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마왕이 있으면 퇴치하는 게 판타지 룰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 마왕이 주인공이라는 것이고. 뭐 사실 세계 정복 야욕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는지 성스러운 기사들이 파견되면서 주인공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퇴치 운동이 벌어지지만 호락호락 당해줄 주인공은 아닌데, 그 과정에서 주인공만 이세계에 진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죠. 본 작품은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하던 게임의 시스템을 이세계에 적용할 수 있으며, 이들을 플레이어라 부릅니다. 이 시스템은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효과를 보이기도 합니다. 테이블 토크 RPG(가령 유X왕 같은)의 세계관을 가진 플레이어 '쿠하라'의 경우 GM(게임 마스터)의 권한을 이용해 주인공의 심복이자 메인 히로인인 '아투'를 빼앗고 주인공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하였죠. 즉, 플레이어끼리 부딪혔을 경우 어느 게임 시스템이 우위를 가지느냐에 따라 전황이 달라진다는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 구사하는 플레이어의 머리가 모자라면 패배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전략 구사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소리인데요. 주인공은 지구에 있을 때 병석에 누워 하루 종일 게임만 하던 속칭 오타쿠에 가까웠죠. 머리 구사 능력은 세계 1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다굴엔 장사 없다고 하잖아요. 주인공에 대항하고자 대륙 거의 모든 세력이 손을 잡으면 어떨까?
그렇게 탄생한 게 서큐버스 진영. 그녀들은 출현하자마자 엘프 진영을 순식간에 접수하고 성녀의 나라와 손을 잡아 버렸습니다. 그 외 여러 조직과도 손을 잡고 정통 대륙 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주인공을 함정에 빠트려 잡으려다 실패한 후 선전포고를 때렸죠. 참고로 주인공과는 다른 대륙이고, 주인공 세력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궁지에 몰렸습니다. 서큐버스 진영을 이끄는 '바기아'는 마녀로서 얘도 플레이어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능력은 주인공 보다 강력하여 첫 번째 조우 때 주인공 진영을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었습니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주인공은 일생에 단 한 번 쓸 수 있는 능력으로 절대 불가침 영역을 만들어 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정도였죠. 이 영역의 유지 기간은 1년. 이 기간 동안은 주인공이 하던 게임 시스템이 강제적으로 개입하여 모든 무력은 금지가 됩니다. 주인공은 이 1년 동안 정통 대륙 연맹에 맞설 세력과 실력을 키워야만 하죠. 땅이 척박하여 농사는 지을 수 없고, 초목은 자라지 않아 황무지나 다름없는 암흑대륙. 이런 대륙이라도 사람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긁어모은다 해도 정통 대륙 연맹과 맞설 수 있을까. 자원은 유한하고 풀가동해도 강력한 유닛 하나 뽑기 힘든 상황. 그렇다면 어제의 적을 오늘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어떨까. 예전에 주인공에게 한번 패배했던 플레이어가 결판을 내기 위해 찾아옵니다. 문득 이넘을 포섭하면 어떨까? 보아하니 바보 같은데, 잘 구워삶으면 내 편이 될 거 같습니다.
맺으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설정이 참 독특한 작품이죠. 비단 게임 시스템만이 아니라 성녀 관련해서도 정도의 길보다는 사도의 길을 가는 특징을 보입니다. 신(神)에 의해 성녀로 발탁되지만 그건 네가 바라서 시켜주는 거다? 그러니 등가교환으로 넌 나(神)에게 뭘 줄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 등가교환이 굉장히 살벌하죠. 살던 마을을 멸망 시키게 하고, 기억을 빼앗고, 젊음을 빼앗고. 그럼에도 너는 성녀로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성녀란 무엇인가. 그렇게 얻은 성녀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기본 틀로서 성녀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녀를 사냥합니다. 하지만 마녀와 손잡고, 플레이와와 손을 잡는 성녀들이 있습니다. 신(神)은 이런 관계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 주인공이라는 이레귤러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죠. 그리고 그 등가교환 때문에 고통을 받는 성녀들이 있다는, 가령 기억을 모조리 빼앗겨 공허함만이 남아 비참하게 살아가는 성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하지만 능력은 절대적). 그렇다면 그녀들을 구원하는 건 주인공일까? 그런 클리셰가 없다는 것이 본 작품의 매력이죠. 아무튼 주인공과 결판을 내기 위해 찾아온 플레이어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5권에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죠. 주인공에게 패하고 죽은 줄 알았더니 재기에 성공하였습니다. 머리가 좀 나쁘지만 혀는 잘 돌아가서 성녀들을 꼬드기는 장면은 예술 그 자체였습니다. 어쨌거나 1년이라는 유예기간이 지나고 서큐버스 진영과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작가가 여기서 끊는군요. 일본에서도 아직 9권이 안 나온 거 같던데, 여기서 끊으면 어쩌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