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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환상의 그림갈 9 - 여기 있는 지금, 아득히 먼 곳으로, NT Novel
주몬지 아오 지음, 이형진 옮김, 시라이 에이리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다룽갈에서 그림갈로 넘어왔지만 여긴 오르타나에서 600키로나 떨어진 곳 사우전드 밸리라는 울창한 산림지대, 1년 내내 지독한 안개로 뒤덮인 이곳에서 하루히로 파티는 갈피를 못 잡고 여전히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인간 측 모험가 록 파티와 조우하여 안심한 것도 잠시, 지능 있는 몬스터의 집합체 포르간과 록 파티간 시작된 전투는 치열해져만 갑니다. 그리고 포르간에 붙잡힌 메리를 구출한 하루히로에게 리더로서 분기점이 찾아옵니다.
하루는 메리를 구출하여 안전한 장소에 머물게 되었지만 유메, 시호루, 쿠자크가 낙오되어 버렸습니다. 낙오라기보다 록 파티와 포르간의 전투에 끼여 오도 가도 못했다고 해야겠지만요.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는 유메, 시호루, 쿠자크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들은 전투 중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펼쳐 갑니다. 뭉쳐 있어도 될까 말까 한 파티인데 쪼개졌을 때는 가망이 없다고 해야겠죠.
하지만 이때까지 시궁창에서 굴러온 짬밥이 있고 아직 사망 플래그를 세우지 않았는데 리타이어 시키기엔 이르다는 것처럼 유메와 시호루, 쿠자크는 악착같이 살아남습니다. 유메는 한창 적과 싸우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처럼 휴전을 하고 친구가 되는 모습에서 역시 그녀 다운 성격이다라는 모습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시호루는 많이 의젓해졌습니다. 노다지 울고, 침울하고, 뒤에 숨고, 주저하고, 우물우물 거리며 발암적인 모습을 보여왔던 그녀도 이젠 적과 마주하며 끝까지 분전할 만큼 성장하였습니다. 쿠자크... 이놈은 그냥 땅에 처박혀 있기만 했을 뿐 한 게 없으니 패스하고요.
이번 에피소드는 뿔뿔이 흩어져 봤기에 파티의 소중함을 알아가고 기억을 잃은 채 그림갈로 넘어와 마주한 파티가 가족이 되어가는 장면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나토가 죽고, 모구조가 죽고, 메리가 들어오고, 쿠자크가 들어오고, 란타가 배신해도 가족이라는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파티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구원받는지 메리가 하루를 바라보며 마음을 표현하는 마음은 한편의 시와도 같습니다.
'나는 당신 옆이 아니어도 좋아. 뒤여도 좋으니까, 거기에 내가 있을 장소를 원해. 살아 있는 한은 나는 내 일을 할 테니까.'
절절하게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메리의 마음, 이것은 파티 모두가 하루를 바라보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림갈에서 진작에 사그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찌끄레기 인생들만 모인 파티를 지금까지 잘도 이어 왔습니다. 하루는 동료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며 겸손을 보이지만, 서투른 청춘이 모여 가슴 아파하고 좌절해도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유일하게 비춰주는 빛처럼 그의 등을 바라보며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는 메리, 돌이켜보면 이것은 사망 플래그...
일단 흩어진 동료를 불러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도움을 받았던 '세토라'라는 사령술사 여자애가 하루히로 파티에 편입합니다. 사우전드 밸리에서 숨어사는 일족 중 한 명인 그녀는 '냐아'라는 고양이 몬스터를 길들여 사역마로 부리고 있었고 이걸 이용해 하루는 메리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흩어진 유메와 시호루, 쿠자크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 세토라는 하루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가 질릴 때까지 연인 행세를 해라' 이로써 메리와 하루의 연애전선에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거부는 불가, 세토라가 없으면 유메와 시호루, 쿠자크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포르간의 위협에서도 벗어 날수 없기에, 그리곤 하루에게 우리 애 만들자고 천인공노할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꺼내 메리를 질색하게 만들고 다른 여자 쳐다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등 얀데레 이상의 캐릭터가 나와 버렸습니다. 6권에서 나왔던 안나가 조금 더 성장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했군요. 손가락 욕도 서슴치 않았던 안나에 더해 세토라는 그보다 더 한 욕 같은 말을 꺼내버리고 하루는 초식남에 어울리게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보는 메리는 이게 질투인지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세토라가 참가하면서 이야기가 사뭇 재미있어지는데요. 하루 입장에서는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 같은 상황에 몰려 버렸습니다. 거기다 눈 한 짝도 바치기로 했군요. 6권에서 하루가 좋다며 엉엉 울던 미모리라는 호랑이를 피했더니 표범이 나타났습니다. 메리를 견제하며 너, 하루 애 가지게 하지 않겠다는 둥 기겁할 말을 마구 쏟아 냅니다. 당연히 메리는 그럴 일 없다며 못을 박고 하루의 마음에도 못을 박고(표현되진 않지만요.), 그러다 하루의 애...라며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은근히 그런 쪽도 신경 쓰는 귀여운 모습도 보여줍니다.
어쨌건 질릴 때까지 연인 행세를 하라고 했으니 세토라가 하루 파티에 들어오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하루 입장에서는 사우전드 밸리에 있을 때라면 천군만마를 얻게 되겠지만 오르타나로 돌아가게 된다면 한낱 여자애일 뿐인 세토라, 폐쇄된 마을에서 자라서인지 성 지식에 어딘가 결여를 보이고 남을 안하무인으로 여기고, 마치 어린 딸이 아빠를 두고 엄마와 이성간 싸움을 하는 말도 안 되는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안나가 그리웠던 필자에겐 단비와도 같은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데 일단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맺으며, 재미있긴 한데 이번 에피소드에서 문제점이 딱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점요. 뭐냐면 사설이 너무 길어요. 마치 공격 헬기가 낙오된 전차 한대를 발견해서 이걸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까 아니면 대전차 미사일로 일격에 보낼까, 엔진을 부수는 게 낫겠지? 안에 있는 병사들도 죽여야 하나? 죽이고 묻어줘야 할까? 아니 아니 먼저 사령실에 연락해서 이거 없애도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닐까? 돌아가는 연료는 충분한가? 저것들 느닷없이 대공 미사일 쏘는 거 아니지? 이봐(뒤에 있는 조종사) 넌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조종사는 이런 답을 내놓습니다. '낸들 알아?' 뭔 똥을 이리도 가늘게 누냐고요.
그리고 똥 덩어리 란타의 반란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