자가 보내지 않으면 죽은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못 떠나는 건 산 사람 때문이다.-247쪽
사랑은 하나의 시련이다.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서 외롭다.-249쪽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더 잘사는 것'보다는 '더 많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말이에요. 한 인간의 도덕과 가치 체계는 축적된 경험의 양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은 대다수의 인간에게 같은 양과 같은 깊이의 경험만을 부여한다, 경험이 좀 더 많아지면 가치의 목록이 달라질 것이다, 하고 말이에요.-263쪽
의미는 기억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위가 아니라 기억에. 때문에 의미는 시간이 지나간 후에 만들어진다.-271쪽
그러나, 용서하고 싶었다. 가장 힘찬 용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아무 걱정 하지 마요.-282쪽
햇빛은 아주 단순한 사물도 찬란하게 만든다. 깊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도 저 찬란한 빛이 자기 몸에 쏟아지면 생각할 것이다. 햇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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