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드라마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연애를 소재로 하는 한국의 드라마들에서 재벌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에 나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면서 재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재벌과 연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허구의 서사텍스트가 있을 법한 일(있었던 일이 아니고, 있어야 할 일도 아니다.)을 조직화하여 제시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재벌과의 연애를 허구한 날 갖다 써먹는 한국의 TV멜로드라마는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되기에는 진작에 글러먹은 것이다.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응당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 싶겠지. 하지만 그러한 독자들의 냉정한 비평을 무디게 하는, 그런 이상한 다소 뭔가 과잉이 있다 싶은데 그 과잉마저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 글은 그 과잉의 정서의 정체와 흔적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시크릿가든>은 남녀의 사랑이 계급 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세계관을 반복하는 TV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시크릿가든>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는 흔해 빠진 TV드라마의 클리셰이다. 이런 TV드라마가 타킷으로 설정하고 있는 시청자는 20~30대 여성들이다. ‘드라마퀸’이라는 용어가 생긴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드라마를 소프 오페라(soap opera, 드라마 제작에 소용된 광고의 주체가 비누회사였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TV멜로드라마의 주요 시청자가 여성-주부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멜로드라마를 남자가 보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TV멜로드라마는 타깃 시청자를 여성으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젠더-성차에 기반하고 있다는 수용적 측면의 전제를 설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TV멜로드라마에서 재벌 남자주인공의 잦은 등장을 수용하게 되는 심리적 근거는 여성들의 연애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의도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앞에 나타나 구질구질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거라는 일종의 변용된 ‘가족로맨스’라고 할까. 그게 아니라면 대한민국에서는 재벌 남자 만나기가 쉬운 일이든가, 그 재벌 남자들이 한결같이 ‘사회지도층’으로서 평등의식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든가.
2.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시크릿가든>은 남녀 주인공 간에 계급 차를 두고 그 사회적 낙차를 서사 동력으로 삼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이다. 재벌 3세인 김주원(현빈)과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이 어떤 감정의 과정과 교류를 통해 실현되는지가 드라마의 최종 목적이었다. 사랑은 낭만적 열정이며 세계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다. 반면에 계급은 현실적 조건이며 세계에 대한 비관적 태도이다. 사랑과 계급은 서로를 불신하며 접점을 찾지 못한다. 둘은 만나서 사랑할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사랑은 우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우연은 최초의 만남이다. 만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둘 간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계기이기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거대한 ‘사건’이다.(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 길, 2010에서 사랑이 ‘진리의 절차’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남녀 간의 만남을 철학적 의미로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존재론이 간과했던 ‘사건’은 현대철학의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김주원이 박채린의 대역이었던 길라임을 박채린으로 잘못 알았던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지만 그들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사건’이 된다.
에로스와 철학적 진리의 절차적 상동성에 관한 대화
<시크릿가든>이 여성들에게 강렬하게 수용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드라마가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감정의 과정을 호소력 있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을 ‘일생일대의 인수합병의 기회’ 정도로 생각하는 남자가 가난하고 학벌 안 되고 조건 안 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도대체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인가. <시크릿가든>은 김주원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설득력 있게 그 추이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로서의 특장을 발휘한다. 여성 시청자들이 열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주원은 여성들이 반할 만한 여러 조건을 지닌 남자로서, 본인 스스로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런 남자는 여자를 성적 대우로서 존중하지 않기 십상이다. 김주원의 여성관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계급의식과 권력관계가 관여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사랑이 두 인격 간의 동등한 입장에서의 교류가 아닌, 자기 편의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거라든가 사회경제적 조건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교환가치가 성립하는 집단끼리의 결연으로 전락할 때, 개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낭만적 사랑의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말하듯이 여자는 그에게 두 부류였다. 잠깐 놀다가 치워버릴 여자(이게 그가 말하는 인어공주다)와 인수합병의 기회가 될 조건 되는 여자. 김주원의 이러한 여성관은 실상 여성혐오증(misogyny)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잠깐 놀다가 싫증이 나면 치워버릴 여자는 욕망 충족의 대상일 뿐이고, 조건이 되는 여자는 물적 교환의 중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김주원은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길라임이 눈앞에 등장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주원과 길라임은 외적 조건에 있어서 현저하게 다르다. 이 다름은 물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계급 차다. 근대 민주주의 테제가 평등을 규범화하여 ‘정치적 차별’을 금지했지만,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는 ‘차별의 정치’는 여전히 공고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계급은 정치적 지배를 할 수 없을 때 불평등과 차별로써 직접적 지배를 대신한다. 그것이 바로 계급 작동의 원리이다.(흥미롭게도 5회에서 길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김주원은 자기 계급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보여준다. ‘사회지도층’의 자기 패러디라고 할까. 바로 앞 문장은 김주원의 말을 옮겨 쓴 것이다. 기득권 계급으로 등장하는 김주원의 계급 인식은, 사랑의 서사가 겨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게 될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TV멜로드라마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각주로서, 드라마의 자기 인식이라 할 만하다.)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감정의 동요를 느꼈을 때 자문하는 바도 바로 그 지점이다. 나 같은 사람이 왜 아무 볼 것 없는 여자에게 흔들리고 있는가.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현실이라는 구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끈 떨어진 길라임의 가방에 대한 김주원의 반응은 그래서 윤리적이다. 네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그 거지 같은 꼴로 내 앞에 있을 수는 없다는. 그는 연민이나 동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의 현실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이는 그가 그녀를 대상이 아닌 관계의 주체로서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길라임은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지만) <시크릿가든>의 서사적 길항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김주원과 길라임이 서로 교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드라마의 라이트모티프라고 할 수 있는 영혼/몸의 교환이라는 설정은 그러한 탐색에 필요한 수단이다.)
한편 길라임이 김주원에게 반응하고 있는 지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른 여자들이 김주원의 조건에 먼저 반응할 때 길라임은 자기 조건과 경제적 위치에서 그녀를 판단하려는 김주원의 시선을 완강하게 부인한다. 삼신할머니의 랜덤한 선택으로 금수저 물고 태어난 김주원의 경제적 조건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순 없다. 그녀는 그의 인어공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야이 미친놈아, 네가 잠깐이면 나는 자동으로 잠깐이냐?” “갖고 노니까 열 받지?” “세상 어떤 여자도 끝을 내놓고 사랑하지는 않아.” 길라임의 말들은 위치의 불평등 아래에서는 ‘너와 나의’ 사랑이 가능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길라임은 김주원 앞에서 자존감 하나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녀의 자존감은 그의 사랑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었다.
3. 사랑, 잃어버린 거울에 대한 탐색
융(C. G. Jung)은 남자가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을 때, 즉 ‘그 여자’라는 걸 직감했을 때의 현상을 그의 내부에 있는 아니마(anima)에 대한 반응이라고 했다.(C. G. 융 편저, 정영목 옮김, <사람과 상징>, M. L. 폰 프란츠, ‘개체화과정’, 218쪽, 까치, 1995) 아니마는 남성의 영혼 안에 있는 여성성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자아의 전체(self)에 대한 이원론적인 설명이다. 자아는 아니무스(animus)라는 남성성과 아니마라는 여성성이 통합된 전체로서 존재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가 부족하다면 이는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핍된 상태는 보충을 통해 통합을 지향한다. 때문에 사랑은 자기 안에 결핍된 아니무스(여성일 경우) 또는 아니마(남성일 경우)에 대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자아의 일부로서 이상적 아니마를 그 여자에게 발견할 수 있거나 투사할 수 있을 때이다.
신화, 종교, 예술에 남아 있는 집단무의식에 관한 분석심리학의 탐구. 이 판본은 절판이 된 상태이고, 지금은 돌아가신 이윤기 선생이 번역한 <인간과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김주원이 계급이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구획된 삶의 행로와 가능성을 거슬러 길라임을 향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근거는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주원이 자기와 비슷한 계급적 조건에 있는 여자를 사갈시할 수 있었던 근거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재벌3세라는 외적 조건이 그의 영혼까지 잠식했더라면 그가 길라임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주원이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오히려 그는 스무 살 때 일어난 사고로 폐쇄공포증이라는 심리적 외상에 시달리는 심약한 인물이다. 이 증상은 길라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기인하는 현상으로서, 모종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독일의 정신분석가 오토 페니켈은 폐쇄공포증 및 질식에 대한 두려움을 어머니-자궁 속에 안주하고 싶은 자궁 환상에 대항하는 방어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김주원의 어머니가 김주원의 사랑을 금지하고자 하는 초자아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김주원의 폐쇄공포증은 흥미로운 모티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김주원은 재벌3세로서 겉으로 보이기엔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는 시를 읽는 낭만적 감수성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현실에서 김주원이 읽었던 시와 소설들이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붐이 일어날 정도로, 그를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캐릭터로 설정한 것은 성공적인 입상화(立像化)라고 볼 수 있다.(물론 ‘현빈’이라는 기표의 역할 수행이 더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가 책을 읽든 피아노를 치든 그 차이는 크지 않다.) 융이 설정한 아니무스의 네 단계 가운데 가장 하위의 수준이 육체적 남성성이고 가장 상위의 수준이 영적인 심오함이었음을 떠올리면(M. L. 폰 프란츠, 앞의 글, 234~235쪽), 김주원의 캐릭터를 재벌3세라는 외면적으로 화려한 인물로서보다는 내적인 탐색을 수행하는 신화적인 ‘남성-영웅’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웅이 내면적 탐색을 통해 찾고자 하는 바가 어떠한 정신적 깨달음이라고 했을 때, 김주원이 인수합병의 기회를 충족시킬 여자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강건한 길라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한편 길라임은 인어공주는 물론이려니와 신데렐라조차 되기를 거부한다고 했다. 인어공주와 신데렐라라는 페르소나는 김주원의 욕망의 대상이거나 김주원을 위한 잠정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여기서 길라임이 요구했던 바는 역으로 김주원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 그는 계급적 동일성에 기반하는 정략결혼이 일생의 인수합병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불과하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자기 복제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길라임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면서 계급적 차이에도 불과하고 자신이 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스턴트우먼이라는 길라임의 직업이 남성적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도 아니마-아니무스의 지향성 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몸/영혼이 바뀐다는 판타지의 설정도 아니마/아니무스에 대한 탐색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김주원은 길라임이 됨으로써 길라임이 자신의 아니마라는 걸 경험한다. 길라임 역시 김주원이 되어봄으로써 자신의 아니무스를 체험한다. 이는 그들이 자아의 전체성을 지향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의례를 통과하는 데 더없이 적절한 사건이다.


<시크릿가든>에서 가장 중요한, 같은 구도의 두 개의 이미지. 김주원은 길라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잠들어 있는길라임 옆에 나란히 눕는다.(아래) 미간에 손을 올려보지만 그녀는 혼곤하게 잠든 채 깨지 않는다. 다시 스턴트팀의 엠티에서 잠들어 있는 길라임 옆에 누워 그녀를 바라보는 김주원.(위) 마치 수면 위에 손을 갖대 대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김주원이 미간에 손을 댔을 때 길라임은 잠에서 깨어난다. 플롯과 스토리의 관계에서 두 이미지의 시간적 배치는 역전되어 있다. 김주원의 기억 깊은 곳에 있던 아래의 이미지는 드라마의 최종회에서야 드러난다. 위의 이미지는 아래 이미지의 재현이자 반복이다. 사랑에 관한 운명론적 또는 결정론적 시각을 차용하고 있는 신화적 알리바이. 망각 저편에 놓여 있던 김주원의 길라임에 대한 레미니상스(reminiscence). 응시, 망각되었던 기억의 재현, 잃어버렸던 자아-이상과의 재회, 그래서 거울의 텍스트.
사랑이 자아의 결핍된 요소를 보충하여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든, 자아-이상을 욕망하거나 투사하는 것이든 간에 하나의 전체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사랑은 자아의 신화를 재건하려는 몸짓이며, 잃어버린 자아 또는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이상에 대한 추구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거울에 대한 애타는 응시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응시는 자기의 얼굴을 비추는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정신적 숭고와 아름다움에 대한 안타까운 매혹이라는 점에서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거울에 대한 탐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