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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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히샴 마타르는 리비아 출신의 영국 작가로 이 작품으로 2017년 퓰리처상(전기, 회고록 부문)을 수상했으며, 한강 <채식주의자>와 함께 2016년 뉴욕타임스 최고의 책 10권에 선정되었습니다. 2006년 데뷔작 <남자들의 나라에서>로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소설가입니다.

 

<귀환>은 자기 아버지에 관한 논픽션입니다. 아버지가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였는데, 이집트 망명 중에 비밀요원에 납치되어 실종됩니다. 그 이후 리비아에 있는 정치범 교도소에 수감된 것으로 파악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소식이 끊깁니다. 그의 소설 두 작품(<남자들의 나라에서>, <실종의 해부학>)은 아버지의 부재를 모티프 삼아, 독재정권하에서의 리비아 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애초 아버지의 실종과 이에 따른 부재의 상황이 히샴 마타르 문학의 주요한 모티프인 것이지요.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하고 2년 뒤 히샴 마타르는 리비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생사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은 아버지의 남아 있는 흔적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귀환>은 세상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제3세계의 현실을 깊이 천착하는 작품입니다. 제3세계는 공히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경험을 하는데요. 리비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리비아는 20세기 초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침략과 지배를 당했습니다. 이 작품은 독재정권 이전의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기원을 다룹니다. 작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요.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식민 통치와 싸운 인물이었습니다. 작가의 아버지는 리비아의 독재정권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싸웠으며, 작가 히샴 마타르는 영국에서 카다피 정권의 반인권적 행태를 고발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니, 이들 3대의 이야기는 불의한 역사와 정치에 굴하지 않는 투쟁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쟁의 연대기는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지는 3대 간의 존경과 사랑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귀환>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 리비아의 역사와 현실을 배경으로, 무너져내린 한 가족의 참담한 슬픔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개인적인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역사와 현실을 매개로 공공적인 것으로 확장됩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리비아의 특수한 역사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의 근현대사와 닮아 있습니다. 한국도 일본 제국의 식민지를 경험하고, 수십 년이 넘게 독재정권이 지배했지요. 3세계의 역사적 공통 경험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분명히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되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도 있겠지요. 물론 독서라는 상상의 과정 속에서요.

 

한국의 현대문학 가운데 분단문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중 이문열, 김원일 소설의 시작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입니다. 소설가 김성동는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문학의 전통과도 맥이 닿아 있어서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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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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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퓰리처상 수상작. 2016년 뉴욕타임스 탑텐북스. 심지어 뉴욕타임스의 전설적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가 뽑은 그해 최고의 책. 수상 이력과 평가가 화려하다. 그래서 바로 구입. 와우, 근데 웬만한 스릴러 소설보다 더 긴장감 넘치게 진행된다. 다음 페이지, 내용이 궁금해지는 페이지 터너! 그것만이 아니다. 문득 책장을 넘기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오랫만에 문학적 감동과 지성적 산문정신을 겸비한 책을 읽었다. 아마 2018년 최고의 책 중 하나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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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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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추천사 때문에 이 책이 들어왔던 거 같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액스>를 차기작으로 점 찍어 놓았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얼만큼

열광하든 상관없이, 그를 매혹시킨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주주자본주의'는 고용의 유연성을 당연시하는 사회를 만들어놓았다.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자본의 무한증대를 위해서, 노동자가 '정리'될 수 있다는 현실.

그것을 자본주의의 횡포라고 비난하고들 있지만, 일상화된 폭력에서는 어쨌든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겉으로 분노할 순 있어도, 힘 없는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액스>의 주인공이 선택한 건, 고용 시장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인물들을

제거하는 방법, 살인이었다.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기에.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가 나를 해고하여 나의 목줄을 끊어 놓을 수 있듯이,

고용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경쟁자들의 목줄을 끊어 놓아야 한다는 게 주인공 데보레의

판단이다. 한 명씩 차례대로 그들을 처단하는 스토리가 냉정하고 그럴 듯한 주인공의 목소리로 전달된다.

 

범죄스릴러답게 범죄자의 말과 행동, 관점에 따라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의 서술에 수긍이 가는 구석이 있다면,

그건 우리도 그처럼 불안한 현실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또는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반영하는 게 아닐까.

그의 말을 아이러니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이야기의 상상력에 공감한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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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조너선 프랜즌 지음, 홍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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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는 꽤 되었다. 리뷰를 쓰는 취지는 아니고, 방대한 소설을 한 권 읽었으니  흔적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요량일 뿐이다.

 

조너선 프랜즌을 처음 본 것은 <타임스>에서였다. 스티븐 킹 이후에

<타임스> 표지모델이 된 소설가는 이 저자가 처음이란다. 상업적으로도

상당히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설은 패티 버글런드라는 여주인공을 둘러싼 남편 월터와 그의 아들딸들, 그리고 그들의 단짝친구인 캐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국 중산층 가족구성원들을 인물로 등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3인칭 시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상당 분량을 패티 버글런드의 수기(자서전)로 배치하고 있다. 그녀의 자서전도 3인칭이긴 하지만.(조너선 프랜즌의 창작 원칙이 한 일간신문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특별한 형식적 고려가 아니라면 3인칭으로 소설을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관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의 모티프는 미국 중산층의 중년 여자의 삶에 대한 권태와 이로 인한 삶의 중요한 위기 국면에 관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권태와 위기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현재 미국 중산층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지한 취지에서 문학적 탐색을 시도한다. 그녀를 지금 이렇게 만든 건 무엇일까. 도대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그런 물음이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한 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730쪽에 달하는 중량감이 있는 작품인 점도 이채롭다.

미국 쪽에서도 이러한 본격문학이 잘 나오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한 (지금은) 보기 드문 작가의 진지함 때문에 미국의 독자들이 열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도 본격소설들의 위상보다는 장르문학 쪽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것이다. <자유>의 이례적인 성취가 다른 소설들과 구별시켜 놓는다. 현대 미국소설 하면 형식적 실험을 전면에 내세운다거나(소위 포스트모던한 소설들) 상업적으로 어필할 만한 극적 전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그런 것들보다는 톨스토이가 했던 성취를 재현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 속에서  톨스토이의 소설<전쟁과 평화>가 인용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 중산층 사람들의 정치적 지형도나 9.11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복잡미묘한 태도 등이 직접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대두되고 있는 점도,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오바마 이후 미국인들이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지, 부시가 그들에게어떤 지도자였는지도 작가는 은연중 에 말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전망 또는 비관적인 전망도 쉽게 하지 않는 작가의 진지한 태도는 인상적이다. 당연하게도 소설의 존재 이유가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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