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정황이라면, 처절함은 차마 손댈 수 없는 정황이며, 처연함은 눈뜨고 볼 수도 있고, 손을 댈 수도 있지만, 눈길도 손길도 효력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는 상태다. - P63
그래서 슬픔은 무방비 상태에서는 느낄 수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을 때에 슬픔은 깨달음처럼 찾아온다. - P79
마지노선을 한없이 낮추거나 한없이 높이는 사람을 관전하는 일은, 내가 어느 쪽으로도 나의 마지노선을 옮기지 못하는 쩨쩨함과 근근함에 환기를 준다. - P85
이제는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됐다. 이것은 살아온 날들이 만든 현명한 태도이지만은 않다. 정념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절제 또한 아니다. 소중한 것들이 내 품에 들어왔던 기억, 그 기억에 대해 좋은 추억만을 갖고 있진 않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종의 비애인 셈이다. ... 지켜보고 있음이 꽤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은은한 기쁨을 선사해줄 거라는 패배 비슷한 믿음도 또한 있다. 그러므로 바라던 것이 나에게 도래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던 것들이 줄 허망함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외면‘이란 감정의 부축을 받으며. - P111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때를 위해서 혹은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기에,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이토록 지켜만 본다. 이 사업은 많이 적적한 일이지만, 이 적적함의 속살에는 견딜 만한 통증을 수반하는 훈훈함이 있다. - P112
엄살을 안으로만 삼켜온 자는 엄살하는 자의 엄살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며 무의식중에 내뱉곤 하는 ‘으차!‘ 하는 기합과도 같은 그 엄살을, 오랜 숙고 끝에 내미는 구조의 요청으로 해석해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이다. - P149
솔직한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과 미워한다는 말을 번복과 반복으로 발설한다. 반면, 정직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정리하여, 사랑하지만 미워한다거나, 밉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줄 안다. ... 믿음을 주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정직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정직함이지만, 진실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솔직함이다. - P200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는 않아서, 헛일했다는 공허함으로 뱃속이 허하게 채워진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지름길을 알려주던 "술, 너마저....." 하는 배신감. 이 기분은 최후까지 믿었던 자에게 당하는 배신과도 같이 내 자신을 오롯하게 만든다. - P259
봄날의 경이에 예민해지는 자. ‘그는 사랑을 아는 자다‘ 라고 조심스레 적어본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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