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뚫고 하이킥>(이하 <하이킥>)의 마지막 방송은 TV드라마의 결말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방송드라마의 경우 아무리 양보를 해도 스토리 라인의 가능한 두어 가지 결말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데도, <하이킥>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결말이었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하이킥>의 장르적 특성에서 우선 기인한다. <하이킥>은 드라마 장르 가운데 코미디에 해당하는 이른바 '시트콤'(시추에이션 코미디)으로 설정되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 설정을 통한 드라마의 전개가 시트콤의 본래 목적이기에, 결말은 전체 드라마의 이야기의 문제들을 무난하게 해결하는 수준에서 봉합되는 게 관객들의 기대에도 부응한다. 가령 러브 라인을 정리해준다든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들이 문제를 극복하고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든가 하는 서사 판타지에 기반한 드라마의 기능을 수행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하이킥>은  TV드라마의 결말 구조를 깡그리 무시했다. 김병욱 감독은 한국 드라마 관객(독자)들을 한껏 롤러코스터를 태웠다가 종국에는 벼랑 끝에서 밀어버린 꼴이 돼버렸다. <하이킥>에 열광했던 관객들이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돌변하여 악플을 달고 마는 사태가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이킥>은 방송드라마(그것도 정극이 아닌, 시트콤이라는 드라마의 하위 범주에 속할 법한)의 결말 구조를 배신하고 철저하게 냉소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마지막 방송이 타기 전까지, 하이킥의 결말은 세경이 아버지와 해후하고 세경ㆍ지훈ㆍ준혁ㆍ정음의 러브 라인이 정리되는 수순에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게 일반적인 드라마 결말의 문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이 인물들의 러브 라인이 어떻게 연결될지가 핵심적인 관람 포인트였다. 준혁은 이미 세경에게 고백을 했으나, 세경은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 정음은 지훈의 구애를 멀리하고 왔으나, 그렇다고 지훈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마지막 회까지 러브 라인이 정리되지 않는 드라마는 사실상 이미 예외가 될 만하다. 마지막 회 10분 전까지 독자들의 이야기 예측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면, 이건 드라마의 이야기 문법을 한참 벗어난 파격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세경이 공항으로 떠나는 길에 마지막으로 지훈을 보기 위해 병원에 왔을 때 둘은 결국 엇갈리는 '운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훈이 대전 집에 내려가 있는 정음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길에 둘은 만나게 된다. 지훈과 세경의 아슬아슬한 동선은 <하이킥> 결말의 행로로 이어진다. 결국 지훈이 대전으로 내려가기 전 세경을 공항까지 태워주기로 하고, 126회나 계속된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너무나 협소한, 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너무도 '진지한' 자동차 씬이 기다리고 있다. 


시트콤은 인공적인 세트 촬영을 기본으로 하며, 중산층 가정의 거실과 방이 주요한 무대가 된다. <하이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하이킥>의 결말은 자동차 안이라는 사실적 공간(실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빗소리와 자동차의 흔들림이 조절되지 않고 그대로 드라마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마지막 씬은 드라마의 가공성을 상쇄하며 어떤 진실한 국면을 준비한다.

 


 

이전에 세경과 지훈이 대화할 때 그들을 잡는 카메라는 둘을 한꺼번에 잡지는 않은 듯하다. 부엌에 있는 세경과 부엌 밖의 지훈이 거리를 두고 각각 찍혔다. 즉 투샷으로 함께 화면에 담기기보다는 원샷 나눠찍기가 선호되었다. 그러니까 둘은 한 공간에 있어도 각각이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지훈은 이 집의 아들이자 잘나가는 의사이다. 하지만 세경은 허드렛일을 하는 '식모'이자 고등교육도 채 다 받지 못한 어린 여자애일 뿐이다. 식모는 60~80년대 고도성장기에 중산층 또는 부유층에서 집안일을 도맡았던, 지금의 가사도우미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이킥>에서 '식모'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했다는 사실은, <하이킥>이 계급의 문제를 이미 배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세경에 대한 지훈의 태도는 연민과 계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가 일방적이었다는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지훈과 세경은 126번의 만남 끝에 처음으로 평행한 시선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라는 공간이 주는 평등성은 둘의 시선의 높이와 (협소한 공간이라는 물리적 원인일 수도 있지만) 화면 안에 둘이 들어갈 수 있는 구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세경이 그토록 갈망했던 순간은 자동차의 좁은 공간 안에서야 실현이 된다.  세경과 지훈이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세경이 유심히 바라보던 그림의 제목은 '마지막 휴양지'(The Last Resort)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하이킥>의 결말은 이야기 선후 관계를 고려했을 때 그렇게 갑작스러운 게 아니다. 세경한테는 지훈과 함께하는 이 순간과 공간이 '최후의 휴양지'일 테니.


세경이 이민을 가기로 선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신애 때문이었다. 가난하기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언니 세경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가난해도 신애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아버지와 함께 가기로 한 곳은 타히티다. 타히티와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물리적 거리가 연상시키(암시하)는 심리적 거리감은 그들에게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세경이 이곳을 떠나고자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인 위계관계, 즉 계급 격차와 이로 인한 불평등함, 그리고 이것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자존을 지키며 살 수 없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연유한다.


반면에 이민을 주저하게 한 요인은 두 가지다. 검정고시를 봐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던 평범한 욕망. 학벌과 경제적 위계가 실질적인 계급을 결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식모'가 아닌 나이에 어울릴 법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졸업장과 대학 진학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보통의 기준에서 봐도 과분하다고 볼 수 없는 그저 너무나 평범한 욕망. 하지만 세경은 "그 사다리를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에 다다른다. 이것은 계급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다. 계급은 위와 아래라는 위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민을 가기로 한 선택은 한국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가 한계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훈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멜로드라마의 서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문제가 결국 <하이킥>의 결말 구조를 매듭짓는다. 사랑이 개인간의 사적인 감정의 교류일지라도, 공공의 이야기 공간에서 재현될 때는 당대의 사회적 상상력과 결부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녀의 사랑은 한번도 입 밖으로 발화되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간신히 터져나온다.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이는... 밥을 해도.. 빨래를.. 걸레질을 해도...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부끄럽고 비참했어요." 

 

 

어린 여자가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은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한, 태생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미 배치되어 있는 계급이라는 공고한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게 상처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누구보다도 세경이 공부를 해서 현실을 극복해나가길 지훈은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세경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게 분명해 보인 지훈조차도 그 감정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동정이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계급의식이 그에게도 예외없이 작용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위치에 의해 배치되는 계급은 가시적인 권력관계에 의해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아주 사적인 개인간의 관계에도 '무의식'에 가까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그 무의식은 정치적이다.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테제가 평등의 형식을 규범화했다고 하지만, 평등은 결코 규범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평등은 다다를 수 없는 '오브제 아'(objet a)로서, 이데올로기로써 기능한다.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한테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놓은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미소 지으며) 앞으로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지훈 반응샷) 다 와 가나요?"

"어..."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뭐?..."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훈, 세경 쪽을 '계속' 바라본다. 투샷. 흑백화면으로 전환되며 사운드 소거, '영원한' 포즈.) 

 


 

지훈이 '빨간 실로 묶여 있는'(어느 편에선가 이야기 전개와 전혀 무관한 장면이 있었다. 20여 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 중간에 그런 장면이 삽입되는 건 이야기의 낭비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욕실에서 일하고 있는 세경에게 지훈이 느닷없이 빨간 노끈 없냐며 묻는 장면은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 뿐, 그 회에서 이야기 전개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필연성 없이 끼어드는 장면은 절대 없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럼 그 장면의 의의는? 신화적 상징을 인용하여, 두 사람이 빨간 실로 묶여 있는 '운명'의 인연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킥>의 작가들은 알게 모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세경을 찾을 수 없었던 건, 계급이라는 정치적 무의식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그렇게 마지막에 세경은 깨질 수 없을 듯했던 강고한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화시킨다. 125회를 참아 왔던 견결한 고백은 처절하고 진실된 감정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 순간, 좁은 공간과 그 짧은 시간은 그녀에게는 '행복'의 기준이 된다. 세경은 이제야 간신히 미소 지을 수 있지만, 그녀의 단순한 기쁨은 아이러니하게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고백하는 이 순간에도 세경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겸허하다. 그녀가 원하는 시간은 그저 '잠시'이다. 누구나 아무 의미 없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보다 더 진실될 수 없는 그녀의 겸허한 고백은 그들의 모든 운명의 갈림길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다. "뭐?..." 지훈의 반문은, 그가 깨닫지 못했던 운명과 사랑에 대한 최초의 반응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처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한다. 더 이상 연민과 동정의 수직적인 시선이 아니라 (폭우 속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수한 의지로써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는 정면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흑백으로 화면은 전환되고 사운드는 꺼진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포즈(pause). 지훈이 세경에 해줄 수 있는 최초의 사랑.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해피엔딩은, 계급 차를 극복하여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계급 상승의 판타지를 제공한다. 세경과 지훈의 사랑은 그들의 '선택'으로써 한국사회의 계급적 관성에서 탈주함으로써, 멜로드라마의 이데올로기와 판타지를 배신한다. 이는 계급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판타지에 대한 비판이다.  한편, <하이킥>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비극성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전형성을 내파하며 멜로드라마의 정치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잠시 시간이 멈춰 곧 끝나게 될 행복이 유예되길 바랐던 세경의 소망은 지훈의 자발적 수용을 통해 영원한 시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이킥>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던 달콤한 결말, 즉 이데올로기적 봉합을 거부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자연화된 계급 인식과 이에 기반한 판타지에 정서적 충격을 남겼다. 드라마가 기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는 보수적 서사텍스트라는 인식을 스스로 부정하며, 비판적 텍스트로서 읽히길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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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라마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연애를 소재로 하는 한국의 드라마들에서 재벌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에 나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면서 재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재벌과 연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허구의 서사텍스트가 있을 법한 일(있었던 일이 아니고, 있어야 할 일도 아니다.)을 조직화하여 제시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재벌과의 연애를 허구한 날 갖다 써먹는 한국의 TV멜로드라마는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되기에는 진작에 글러먹은 것이다.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응당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 싶겠지. 하지만 그러한 독자들의 냉정한 비평을 무디게 하는, 그런 이상한 다소 뭔가 과잉이 있다 싶은데 그 과잉마저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 글은 그 과잉의 정서의 정체와 흔적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시크릿가든>은 남녀의 사랑이 계급 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세계관을 반복하는 TV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시크릿가든>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는 흔해 빠진 TV드라마의 클리셰이다. 이런 TV드라마가 타킷으로 설정하고 있는 시청자는 20~30대 여성들이다. ‘드라마퀸’이라는 용어가 생긴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드라마를 소프 오페라(soap opera, 드라마 제작에 소용된 광고의 주체가 비누회사였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TV멜로드라마의 주요 시청자가 여성-주부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멜로드라마를 남자가 보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TV멜로드라마는 타깃 시청자를 여성으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젠더-성차에 기반하고 있다는 수용적 측면의 전제를 설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TV멜로드라마에서 재벌 남자주인공의 잦은 등장을 수용하게 되는 심리적 근거는 여성들의 연애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의도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앞에 나타나 구질구질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거라는 일종의 변용된 ‘가족로맨스’라고 할까. 그게 아니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재벌 남자 만나기가 쉬운 일이든가, 그 재벌 남자들이 한결같이 ‘사회지도층’으로서 평등의식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든가.

 

 

2.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시크릿가든>은 남녀 주인공 간에 계급 차를 두고 그 사회적 낙차를 서사 동력으로 삼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이다. 재벌 3세인 김주원(현빈)과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이 어떤 감정의 과정과 교류를 통해 실현되는지가 드라마의 최종 목적이었다. 사랑은 낭만적 열정이며 세계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다. 반면에 계급은 현실적 조건이며 세계에 대한 비관적 태도이다. 사랑과 계급은 서로를 불신하며 접점을 찾지 못한다. 둘은 만나서 사랑할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랑은 우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우연은 최초의 만남이다. 만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둘 간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계기이기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거대한 ‘사건’이다.(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 길, 2010에서 사랑이 ‘진리의 절차’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남녀 간의 만남을 철학적 의미로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존재론이 간과했던 ‘사건’은 현대철학의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김주원이 박채린의 대역이었던 길라임을 박채린으로 잘못 알았던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지만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사건’이 된다.

 

 에로스와 철학적 진리의 절차적 상동성에 관한 대화

            

 

 <시크릿가든>이 여성들에게 강렬하게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드라마가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감정의 과정을 호소력 있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일생일대의 인수합병의 기회’ 정도로 생각하는 남자가 가난하고 학벌 안 되고 조건 안 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도대체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 <시크릿가든>은 김주원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설득력 있게 그 추이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로서의 특장을 발휘한다. 여성 시청자들이 열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주원은 여성들이 반할 만한 여러 조건을 지닌 남자로서, 본인 스스로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런 남자는 여자를 성적 대우로서 존중하지 않기 십상이다. 김주원의 여성관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계급의식과 권력관계가 관여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사랑이 두 인격 간의 동등한 입장에서의 교류가 아닌, 자기 편의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거라든가 사회경제적 조건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교환가치가 성립하는 집단끼리의 결연으로 전락할 때, 개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말하듯이 여자는 그에게 두 부류였다. 잠깐 놀다가 치워버릴 여자(이게 그가 말하는 인어공주다)와 인수합병의 기회가 될 조건 되는 여자. 김주원의 이러한 여성관은 실상 여성혐오증(misogyny)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잠깐 놀다가 싫증이 나면 치워버릴 여자는 욕망 충족의 대상일 뿐이고, 조건이 되는 여자는 물적 교환의 중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김주원은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길라임이 눈앞에 등장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주원과 길라임은 외적 조건에 있어서 현저하게 다르다. 이 다름은 물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계급 차다. 근대 민주주의 테제가 평등을 규범화하여 ‘정치적 차별’을 금지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는 ‘차별의 정치’는 여전히 공고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계급은 정치적 지배를 할 수 없을 때 불평등과 차별로써 직접적 지배를 대신한다. 그것이 바로 계급 작동의 원리이다.(흥미롭게도 5회에서 길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김주원은 자기 계급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보여준다. ‘사회지도층’의 자기 패러디라고 할까. 바로 앞 문장은 김주원의 말을 옮겨 쓴 것이다. 기득권 계급으로 등장하는 김주원의 계급 인식은, 사랑의 서사가 겨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게 될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TV멜로드라마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각주로서, 드라마의 자기 인식이라 할 만하다.)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감정의 동요를 느꼈을 때 자문하는 바도 바로 그 지점이다. 나 같은 사람이 왜 아무 볼 것 없는 여자에게 흔들리고 있는가.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현실이라는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끈 떨어진 길라임의 가방에 대한 김주원의 반응은 그래서 윤리적이다.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그 거지 같은 꼴로 내 앞에 있을 수는 없다는. 그는 연민이나 동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의 현실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이는 그가 그녀를 대상이 아닌 관계의 주체로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길라임은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지만) <시크릿가든>의 서사적 길항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김주원과 길라임이 서로 교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드라마의 라이트모티프라고 할 수 있는 영혼/몸의 교환이라는 설정은 그러한 탐색에 필요한 수단이다.)

 

한편 길라임이 김주원에게 반응하고 있는 지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른 여자들이 김주원의 조건에 먼저 반응할 때 길라임은 자기 조건과 경제적 위치에서 그녀를 판단하려는 김주원의 시선을 완강하게 부인한다. 삼신할머니의 랜덤한 선택으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김주원의 경제적 조건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순 없다. 그녀는 그의 인어공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야이 미친놈아, 네가 잠깐이면 나는 자동으로 잠깐이냐?” “갖고 노니까 열 받지?” “세상 어떤 여자도 끝을 내놓고 사랑하지는 않아.” 길라임의 말들은 위치의 불평등 아래에서는 ‘너와 나의’ 사랑이 가능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길라임은 김주원 앞에서 자존감 하나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녀의 자존감은 그의 사랑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었다.

 

 

3. 사랑, 잃어버린 거울에 대한 탐색

 

 

융(C. G. Jung)은 남자가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을 때, 즉 ‘그 여자’라는 걸 직감했을 때의 현상을 그의 내부에 있는 아니마(anima)에 대한 반응이라고 했다.(C. G. 융 편저, 정영목 옮김, <사람과 상징>, M. L. 폰 프란츠, ‘개체화과정’, 218쪽, 까치, 1995) 아니마는 남성의 영혼 안에 있는 여성성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자아의 전체(self)에 대한 이원론적인 설명이다. 자아는 아니무스(animus)라는 남성성과 아니마라는 여성성이 통합된 전체로서 존재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가 부족하다면 이는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핍된 상태는 보충을 통해 통합을 지향한다. 때문에 사랑은 자기 안에 결핍된 아니무스(여성일 경우) 또는 아니마(남성일 경우)에 대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자아의 일부로서 이상적 아니마를 그 여자에게 발견할 수 있거나 투사할 수 있을 때이다.

 

신화, 종교, 예술에 남아 있는 집단무의식에 관한 분석심리학의 탐구. 이 판본은 절판이 된 상태이고, 지금은 돌아가신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인간과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김주원이 계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구획된 삶의 행로와 가능성을 거슬러 길라임을 향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근거는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주원이 자기와 비슷한 계급적 조건에 있는 여자를 사갈시할 수 있었던 근거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재벌3세라는 외적 조건이 그의 영혼까지 잠식했더라면 그가 길라임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주원이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오히려 그는 스무 살 때 일어난 사고로 폐쇄공포증이라는 심리적 외상에 시달리는 심약한 인물이다. 이 증상은 길라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기인하는 현상으로서, 모종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독일의 정신분석가 오토 페니켈은 폐쇄공포증 및 질식에 대한 두려움을 어머니-자궁 속에 안주하고 싶은 자궁 환상에 대항하는 방어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김주원의 어머니가 김주원의 사랑을 금지하고자 하는 초자아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김주원의 폐쇄공포증은 흥미로운 모티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김주원은 재벌3세로서 겉으로 보이기엔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시를 읽는 낭만적 감수성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현실에서 김주원이 읽었던 시와 소설들이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붐이 일어날 정도로, 그를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성공적인 입상화(立像化)라고 볼 수 있다.(물론 ‘현빈’이라는 기표의 역할 수행이 더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가 책을 읽든 피아노를 치든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융이 설정한 아니무스의 네 단계 가운데 가장 하위의 수준이 육체적 남성성이고 가장 상위의 수준이 영적인 심오함이었음을 떠올리면(M. L. 폰 프란츠, 앞의 글, 234~235쪽), 김주원의 캐릭터를 재벌3세라는 외면적으로 화려한 인물로서보다는 내적인 탐색을 수행하는 신화적인 ‘남성-영웅’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웅이 내면적 탐색을 통해 찾고자 하는 바가 어떠한 정신적 깨달음이라고 했을 때, 김주원이 인수합병의 기회를 충족시킬 여자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강건한 길라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한편 길라임은 인어공주는 물론이려니와 신데렐라조차 되기를 거부한다고 했다. 인어공주와 신데렐라라는 페르소나는 김주원의 욕망의 대상이거나 김주원을 위한 잠정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여기서 길라임이 요구했던 바는 역으로 김주원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 그는 계급적 동일성에 기반하는 정략결혼이 일생의 인수합병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불과하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자기 복제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길라임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면서 계급적 차이에도 불과하고 자신이 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스턴트우먼이라는 길라임의 직업이 남성적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도 아니마-아니무스의 지향성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몸/영혼이 바뀐다는 판타지의 설정도 아니마/아니무스에 대한 탐색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김주원은 길라임이 됨으로써 길라임이 자신의 아니마라는 걸 경험한다. 길라임 역시 김주원이 되어봄으로써 자신의 아니무스를 체험한다. 이는 그들이 자아의 전체성을 지향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의례를 통과하는 데 더없이 적절한 사건이다.


 

 


 

<시크릿가든>에서 가장 중요한, 같은 구도의 두 개의 이미지. 김주원은 길라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잠들어 있는길라임 옆에 나란히 눕는다.(아래) 미간에 손을 올려보지만 그녀는 혼곤하게 잠든 채 깨지 않는다. 다시 스턴트팀의 엠티에서 잠들어 있는 길라임 옆에 누워 그녀를 바라보는 김주원.(위) 마치 수면 위에 손을 갖대 대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주원이 미간에 손을 댔을 때 길라임은 잠에서 깨어난다. 플롯과 스토리의 관계에서 두 이미지의 시간적 배치는 역전되어 있다. 김주원의 기억 깊은 곳에 있던 아래의 이미지는 드라마의 최종회에서야 드러난다. 위의 이미지는 아래 이미지의 재현이자 반복이다. 사랑에 관한 운명론적 또는 결정론적 시각을 차용하고 있는 신화적 알리바이. 망각 저편에 놓여 있던 김주원의 길라임에 대레미니상스(reminiscence). 응시, 망각되었기억의 재현, 잃어버렸던 자아-이상과의 재회, 그래서 거울의 텍스트.          

 

 사랑이 자아의 결핍된 요소를 보충하여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든, 자아-이상을 욕망하거나 투사하는 것이든 간에 하나의 전체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사랑은 자아의 신화를 재건하려는 몸짓이며, 잃어버린 자아 또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이상에 대한 추구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거울에 대한 애타는 응시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응시는 자기의 얼굴을 비추는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정신적 숭고와 아름다움에 대한 안타까운 매혹이라는 점에서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거울에 대한 탐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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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활약한 소설가이다.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지만 번역가로 명성을 떨치고 신화 관련 저작으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대학시절에 그의 소설을 몇 권 읽었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 보면, <하늘의 문>(3권) <뿌리와 날개> <만남> <진홍글씨> <나비넥타이> <내 시대의 초상> 정도가 내가 읽었던 소설들이다. 여기서는 그가 처음 펴낸 장편소설 <하늘의 문>에 대해서 아주 사적인 독서 체험을 이야기할 것이다.

 

20대에 읽었던 이윤기의 소설을 과연 제대로 이해했을까? 그의 소설은 난해하다거나 자의식으로 충만하다거나 형식적 전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그가 질문하고 있는 메시지들은 20대의 천둥벌거숭이인 나로서는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을 듯하다.(《나비넥타이》와 《두물머리》에 실려 있는 단편 몇몇은 경험의 잣대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이는 그가 젊은 나이에 소설을 쓰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70년대에 등단했지만 활발히 소설을 창작한 시기는 90년대 이후이다. 그때 그의 생물학적인 나이는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선다.) 한국 문단이 20대에서 30대의 젊은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별난 존재였다. 더군다나 몇십 년 동안 번역가로서 쌓은 공부의 내공을 소설 속에 온전히 투영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지적인 작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는 그의 소설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딱 그만큼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도 <하늘의 문>, <뿌리와 날개>, <만남> 정도다. 특히 처음 쓴 장편소설 <하늘의 문>은 그가 쓴 소설들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그의 삶의 경험이 오롯이 반영된,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을 겨냥한 야심작이다. 주인공 이유복은 한국과 미국을 떠돌면서 살고 있으며 자기 시점에서 삶의 내력을 이야기한다. 소설을 끝까지 일관하고 있는 모티프는 젊었을 적 사랑했던 여자와의 헤어짐과 재회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별은 이야기-과거에 존재하고, 이야기-현재 속에서 이별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화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다. (소설의 정수는 연애소설이다. 이건 대중음악의 정수가 사랑노래라는 것과는 차원과 유를 달리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를 보라.) 그리고 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를 찾고 있다.

 

<하늘의 문>은 ‘저자 후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윤기가 살아온 개인적 삶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인공은 동서고금의 신화와 종교의 프리즘을 통해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술은 저자로서의 이윤기의 에세이즘에 맞닿아 있다.(실제로 그는 읽을 만하며 품격 있는 에세이를 쓴 몇 안 되는 작가이다.

 

인문적 교양과 이를 통한 삶과 문화의 이해를 서술 차원에서부터 전면화하고 있는 그의 소설 속 진술은 간혹 에세이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윤기도 고백한 바 있다. 자기가 했던 얘기를 다른 작품에서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더라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주인공의 사적인 경험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도, 저자 이윤기와 주인공 이유복을 겹쳐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한국소설에서 베트남전쟁이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 형상화된 예는 없는 듯하다. 베트남전쟁을 다루고 있는 한국소설들은 작가의 경험을 주로 역사적 차원으로 밀고 나간다. 이를테면 <하늘의 문>의 주인공 이유복은 베트남전쟁의 포화 속에서 한가롭게도 헤밍웨이와 오헨리, 포크너를 원서로 처음 접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베트남전은 역사적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고, 비로소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된다. 이것은 이윤기 소설이 한국 문단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위상과도 관련되는데, 그와 연배가 비슷한 작가들이 분단 현실 같은 역사적 상상력의 자장 속에서 창작의 영토를 개척했다면 이윤기는 이와는 다른 지점에서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 그가 70~80년대가 아닌 90년대에 들어서야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는 점도 이런 부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윤기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또한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서술자가 너무 똑똑하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전지적 서술자와는 개념적 범주가 다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지적 서술자는 굳이 신화와 종교 상징에 대해 애써 말해 주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독자들은 서술자의 존재를 눈치챌 것이고 서술의 투명성은 깨지고 만다. 이윤기 소설에서 1인칭 서술자가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의 문>의 자전적 특징은 작가의 체험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기보다는, 작가의 체험(이윤기의 삶의 연대는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번역과 오랜 공부를 통해 온축된 사람살이의 복잡한 이치에 대해 그 나름대로 해석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유복은 (옛)사랑을 다시 만났던가? 이유복의 아들은 그를 찾아냈던가? 우리의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고 페넬로페와 재회할 수 있었을까? <하늘의 문>은 이윤기가 자신의 ‘쿵푸’를 정리하면서 허구의 세계로 발을 디딜 무렵에 쓴 흥미로운 텍스트이자, 그만의 <오디세이아>인 것이다.

 

이윤기 선생이 8월 27일 심장마비로 별세하셨다. 선생은 내 아버지 세대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세대의 점잖고 따뜻한 목소리가 그리울 때 선생의 책을 들춰보게 될 거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영웅은 어디로 귀환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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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전후 독일의 세대 갈등(또는 세대간의 이해가 가능한지)에 관한 멜랑콜리한 알레고리이다. 1950년대 독일 지방도시에서 열다섯살의 소년 미하엘 베르크와 삼십대 중반의 한나 슈미츠의 에로틱한 사랑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하엘은 한나의 육감적인 몸에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이 세상에 다만 혼자뿐인 한나는 미하엘을 거부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 이들의 만남에 대한 편견은, 성인 여자와 어린 소년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습적인 질시이다. 성인 여자와 어린 소년의 관계는 성인 남자와 어린 소녀의 관계보다도 더 못할 짓으로 비쳐진다. 그러니 한나와 미하엘의 만남은 처음부터 평등하지 못했다.

 

미하엘은 한나를 떳떳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녀를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수영장에서 그녀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미하엘은 자신의 배신 때문에 한나가 자기를 떠났다고 여기며 죄책감에 시달린다.(미하엘의 두 번째 회상에서 암시되듯이, 수영장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지 미하엘의 상상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이 도시를 떠난 건, 전혀 뜻밖의 일 때문이었다.

 

한나와 미하엘이 다시 만난 건 수년 후 전쟁범죄자의 책임을 묻는 법정에서이다. 법대생으로서 세미나 준비를 위해 재판을 참관하게 된 미하엘이 피고가 되어 법정에 선 한나를 목격한다. 그녀는 제3제국 나치 치하에서 지멘스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자원하여 일했다. 여기서 그녀가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중요해진다. 지멘스,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 전후에는 전차 차장으로 근무했는데 더 좋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리를 옮긴 것이다. 즉 한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남들에게 증명해야 할 때 그 자리에서 떠났다. 왜 그녀는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이를 포기해야만 했던 것일까?  

 

한나는 재판을 받으며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떳떳하게' 시인한다. 유대인들을 이송하면서 발생한 폭격 때 교회 건물에 갇힌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이 대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테제다. 전쟁부역자들은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그저 성실하게 수행한 것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징적으로 말해 그들은 일종의 문맹(文盲)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문맹'의 비유를 든 건 뒤에서 분명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나와 함께 재판장에 선 다른 수용소 감시원들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혐의를 한나에게 뒤집어씌우기에 바쁘다. 한나가 전쟁시 모든 문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한나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딱 부러지게-때로는 뻔뻔할 정도로- 구별하면서도, 문서에 서명을 한 것이 그녀가 맞느냐는 재판관의 추궁에는 마지못해서, 하지만 '당당하게' 시인한다. 그러나 다른 감시원들의 모함도, 그녀의 시인도 진실이 아니다.   

  

다시 미하엘과 한나가 사랑했던 순간으로 돌아와보자. 15살 '꼬마'와 삼십대 중반의 여자가 사랑하는 방식은 다음의 인용문이 가장 잘 보여줄 듯하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이것이 우리의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50~51쪽) 

 



한나는 미하엘에게 다른 것도 아닌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한다. 소설의 제목을 연상시키는,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한나만을 위한 사랑의 '의식'이었다. 미하엘이 한나를 위해서 해준 거의 유일한 사랑의 행위. 한나는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을 통해서,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녀는 문자에 의해 이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미하엘이 감옥에 있는 한나와 소통하는 방식도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다만 예전처럼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여 감옥으로 보냈다. 다른 어떤 말도 들어가 있지 않은 단지 책을 읽어주는 미하엘의 음성이 다시 한나에게 전달된다. 미하엘이 유일하게 해줄 수 있었던 사랑의 행위. 그러나 이것은 예전처럼 사랑의 의식으로서의 책을 읽어주는 행위와 같을 수 없었다. 그저 그 의식을 (카세트테이프에) 재생시킨 것에 불과했다. 미하엘은 한나에게 단 한 번도 찾아가거나 편지하지 않았다. 그 심리적 동기는 다음의 고백을 통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한테 있어 그토록 마음 편하게 가깝고도 멀리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실제의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만 그녀가 과거에 지녔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실제의 근접성을 견디기에는 그녀의 안부 편지와 나의 카세트테이프의 작고 가볍고 안전한 세계가 너무 인위적이고 다치기 쉽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 사이에 벌어진 그 모든 것을 떠올리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단 말인가.(210쪽)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부분-과거와 현재의 감정의 상태를 비교하여 짐작해볼수 있는-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슬펐다. 다름 아닌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사랑이 끝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하엘에게 한나는 과거의 사랑이지 현재의 사랑이 될 수 없다. 슬프지만 그게 정직한 진실이다. 그녀의 몸에서 나던 '신선한 향취'가 더이상 나지 않는다는 미하엘의 감각은, 사랑이 다했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나는 한나 옆에 앉아서 노파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214쪽)

 

<책 읽어주는 남자>는 연애소설이다. 연애의 담론은 형이상학적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영민한 작가들은 사랑에 관한 담론이 첨예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밀란 쿤데라를 보라.) 슐링크가 중년의 여인과 소년의 사랑을 설정한 것은,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가 서로를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정치적 화두에 대한 탐구의 동기에서 출발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일종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한나가 '문맹'이라는 점은 세계를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맹은 여기서 단순히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윤리적 통찰의 가능 여부를 의미하게 된다. 그녀는 불타는 교회의 문을 열어주어 유대인들을 살려야 한다는, 그러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죽게 된다는 윤리적 판단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한나의 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근대적 관료사회에서라면(더군다나 어떠한 지성적 판단도 불가능한 전쟁이라면) 한나처럼 행동하지 않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신이 직장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그래도 사람 생명을 다루지 않으니, 한나보다는 낫겠지.) 관료사회, 그것도 전쟁 치하라면 관료적 명령의 경계를 위반하는 것에 누가 선뜻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성을 수반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한나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나의 문맹은 독일 전쟁세대의 선험적 한계를 의미한다.(여기서 말하는 '전쟁세대'에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범자들을 포함시킬 순 없을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경험했던 '문맹'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그 문맹이 의미하는 바가 상징적이기 때문에, 한나의 선험적 고통은 미하엘이 공유할 수 있는 그건 것이 아니다. 한나가 자신의 문맹을 끝까지 감추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무도 그녀가 느꼈을 내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넌 알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야."- 216~217쪽) 그렇다면 한나와 미하엘의 사랑은 관계 그 자체의 불평등함에 의해서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또는 관계의 불평등함을 극복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아닐까.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로써 한나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하게 그녀의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잠시나마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위안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수감 생활중에 마침내 문맹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뼈를 깎는 배움의 힘든 과정을 스스로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미하엘이 아니라, 슬프게도 오직 그녀 자신이었다. 미하엘은 끝내 한나를 비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미하엘이 사랑했던 여자였다. 그의 사랑도 그녀를 구원할 수 없었는데, 그가 어찌 그녀를 욕할 수 있겠는가.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전후 세대는 전쟁 세대와 어떻게 화해할 있을 것인가.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이해와 비난의 딜레마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실존으로 우회하고 있다.  

 

한나는 끝내 가석방을 앞두고 자살한다. 미하엘이 그녀를 데리러 오기로 한 약속을 뒤로 하고. 나는 그녀가 죽은 심리적 동기에 대해서 짚이는 바가 있지만,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랑과 평등에 관한 중요한 쟁점을 지닌 결말이라는 점만은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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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조너선 프랜즌 지음, 홍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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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는 꽤 되었다. 리뷰를 쓰는 취지는 아니고, 방대한 소설을 한 권 읽었으니  흔적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요량일 뿐이다.

 

조너선 프랜즌을 처음 본 것은 <타임스>에서였다. 스티븐 킹 이후에

<타임스> 표지모델이 된 소설가는 이 저자가 처음이란다. 상업적으로도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은 패티 버글런드라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남편 월터와 그의 아들딸들, 그리고 그들의 단짝친구인 캐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국 중산층 가족구성원들을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3인칭 시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상당 분량을 패티 버글런드의 수기(자서전)로 배치하고 있다. 그녀의 자서전도 3인칭이긴 하지만.(조너선 프랜즌의 창작 원칙이 한 일간신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특별한 형식적 고려가 아니라면 3인칭으로 소설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관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의 모티프는 미국 중산층의 중년 여자의 삶에 대한 권태와 이로 인한 삶의 중요한 위기 국면에 관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권태와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현재 미국 중산층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지한 취지에서 문학적 탐색을 시도한다. 그녀를 지금 이렇게 만든 건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물음이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730쪽에 달하는 중량감이 있는 작품인 점도 이채롭다.

미국 쪽에서도 이러한 본격문학이 잘 나오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한 (지금은) 보기 드문 작가의 진지함 때문에 미국의 독자들이 열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도 본격소설들의 위상보다는 장르문학 쪽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것이다. <자유>의 이례적인 성취가 다른 소설들과 구별시켜 놓는다. 현대 미국소설 하면 형식적 실험을 전면에 내세운다거나(소위 포스트모던한 소설들) 상업적으로 어필할 만한 극적 전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그런 것들보다는 톨스토이가 했던 성취를 재현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 속에서  톨스토이의 소설<전쟁과 평화>가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 중산층 사람들의 정치적 지형도나 9.11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복잡미묘한 태도 등이 직접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대두되고 있는 점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오바마 이후 미국인들이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지, 부시가 그들에게어떤 지도자였는지도 작가는 은연중 에 말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전망 또는 비관적인 전망도 쉽게 하지 않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는 인상적이다. 당연하게도 소설의 존재 이유가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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