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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연의 성자 1 - L Novel
마사미티 지음, 이코모치 그림, 이경인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긴 글 주의
이 작품에서 참 안타까운 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제목이고 두 번째는 남의 여자를 빼앗으려면 좀 확실하게 했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거다. 라이트 노벨이라는 가볍게 보는 소설에서 무거운 제목과 무거운 소재를 쓸 수 없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이야기 요소를 그렇게 깔아놓고 결국은 주인공의 승리로 귀결 시킴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쉽게 한다. 물론 1권 만에 결론이 난건 아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추방물을 주제로 한다. 시골 마을에서 '용사'가 탄생하고 용사를 지탱할 '현자'와 '성기사'도 선택된다. 그렇다면 '성녀'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느 판타지에서 보면 이런 직업으로 구성된 파티로 마왕을 잡으러 가곤 하는데, 용사라고 하면 성선설(인간은 근본적으로 착하다)에 미쳐있고 마왕을 무찌르면 평화가 찾아올 거라는 믿어 의심치 않는 올곧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할 것이다. 이런 용사를 지탱하며 현자, 성기사, 성녀도 함께하게 된다.
그런데 꼭 여성만 성녀가 되란 법은 없다. 성녀의 직책을 남자가 가지게 되면 '성자'가 된다. 성자는 이 작품의 주인공 '러셀(남자)'이다. 성자의 클래스는 신관으로 요컨대 회복술사다. 모 작품의 회복술사처럼 자기 좋을 대로 회복을 쓰는...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은 그 회복술사에서 19금 요소를 뺀 하위 호환쯤 되지 않을까도 싶다. 아무튼 어릴 때 목검으로 마을에서 주인공을 이길자가 없었는데 어째서 주인공을 성자로 만들었는지 이 세계의 여신은 주먹구구식이다. 그렇게 용사, 현자, 성기사, 성자는 마을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게 되고 던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용사가 나왔으니 마왕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작품에서 마왕은 무려 던전을 만드는 던전 메이커(설계자)라고 한다. 마왕은 던전 최하층에서 용사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용사와 유쾌한 파티는 뭐 빠지게 던전 클리어해가면서 최하층에 도달해서 마왕을 무찌르고 던전을 비활성화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어디서 추방 씬이 생기는가 궁금할 것이다. 성자는 회복을 담당한다고 위에서 언급했는데, 그렇다면 다른 클래스 가령 용사나 현자나 성기사도 회복을 쓰게 되면 성자의 입지는 어떻게 될까?라고 이 작품은 묻는다. 성자는 공격 마법을 쓰지 못한다. 그렇다고 검술이나 체술 등 물리력 행사도 못한다. 회복 밖에 못 쓰는 성자, 다른 클래스에서 회복을 쓴다면 성자는 필요 없게 되는 건 당연해진다. 그래서 주인공은 파티에서 추방된다. 매우 심플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주인공은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근데 마을로 돌아오니 마물에 습격 당하는 미모의 여성이 있다. 이름은 '시빌라(표지 여성)'라고 한다. 하나의 이별을 겪은 주인공에게 새로운 만남을, 여신은 천칭이 기울어지지 않게 운명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은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서 이제 여신을 믿지 않는다. 아무튼 '시빌라'를 구해주게 된 주인공은 그녀와 함께 던전에서 열렙하는 일상을 보내게 되는데....
단순히 이런 이야기였다면 필자는 도서를 집어던졌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것은 NTR 요소와 가스라이팅을 들 수가 있다. 물론 NTR이라고 해서 19금적인 요소는 없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파티에서 짐짝 취급 당하며 쫓겨난 게 아니라고 역설하기 시작한다. NTR 할 때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를 취하려면 남자를 떼어 놓는 게 우선일 것이다. 주인공은 그런 작업을 당한 것이고, 문제는 그런 작업 당한 걸 주인공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동인지 19금 NTR 요소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보통 이런 주제는 가슴을 매우 두근두근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야 여친이 다른 남자에게 농락 당하기 전에 구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과정이 매우 흥미롭고 가슴 졸이게 만드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히로인 '에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줬던 주인공을 좋아하고 있다. '에미'는 성기사다. 그녀는 용사를 따라나서는 주인공을 따라나선다. 작품을 읽다 보면 그녀가 왜 성기사 클래스로 선택되었는지 참으로 구구절절하게 느껴지게 된다.
에미는 용사와 같이 다닌다. 용사는 주인공을 쫓아낸 장본인이고, 에미는 주인공을 도와준다는 게 그만 힘을 너무 쓰는 바람에 쫓겨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NTR에 있어서 엇갈림은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용사는 에미를 노리고 있다. 에미는 시종일관 자신 때문에 주인공이 쫓겨났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 죄책감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렇담 주인공은 어떤가? 주인공은 버림받았다는 충격에 에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중에도 없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둔한 캐릭터다. 그는 시빌라와 함께 마을 근처에 새로 생긴 던전에 들어가 열렙을 하는데, 성자가 아무리 열렙 해봐야 회복술사일 뿐이다. 사람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최강의 직업이 성자라지만 치료할 일이 없다면 길가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두 번째 포인트인 '가스라이팅'이 시작된다. 시빌라는 왜 주인공의 마을에 왔는가. 시빌라는 왜 주인공과 같이 다니게 되는가. 공격 마법을 쓰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시빌라는 슬슬 가스라이팅으로 자신의 힘을 가르쳐주려 한다.
이제 NTR 요소는 뒷전으로 미뤄지고 가스라이팅이 대두된다. 파티에서 쫓겨나 복수심 비슷한 삐뚤어짐을 가지게 된 주인공의 마음에 침투하기란 누워서 떡 먹기다. 회복술사가 던전에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주인공에게 시빌라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자신의 힘을 받아들이라 한다. 스포일러가 돼서 시빌라의 정체를 밝힐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생각해보니 핵심 스포일러라서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세상에서 대가 없는 친절과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미녀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주인공은 거기에 홀랑 넘어간다. 소꿉친구(에미)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주인공은 나이를 헛먹었는지 세상 물정이 매우 어둡다. 그러니 파티에서 쫓겨나지 같은 생각도 들게 하는 게 주인공의 성격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성격이니까 성자로 선택된 게 아닐까도 싶기도 하다. 결국 시빌라에게 휘둘려 가는 주인공, 이 작품의 제목인 흑연의 성자는 이렇게 탄생한다.
아무튼 NTR 요소는 나름대로 쫄깃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전연령가라서 그렇고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별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게 되고, 캐면 캘수록 주인공이 병sin 같다는 느낌이 장난 아니게 된다. 읽다 보면 주인공은 타인의 호감에 둔한 것도 정도가 있지의 표본으로 다가온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용사가 바람둥이라는 걸 들었음에도 에미의 위기를 알아채기는커녕 날 버린 주제에 같은 생각만 가질 뿐이다.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이거다. NTR 요소로 보다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점은 작가가 소심해서 일까? NTR 하는 용사는 또 어떤가. 하려면 좀 과감하게 하던가 순진한 어린애 같은 모습만 보일뿐 손댈 생각을 안 한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 정작 선을 넘지 않는 NTR이라니 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사실 끝까지 읽다 보면 NTR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다. 진짜 중요한 건 사람의 마음, 감정이라고 역설한다.
어쨌거나 용사 파티에도 '케이티'라는 신규 여성 캐릭터가 합류한다. 글이 길어져서 그녀를 언급할까 말까 했는데 나중에 2권 리뷰 하려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케이티도 시빌라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용사 파티에 들어와 선의란 이렇게 무서운가 싶을 정도로 착하게 굴면서 용사 파티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 장면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에미에게 미치는 영향이 막대해서 그녀(에미)를 망가지게 하는 원흉이 된다. 케이티도 시빌라와 마찬가지로 뭔가의 목적을 위해 성자를 찾는 듯한데, 그녀가 주인공을 만나게 되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까 같은 복선을 만들면서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해진다. 사실 주인공과 시빌라의 열렙 이야기는 왜 넣어 놨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없다. 아직 1권이라서 그런지 스킬이라던가 렙업 등의 이야기들로 충만할 뿐, 진짜 이야기는 막간 에피소드로 진행되는 용사 파티의 에미 그리고 케이티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준다고 할까. 특히 주인공을 바라보는 에미의 애틋한 감정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맺으며: 이 작품의 키포인트는 시빌라와 케이티다. 그녀들이 성자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가 이 작품의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주인공은 시빌라를 만나 매우 강해지지만 가스라이팅 당하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이게 흥미 포인트라면 흥미 포인트일 수 있다. 주인공과 시빌라의 만담 같은 개그는 볼만하다. 손날 날리며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이 훈훈해지기도 한다. 힘을 합처 던전을 클리어해가고, 마왕을 만나 너 죽을래? 그러며 싸우는 장면들은 무난하게 흘러가는데 역시나 주인공 보정이 있으니 크게 고전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작품은 전투보다 마왕의 존재, 마왕과 시빌라와 케이티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느낌이다. 주인공은 시빌라에게 이용당하나? 같은 알기 쉬운 복선은 작가의 배려로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인간의 감정을 가미하면서 인간성을 부각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 부분만 놓고 본다면 이 작품은 수작까진 아니어도 평타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온갖 NTR 요소는 다 집어넣어놓고도 활용하지 않는 점, 용사가 NTR을 위해 많이 분발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스킬과 렙업과 직업 설명이 너무 많다. 학을 뗄 정도라서 NTR이라는 흥미요소가 퇴색해버리고 만다. 주인공으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에게서 용사의 성격을 듣게 해놓고도 그에 따른 후속 조치를 전혀 하지 않는 작가의 센스는 빵점을 넘어 마이너스다. 딴에는 주인공을 둔한 캐릭터로 만들고 후반에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히로인을 좋아하거나 맞아들이는 캐릭터로 만들려고 했나 본데 후반 뜬금없이 진행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해버린다. 결정적으로 던전에 들어갈 때 준비는 기본이지만 너무 기본에 충실해서 그에 따른 쓸데없는 분량으로 식상하게 한다. 결론 용사와 에미등 주변 인물로 만 본다면 매우 흥미로운데, 주인공과 시빌라만 놓고 본다면 전혀 흥미롭지 않다. 만담으로 밝게 이끌어 간다고는 하지만. 2권부터 어떻게 전개될지에 따라 작품의 흥미도가 명확히 갈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