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친 걸 진작 알았다고 그때 엄만 말했어. 병원에서 연락 오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가 축대에서 떨어졌던 그 밤에 꿈을 꿨다고 했어. 다섯 살 모습으로 내가 눈밭에 앉아 있었는데, 내 뺨에 내려앉은 눈이 이상하게 녹지를 않더래. 꿈속에서 엄마 몸이 덜덜 떨릴 만큼 그게 무서웠대. 따뜻한 애기 얼굴에 왜 눈이 안 녹고 그대로 있나. - P82
내가 퇴원해서 함께 제주 집으로 돌아간 밤에 엄마는 한번 더 그 눈송이 이야기를 했어. 이번엔 그 꿈 이야기가 아니라, 그 꿈이 기원한 생시 이야기를. - P84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 P86
만약 전반적인 문화가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을 상대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마땅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게 부추긴다면 스스로 얼마나 오만해지겠으며, 그 자들이 이 모든 게 공동선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얼마나 비정하게 자기들만의 이득을 추구하겠는가? - P18
가슴을 씻지는 못하더라도 그나마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다독거려주는 것은, 그것은 성(城)도 아니고 들도 아니고 산이었다. 또 집도 아니고 절도 아니고 길이었다.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니고 광기였고, 욕도 아니고 잠도 아니고 책이었고, 물도 아니고 차도 아니고 술이었고, 병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글이었다. - P69
매월당은 그날도 폭음을 하였다. 때가 이월이어서 술을 받쳐줄 음식이라고는 삶아서 무친 시래기와 짜디짠 콩자반뿐이었지만, 그로부터 못 일어나면 못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술을 두고 몸을 생각하며 마신다는 것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 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