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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입니다만, 문제라도? 14 - L Books
바바 오키나 지음, 키류 츠카사 그림, 김성래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21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가증스러운 엘프 족장을 치기 위해 출정한 여주와 마왕은 드디어 엘프의 숲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여주는 이 일을 위해 물밑 작업을 수년 동안 해댔고, 수천 마리의 분체(사역마)를 전 세계에 보내 첩보 활동을 시키고, 엘프란 엘프는 보이는 족족 다 없애 버려 왔었죠. 이세계 시스템도 붕괴 시켜야 해서 여주는 블랙 기업에서 혹사당하는 심정이었다는 게 포인트. 이렇게 준비하고서도 엘프 족장에게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 별을 오갈 수 있는 문명까지 발달했던 고대 시절부터 살아왔던 엘프 족장은 그 시절의 기술 집약체들을 몸소 이끌었던 장본인. 그 편린이 여주와 마왕이 마족령 오기 직전에 맞닥트렸던 UFO 사건. 거기에 실려 있었던 건 대륙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수소 폭탄 "짜르붐바', 가 엘프 족장에 의해 투하되고 그걸 삼켰던 여주는 그 에너지를 이용해 신(神)으로 진화하는데 성공. 사실 표현은 없지만 여주에게 있어서 엘프 족장은 신으로 진화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긴 하죠. 신으로 진화하고 싶다고 아무나 되는 건 아니거든요. 고대 시절부터 살아왔던 마왕도, 엘프 족장도, 교황도 다다르지 못한 영역이니까요.
이번 침공에서 여주는 반 친구들과도 재회 하나 뭔가 다들 오해를 안고 있어서 제대로 대화할 분위기는 아닙니다. 전쟁 중이거든요. 현장에는 형님(여주가 가루로 만든)의 뒤를 이은 용사도 있고, 흡혈녀(소피아)는 쉭쉭하며 친구고 뭐고 싸워댈 분위기. 용사는 어찌 된 일인지 나자빠져 있고, 그걸 또 지킨다고 TS한 친구가 덜덜 떨며 위협 중. 참고로 여주 진영은 흡혈녀, 고블린(반 친구), 지고 못 사는 유고(반 친구), 엘프 진영엔 용사, TS 여친(용사의), 드래곤녀(처음 언급하나), 선생님입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침착한 고블린(반 친구)이 사태를 어느 정도 정리해 줘서 다행이긴 한데, 여주는 여기에 한 눈 팔았다가 자식들(거미들)이 엘프 족장이 출격 시킨 성게 로봇에 의해 전멸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집니다. 인형 거미 4자매는 어찌 된 일인지 부모나 다름없는 마왕보다 여주를 따라다니며 약간의 개그를 보여줍니다. 아! 그 외의 반 친구들은 싱겁게 여주가 보호했습니다. 이번 14권에서 대충 전생자들의 이야기는 이 정도고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마왕의 출생부터 살아온 과거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아울러 엘프 엘프 족장이 저지른 만행도 낱낱이 고발하고 있죠.
마왕의 과거 이야기가 좀 가슴 아프게 합니다. 실험실에서 태어나, 온갖 실험을 받으며 죽을 처지였던 그녀(마왕)를 구출해 준 건 여신(우리가 아는 여신과는 개념이 조금 다름). 그녀(여신)로부터 이름을 부여받고 그녀(여신)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이제 맘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으나 실험의 여파로 마왕은 단명할 운명. 그리고 그쯤 별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해서 멸망의 기로에 접어드는 고대 문명을 비춥니다. 이 이후는 그동안 리뷰에서 언급 해왔으니 패스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해가는 마왕의 인생 스토리가 안타깝습니다. 이 당시 마왕은 힘이 거의 없었습니다. 실험의 여파로 걷지도 못해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수건을 만들어 인연이 닿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려 하죠. 상당히 서정적인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가는 인류. 여기서 인류와 뿌리가 나눠져 탄생한 게 마족. 스스로 자멸의 길을 들어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재물을 자처하는 여신. 이 모든 걸 실시간으로 봐온 마왕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다시 현재, 마왕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여주는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역시 엘프 족장이 만악의 근원이었습니다. 인류가 별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쓰게 된 이유도 엘프 족장이 선동해서 그랬고, 뭔 사건이 터지면 그 흑막에는 반드시 엘프 족장이 있었죠(질릴 정도로 나옴). 그러니 별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도, 이세계 시스템이 도입된 것도, 여신이 제물이 된 것도 다 엘프 족장 때문. 이번 14권에서는 마왕의 이야기와 더불어 엘프 족장의 일대기도 그려집니다. 사람들을 지키려는 여신과는 정반대의 인물로 나오죠.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실험 쥐로 써댔고, 사건 사고를 일으켜 사회를 어지렵혀온 빌런 중에 빌런이었습니다. 마왕은 사실 착해서 시스템을 붕괴 시켜 인류를 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한 마디로 복수죠. 그 근본에는 여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왕은 어릴 때부터 여신의 인류를 구하기 위한 올곧은 마음을 곁에서 지켜봐 왔습니다. 우직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만났는데 자신의 행복을 찾아도 되겠건만. 모든 게 파토난 이면엔 엘프 족장이 있습니다. 마왕은 엘프 족장을 만나 조용한 불길을 피우죠. 이번 14권에서는 마왕과 엘프 족장의 최후의 일전을 그립니다. 여주는 그에 관여하지 않고 나머지 엘프들을 멸망의 길로 이끕니다.
맺으며: 엘프 족장의 목적은 핵심 스포일러라서 언급 안 했습니다. 그냥 악당이니까 인류를 못살게 굴어야지 보다는 자기 자신만 아는 부류? 어떤 목적을 위해 인류를 이용하고 선동하고, 거기에 속아 넘어간 인류는 그로 인해 매트릭스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인간들처럼 전락해가죠. 여기까지는 좋은데 왜 마왕이 그 과정에서 고통을 받고, 아무런 잘못도 없고 되레 인류를 위해 분골쇄신하던 여신이 희생되어야 하나를 마왕을 통해 묻고 있죠. 사실 여주 지인인 규리규리라는 관리자(神)도 병행해서 여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지만, 이쪽은 패스. 즉 엘프 족장은 마왕에게 있어서 반드시 없애야 될 적이었습니다. 여주 입장에서는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서 되갚아 줘야 하는 것도 있고, 할머니인 마왕을 끔찍이 아끼게 되어 가족을 건드린 놈을 없애 버려야 하는 사명감이 생겼죠. 그래서 신나게 엘프 마을을 불태우고 학살해가는 장면은 소름이 돋습니다. 비전투원이라는 표현만 있을 뿐, 파고 들어가 보면 어린이나 노약자들도 있었을 텐데 남김없이(선생님은 살려줌) 없애버리는 대목에서 얼마나 악에 받쳤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군요.
이 작품이 신선한 게, 마족이 있고 인간이 있으니 전쟁은 당연하잖아? 같이 근본 없는 판타지물을 지양하고, 왜 마족과 인간은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고대 시절 멸망해가는 이세계를 구하기 위해 관리자 D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운용 원리로 속죄하고 서로 싸워야 한다는 전재를 깔아 버렸죠. 그 이면엔 D의 유희를 위해가 존재하지만 아무도 거스를 순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마왕과 여주는 그 시스템을 없애려 하고요. 뭔가 모순이 생길만한 상황이나, 사실 마왕은 딱히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죠. 시스템이 있어도 이대로 놔두면 조금 늦을지언정 별은 반드시 멸망하게 될 테니까요. 이거에 대해선 이전 리뷰에서 언급해왔으니 패스. 이번 14권을 통해 마왕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여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왜 애니메이션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 클리셰로 자주 나오는 장면들처럼요. 여주는 눈물 콧물 없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은데 마왕에 관해서는 진정으로 아끼려는 모습에서 이런 마왕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군요.
아무튼 문제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권수가 좀 나오면 으레 일본 작가들의 고질병인 이야기 질질 끌기, 장황한 설명을 이 작품에서도 보여주는데, 하나의 장면을 놓고 몇 페이지나 설명을 해대는 장면들은 넌더리가 날 정도입니다. 10권 초반부터 장황한 설명이 시작되던 게 13권에서 본격적으로, 이번 14권은 정점에 이를 정도여서 16권 완결이 아니었으면 하차할 뻔했습니다. 돌이켜보면 350여 페이 중에 본격적인 이야기는 몇 페이지도 되지 않는군요. 대충 세어봐도 200여 페이지를 설명으로 써버렸지 않을까 싶을 정도... 굳이 이걸 알아야 되나? 같은 이야기도 있고, 그 이야기에도 장황한 설명이 들어가 있어서 환장합니다. 물론 리뷰를 요약 못하고 장황하게 써대는 필자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닙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