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붕뚫고 하이킥>(이하 <하이킥>)의 마지막 방송은 TV드라마의 결말이라고 보기에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방송드라마의 경우 아무리 양보를 해도 스토리 라인의 가능한 두어 가지 결말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데도, <하이킥>은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결말이었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하이킥>의 장르적 특성에서 우선 기인한다. <하이킥>은 드라마 장르 가운데 코미디에 해당하는 이른바 '시트콤'(시추에이션 코미디)으로 설정되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 설정을 통한 드라마의 전개가 시트콤의 본래 목적이기에, 결말은 전체 드라마의 이야기의 문제들을 무난하게 해결하는 수준에서 봉합되는 게 관객들의 기대에도 부응한다. 가령 러브 라인을 정리해준다든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들이 문제를 극복하고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든가 하는 서사 판타지에 기반한 드라마의 기능을 수행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하이킥>은 TV드라마의 결말 구조를 깡그리 무시했다. 김병욱 감독은 한국 드라마 관객(독자)들을 한껏 롤러코스터를 태웠다가 종국에는 벼랑 끝에서 밀어버린 꼴이 돼버렸다. <하이킥>에 열광했던 관객들이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돌변하여 악플을 달고 마는 사태가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이킥>은 방송드라마(그것도 정극이 아닌, 시트콤이라는 드라마의 하위 범주에 속할 법한)의 결말 구조를 배신하고 철저하게 냉소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마지막 방송이 타기 전까지, 하이킥의 결말은 세경이 아버지와 해후하고 세경ㆍ지훈ㆍ준혁ㆍ정음의 러브 라인이 정리되는 수순에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게 일반적인 드라마 결말의 문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이 인물들의 러브 라인이 어떻게 연결될지가 핵심적인 관람 포인트였다. 준혁은 이미 세경에게 고백을 했으나, 세경은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다. 정음은 지훈의 구애를 멀리하고 왔으나, 그렇다고 지훈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마지막 회까지 러브 라인이 정리되지 않는 드라마는 사실상 이미 예외가 될 만하다. 마지막 회 10분 전까지 독자들의 이야기 예측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면, 이건 드라마의 이야기 문법을 한참 벗어난 파격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세경이 공항으로 떠나는 길에 마지막으로 지훈을 보기 위해 병원에 왔을 때 둘은 결국 엇갈리는 '운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훈이 대전 집에 내려가 있는 정음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 길에 둘은 만나게 된다. 지훈과 세경의 아슬아슬한 동선은 <하이킥> 결말의 행로로 이어진다. 결국 지훈이 대전으로 내려가기 전 세경을 공항까지 태워주기로 하고, 126회나 계속된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너무나 협소한, 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너무도 '진지한' 자동차 씬이 기다리고 있다.
시트콤은 인공적인 세트 촬영을 기본으로 하며, 중산층 가정의 거실과 방이 주요한 무대가 된다. <하이킥>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하이킥>의 결말은 자동차 안이라는 사실적 공간(실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빗소리와 자동차의 흔들림이 조절되지 않고 그대로 드라마의 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 마지막 씬은 드라마의 가공성을 상쇄하며 어떤 진실한 국면을 준비한다.

이전에 세경과 지훈이 대화할 때 그들을 잡는 카메라는 둘을 한꺼번에 잡지는 않은 듯하다. 부엌에 있는 세경과 부엌 밖의 지훈이 거리를 두고 각각 찍혔다. 즉 투샷으로 함께 화면에 담기기보다는 원샷 나눠찍기가 선호되었다. 그러니까 둘은 한 공간에 있어도 각각이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지훈은 이 집의 아들이자 잘나가는 의사이다. 하지만 세경은 허드렛일을 하는 '식모'이자 고등교육도 채 다 받지 못한 어린 여자애일 뿐이다. 식모는 60~80년대 고도성장기에 중산층 또는 부유층에서 집안일을 도맡았던, 지금의 가사도우미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이킥>에서 '식모'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했다는 사실은, <하이킥>이 계급의 문제를 이미 배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세경에 대한 지훈의 태도는 연민과 계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가 일방적이었다는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지훈과 세경은 126번의 만남 끝에 처음으로 평행한 시선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라는 공간이 주는 평등성은 둘의 시선의 높이와 (협소한 공간이라는 물리적 원인일 수도 있지만) 화면 안에 둘이 들어갈 수 있는 구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세경이 그토록 갈망했던 순간은 자동차의 좁은 공간 안에서야 실현이 된다. 세경과 지훈이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세경이 유심히 바라보던 그림의 제목은 '마지막 휴양지'(The Last Resort)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하이킥>의 결말은 이야기 선후 관계를 고려했을 때 그렇게 갑작스러운 게 아니다. 세경한테는 지훈과 함께하는 이 순간과 공간이 '최후의 휴양지'일 테니.
세경이 이민을 가기로 선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신애 때문이었다. 가난하기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언니 세경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가난해도 신애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아버지와 함께 가기로 한 곳은 타히티다. 타히티와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물리적 거리가 연상시키(암시하)는 심리적 거리감은 그들에게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세경이 이곳을 떠나고자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인 위계관계, 즉 계급 격차와 이로 인한 불평등함, 그리고 이것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자존을 지키며 살 수 없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연유한다.

반면에 이민을 주저하게 한 요인은 두 가지다. 검정고시를 봐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던 평범한 욕망. 학벌과 경제적 위계가 실질적인 계급을 결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식모'가 아닌 나이에 어울릴 법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졸업장과 대학 진학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보통의 기준에서 봐도 과분하다고 볼 수 없는 그저 너무나 평범한 욕망. 하지만 세경은 "그 사다리를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에 다다른다. 이것은 계급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다. 계급은 위와 아래라는 위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민을 가기로 한 선택은 한국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가 한계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또 다른 이유는 지훈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멜로드라마의 서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문제가 결국 <하이킥>의 결말 구조를 매듭짓는다. 사랑이 개인간의 사적인 감정의 교류일지라도, 공공의 이야기 공간에서 재현될 때는 당대의 사회적 상상력과 결부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녀의 사랑은 한번도 입 밖으로 발화되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간신히 터져나온다.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이는... 밥을 해도.. 빨래를.. 걸레질을 해도...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부끄럽고 비참했어요."

어린 여자가 처음으로 느꼈던 감정은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한, 태생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미 배치되어 있는 계급이라는 공고한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게 상처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누구보다도 세경이 공부를 해서 현실을 극복해나가길 지훈은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세경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게 분명해 보인 지훈조차도 그 감정을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동정이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계급의식이 그에게도 예외없이 작용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위치에 의해 배치되는 계급은 가시적인 권력관계에 의해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아주 사적인 개인간의 관계에도 '무의식'에 가까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그 무의식은 정치적이다. 민주주의라는 근대의 테제가 평등의 형식을 규범화했다고 하지만, 평등은 결코 규범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평등은 다다를 수 없는 '오브제 아'(objet a)로서, 이데올로기로써 기능한다.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한테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놓은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미소 지으며) 앞으로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지훈 반응샷) 다 와 가나요?"
"어..."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뭐?..."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훈, 세경 쪽을 '계속' 바라본다. 투샷. 흑백화면으로 전환되며 사운드 소거, '영원한' 포즈.)

지훈이 '빨간 실로 묶여 있는'(어느 편에선가 이야기 전개와 전혀 무관한 장면이 있었다. 20여 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 중간에 그런 장면이 삽입되는 건 이야기의 낭비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욕실에서 일하고 있는 세경에게 지훈이 느닷없이 빨간 노끈 없냐며 묻는 장면은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 뿐, 그 회에서 이야기 전개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필연성 없이 끼어드는 장면은 절대 없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그럼 그 장면의 의의는? 신화적 상징을 인용하여, 두 사람이 빨간 실로 묶여 있는 '운명'의 인연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킥>의 작가들은 알게 모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세경을 찾을 수 없었던 건, 계급이라는 정치적 무의식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그렇게 마지막에 세경은 깨질 수 없을 듯했던 강고한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화시킨다. 125회를 참아 왔던 견결한 고백은 처절하고 진실된 감정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이 순간, 좁은 공간과 그 짧은 시간은 그녀에게는 '행복'의 기준이 된다. 세경은 이제야 간신히 미소 지을 수 있지만, 그녀의 단순한 기쁨은 아이러니하게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고백하는 이 순간에도 세경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겸허하다. 그녀가 원하는 시간은 그저 '잠시'이다. 누구나 아무 의미 없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보다 더 진실될 수 없는 그녀의 겸허한 고백은 그들의 모든 운명의 갈림길을 제자리로 되돌려놓는다. "뭐?..." 지훈의 반문은, 그가 깨닫지 못했던 운명과 사랑에 대한 최초의 반응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처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한다. 더 이상 연민과 동정의 수직적인 시선이 아니라 (폭우 속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수한 의지로써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는 정면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흑백으로 화면은 전환되고 사운드는 꺼진다.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포즈(pause). 지훈이 세경에 해줄 수 있는 최초의 사랑.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해피엔딩은, 계급 차를 극복하여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계급 상승의 판타지를 제공한다. 세경과 지훈의 사랑은 그들의 '선택'으로써 한국사회의 계급적 관성에서 탈주함으로써, 멜로드라마의 이데올로기와 판타지를 배신한다. 이는 계급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판타지에 대한 비판이다. 한편, <하이킥>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비극성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전형성을 내파하며 멜로드라마의 정치적 상상력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잠시 시간이 멈춰 곧 끝나게 될 행복이 유예되길 바랐던 세경의 소망은 지훈의 자발적 수용을 통해 영원한 시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하이킥>은 팬들이 기대하고 있던 달콤한 결말, 즉 이데올로기적 봉합을 거부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자연화된 계급 인식과 이에 기반한 판타지에 정서적 충격을 남겼다. 드라마가 기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는 보수적 서사텍스트라는 인식을 스스로 부정하며, 비판적 텍스트로서 읽히길 바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