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활약한 소설가이다.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지만 번역가로 명성을 떨치고 신화 관련 저작으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대학시절에 그의 소설을 몇 권 읽었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 보면, <하늘의 문>(3권) <뿌리와 날개> <만남> <진홍글씨> <나비넥타이> <내 시대의 초상> 정도가 내가 읽었던 소설들이다. 여기서는 그가 처음 펴낸 장편소설 <하늘의 문>에 대해서 아주 사적인 독서 체험을 이야기할 것이다.

 

20대에 읽었던 이윤기의 소설을 과연 제대로 이해했을까? 그의 소설은 난해하다거나 자의식으로 충만하다거나 형식적 전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겉으로 봐서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그가 질문하고 있는 메시지들은 20대의 천둥벌거숭이인 나로서는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을 듯하다.(《나비넥타이》와 《두물머리》에 실려 있는 단편 몇몇은 경험의 잣대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이는 그가 젊은 나이에 소설을 쓰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70년대에 등단했지만 활발히 소설을 창작한 시기는 90년대 이후이다. 그때 그의 생물학적인 나이는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선다.) 한국 문단이 20대에서 30대의 젊은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별난 존재였다. 더군다나 몇십 년 동안 번역가로서 쌓은 공부의 내공을 소설 속에 온전히 투영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지적인 작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는 그의 소설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딱 그만큼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도 <하늘의 문>, <뿌리와 날개>, <만남> 정도다. 특히 처음 쓴 장편소설 <하늘의 문>은 그가 쓴 소설들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그의 삶의 경험이 오롯이 반영된,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을 겨냥한 야심작이다. 주인공 이유복은 한국과 미국을 떠돌면서 살고 있으며 자기 시점에서 삶의 내력을 이야기한다. 소설을 끝까지 일관하고 있는 모티프는 젊었을 적 사랑했던 여자와의 헤어짐과 재회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이별은 이야기-과거에 존재하고, 이야기-현재 속에서 이별은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화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다. (소설의 정수는 연애소설이다. 이건 대중음악의 정수가 사랑노래라는 것과는 차원과 유를 달리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를 보라.) 그리고 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를 찾고 있다.

 

<하늘의 문>은 ‘저자 후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윤기가 살아온 개인적 삶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인공은 동서고금의 신화와 종교의 프리즘을 통해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술은 저자로서의 이윤기의 에세이즘에 맞닿아 있다.(실제로 그는 읽을 만하며 품격 있는 에세이를 쓴 몇 안 되는 작가이다.

 

인문적 교양과 이를 통한 삶과 문화의 이해를 서술 차원에서부터 전면화하고 있는 그의 소설 속 진술은 간혹 에세이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윤기도 고백한 바 있다. 자기가 했던 얘기를 다른 작품에서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더라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주인공의 사적인 경험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도, 저자 이윤기와 주인공 이유복을 겹쳐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한국소설에서 베트남전쟁이 개인적인 경험 차원에서 형상화된 예는 없는 듯하다. 베트남전쟁을 다루고 있는 한국소설들은 작가의 경험을 주로 역사적 차원으로 밀고 나간다. 이를테면 <하늘의 문>의 주인공 이유복은 베트남전쟁의 포화 속에서 한가롭게도 헤밍웨이와 오헨리, 포크너를 원서로 처음 접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베트남전은 역사적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고, 비로소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된다. 이것은 이윤기 소설이 한국 문단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위상과도 관련되는데, 그와 연배가 비슷한 작가들이 분단 현실 같은 역사적 상상력의 자장 속에서 창작의 영토를 개척했다면 이윤기는 이와는 다른 지점에서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 그가 70~80년대가 아닌 90년대에 들어서야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는 점도 이런 부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윤기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또한 문제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서술자가 너무 똑똑하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전지적 서술자와는 개념적 범주가 다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지적 서술자는 굳이 신화와 종교 상징에 대해 애써 말해 주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독자들은 서술자의 존재를 눈치챌 것이고 서술의 투명성은 깨지고 만다. 이윤기 소설에서 1인칭 서술자가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의 문>의 자전적 특징은 작가의 체험이 반영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기보다는, 작가의 체험(이윤기의 삶의 연대는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번역과 오랜 공부를 통해 온축된 사람살이의 복잡한 이치에 대해 그 나름대로 해석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유복은 (옛)사랑을 다시 만났던가? 이유복의 아들은 그를 찾아냈던가? 우리의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제시한 수수께끼를 풀고 페넬로페와 재회할 수 있었을까? <하늘의 문>은 이윤기가 자신의 ‘쿵푸’를 정리하면서 허구의 세계로 발을 디딜 무렵에 쓴 흥미로운 텍스트이자, 그만의 <오디세이아>인 것이다.

 

이윤기 선생이 8월 27일 심장마비로 별세하셨다. 선생은 내 아버지 세대이다. 그래서 선생의 글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세대의 점잖고 따뜻한 목소리가 그리울 때 선생의 책을 들춰보게 될 거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영웅은 어디로 귀환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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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전후 독일의 세대 갈등(또는 세대간의 이해가 가능한지)에 관한 멜랑콜리한 알레고리이다. 1950년대 독일 지방도시에서 열다섯살의 소년 미하엘 베르크와 삼십대 중반의 한나 슈미츠의 에로틱한 사랑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미하엘은 한나의 육감적인 몸에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이 세상에 다만 혼자뿐인 한나는 미하엘을 거부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 이들의 만남에 대한 편견은, 성인 여자와 어린 소년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습적인 질시이다. 성인 여자와 어린 소년의 관계는 성인 남자와 어린 소녀의 관계보다도 더 못할 짓으로 비쳐진다. 그러니 한나와 미하엘의 만남은 처음부터 평등하지 못했다.

 

미하엘은 한나를 떳떳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녀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그녀를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수영장에서 그녀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미하엘은 자신의 배신 때문에 한나가 자기를 떠났다고 여기며 죄책감에 시달린다.(미하엘의 두 번째 회상에서 암시되듯이, 수영장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지 미하엘의 상상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이 도시를 떠난 건, 전혀 뜻밖의 일 때문이었다.

 

한나와 미하엘이 다시 만난 건 수년 후 전쟁범죄자의 책임을 묻는 법정에서이다. 법대생으로서 세미나 준비를 위해 재판을 참관하게 된 미하엘이 피고가 되어 법정에 선 한나를 목격한다. 그녀는 제3제국 나치 치하에서 지멘스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자원하여 일했다. 여기서 그녀가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중요해진다. 지멘스,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 전후에는 전차 차장으로 근무했는데 더 좋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리를 옮긴 것이다. 즉 한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남들에게 증명해야 할 때 그 자리에서 떠났다. 왜 그녀는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이를 포기해야만 했던 것일까?  

 

한나는 재판을 받으며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떳떳하게' 시인한다. 유대인들을 이송하면서 발생한 폭격 때 교회 건물에 갇힌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이 대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테제다. 전쟁부역자들은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그저 성실하게 수행한 것뿐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징적으로 말해 그들은 일종의 문맹(文盲)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문맹'의 비유를 든 건 뒤에서 분명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나와 함께 재판장에 선 다른 수용소 감시원들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혐의를 한나에게 뒤집어씌우기에 바쁘다. 한나가 전쟁시 모든 문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한나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딱 부러지게-때로는 뻔뻔할 정도로- 구별하면서도, 문서에 서명을 한 것이 그녀가 맞느냐는 재판관의 추궁에는 마지못해서, 하지만 '당당하게' 시인한다. 그러나 다른 감시원들의 모함도, 그녀의 시인도 진실이 아니다.   

  

다시 미하엘과 한나가 사랑했던 순간으로 돌아와보자. 15살 '꼬마'와 삼십대 중반의 여자가 사랑하는 방식은 다음의 인용문이 가장 잘 보여줄 듯하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또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이것이 우리의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50~51쪽) 

 



한나는 미하엘에게 다른 것도 아닌 책을 읽어줄 것을 요구한다. 소설의 제목을 연상시키는,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한나만을 위한 사랑의 '의식'이었다. 미하엘이 한나를 위해서 해준 거의 유일한 사랑의 행위. 한나는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을 통해서,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녀는 문자에 의해 이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미하엘이 감옥에 있는 한나와 소통하는 방식도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다만 예전처럼 대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여 감옥으로 보냈다. 다른 어떤 말도 들어가 있지 않은 단지 책을 읽어주는 미하엘의 음성이 다시 한나에게 전달된다. 미하엘이 유일하게 해줄 수 있었던 사랑의 행위. 그러나 이것은 예전처럼 사랑의 의식으로서의 책을 읽어주는 행위와 같을 수 없었다. 그저 그 의식을 (카세트테이프에) 재생시킨 것에 불과했다. 미하엘은 한나에게 단 한 번도 찾아가거나 편지하지 않았다. 그 심리적 동기는 다음의 고백을 통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한테 있어 그토록 마음 편하게 가깝고도 멀리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실제의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만 그녀가 과거에 지녔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실제의 근접성을 견디기에는 그녀의 안부 편지와 나의 카세트테이프의 작고 가볍고 안전한 세계가 너무 인위적이고 다치기 쉽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 사이에 벌어진 그 모든 것을 떠올리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단 말인가.(210쪽)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부분-과거와 현재의 감정의 상태를 비교하여 짐작해볼수 있는-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슬펐다. 다름 아닌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사랑이 끝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하엘에게 한나는 과거의 사랑이지 현재의 사랑이 될 수 없다. 슬프지만 그게 정직한 진실이다. 그녀의 몸에서 나던 '신선한 향취'가 더이상 나지 않는다는 미하엘의 감각은, 사랑이 다했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나는 한나 옆에 앉아서 노파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214쪽)

 

<책 읽어주는 남자>는 연애소설이다. 연애의 담론은 형이상학적이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영민한 작가들은 사랑에 관한 담론이 첨예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밀란 쿤데라를 보라.) 슐링크가 중년의 여인과 소년의 사랑을 설정한 것은,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가 서로를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정치적 화두에 대한 탐구의 동기에서 출발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일종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한나가 '문맹'이라는 점은 세계를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맹은 여기서 단순히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윤리적 통찰의 가능 여부를 의미하게 된다. 그녀는 불타는 교회의 문을 열어주어 유대인들을 살려야 한다는, 그러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죽게 된다는 윤리적 판단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이 한나의 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근대적 관료사회에서라면(더군다나 어떠한 지성적 판단도 불가능한 전쟁이라면) 한나처럼 행동하지 않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신이 직장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떠올리면 된다. 우리는 그래도 사람 생명을 다루지 않으니, 한나보다는 낫겠지.) 관료사회, 그것도 전쟁 치하라면 관료적 명령의 경계를 위반하는 것에 누가 선뜻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성을 수반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한나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나의 문맹은 독일 전쟁세대의 선험적 한계를 의미한다.(여기서 말하는 '전쟁세대'에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범자들을 포함시킬 순 없을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경험했던 '문맹'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그 문맹이 의미하는 바가 상징적이기 때문에, 한나의 선험적 고통은 미하엘이 공유할 수 있는 그건 것이 아니다. 한나가 자신의 문맹을 끝까지 감추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무도 그녀가 느꼈을 내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을 테니까.("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넌 알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야."- 216~217쪽) 그렇다면 한나와 미하엘의 사랑은 관계 그 자체의 불평등함에 의해서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또는 관계의 불평등함을 극복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아닐까.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로써 한나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하게 그녀의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잠시나마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위안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녀가 수감 생활중에 마침내 문맹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도 뼈를 깎는 배움의 힘든 과정을 스스로 이겨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미하엘이 아니라, 슬프게도 오직 그녀 자신이었다. 미하엘은 끝내 한나를 비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미하엘이 사랑했던 여자였다. 그의 사랑도 그녀를 구원할 수 없었는데, 그가 어찌 그녀를 욕할 수 있겠는가.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전후 세대는 전쟁 세대와 어떻게 화해할 있을 것인가.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이해와 비난의 딜레마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실존으로 우회하고 있다.  

 

한나는 끝내 가석방을 앞두고 자살한다. 미하엘이 그녀를 데리러 오기로 한 약속을 뒤로 하고. 나는 그녀가 죽은 심리적 동기에 대해서 짚이는 바가 있지만,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랑과 평등에 관한 중요한 쟁점을 지닌 결말이라는 점만은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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