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사상의 이력과 기원을 마련하는 데 그녀들에게 빚을 졌으며, 또한 이 점에 깊이 감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대한 세상의 평판이 아무리 나쁜 방향으로 회자되더라도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P9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표면적으로 피해자의 적극적 소명이나 가해자의 반성에 의해 좌우될 것 같지만, 실상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확률보다는 그들의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다. - P37
두려움은 우리를 잡아먹지 못한다. 그걸 한번 잘 극복하고 나면 우리 안에선 내성이 쑥 커진다. 기실 그 두려움마저도 다 내 것이다. 그러니 꽉 껴안고 대면하면서 쑥 자라보면 어떤가. 결국 용기도 두려움을 동반하여 태어나는 것이니 말이다. - P63
"데이트폭력이 아니라 그냥 폭력이겠죠. 물론 데이트 과정에서 사랑싸움 또는 사적인 다툼을 빙자하여 자행되는 폭력을 의미하는 용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걸 데이트폭력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다른 종류의 폭력이란 의미로 주입될 수 있어요. 변호사 입장에서 그건 그냥 폭력일 뿐입니다." - P91
여성들에게 유리해진 부분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중 의식이 높아져서가 아니다. 우선은 IMF 이후 가족의 부양의무를 가장에게만 떠안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 역시 늘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음으로 양으로 요구받는 것이 많고, 쉽게 비난받으며, 남성중심의 조직 하단부에서 자라다가 어느 순간 유리천장에 머리를 박는다. 이는 그저 개인의 역량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등해졌다거나 여성상위 시대라 외치기에는 아직 이르며, 이것이 미약한 스스로의 위치를 바라보며 여성들 간에 연대를 해야 하는 이유다. - P136
이처럼 ‘나이가 들면‘, ‘변호사가 되면‘,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면‘같이 내가 ‘~하면 안전해질 것‘이란 기대는 무너졌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추행은 상대의 성적 매력이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망상에서 태어나 힘의 불균형에서 꽃피는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의 나이나 외모, 직업과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고, 가해자가 점잖은 직업의 종사자이든 결혼을 했든 관계없이 일어난다. - P146
흔히 이 도시는 마치 거대한 버섯 단지처럼 보인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에는 일층보다 높이 지은 집이 한 채도 없기 때문이다. - P20
조선의 상투가 얼마나 쓸모 있는 것인지를 말해야겠다. 미국에서도 남자들이 머리를 이런 식으로 묶지 않는 게 참으로 섭섭하다. 제 권리를 지키는 여자라면 이것이 참으로 못 이룰 것이 없는 손잡이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총명한 여자의 손아귀에 상투가 잡혔다 하면 그것은 참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집 바깥에서 누가 대권을 쥐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집안에서 누가 상투를 움켜쥐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어떤 아낙이 술 취한 자기 남편을 술집에서 질질 끌고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또 화가 치민 아낙이 자기의 주인인 남편의 상투를 꽉 움켜쥐고는 푸짐하게 벌을 주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조선의 아내들은 남편이 밥을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을 들고 남편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일을 한다. 그러나 일단 집안에 어떤 위기가 닥치면 아낙이 손잡이(다시 말해서 상투)를 틀어쥐고 배를 운전한다. - P75
김화영은 번역보다 에세이가 좋았다. 다른 몇권도 찾아보았지만 이 첫 책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이 짧은 책을 아끼고 아껴 두 달 동안이나 읽었다.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 P15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오는 죽음. 그러나 카뮈에게는 카뮈의 죽음. - P70
브라이언도 씩 웃었다. 사람들은 무언의 행복을 쉬 알아차린다. -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