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탐험가 레벨 9 승급 시험 치르기 위해 부유 도시 '코드'에 잠입한 주인공. 부유 도시 코드는 고대 문명의 산물로서 라퓨타의 그 라퓨타처럼 상공에서 지상을 쓸어 버릴 수 있는 병기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이제 고대인들이 살아 있지 않아 이걸 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고, 그동안 저 멀리 있어서 남일처럼 생각했던 이 병기가 주인공이 사는 도시로 진격해오지 뭡니까. 수십 년 전에 위기를 깨닫고 탐협에서 한번 기습을 걸었지만 보기 좋게 궤멸되어버린 전적이 있었는데요. 탐협에서는 또다시 닥친 위기에 마침 눈에 거슬리는 주인공을 없애버릴 겸(약간 각색) 레벨 9로 승급 시험이랍시고 구라 치고(약간 각색) 파견을 보냈죠. 저걸 어떻게 좀 해보라고. 못하겠으면 거기에 있는 왕족들이라도 보호해서 빼내면 코드가 멈추지 않을까 해서 주인공을 보냈는데요. 당연히 주인공에겐 그럴 능력 따윈 없습니다. 그저 운에 따라 흘러갈 뿐. 아무튼 코드에는 약 200년 전에 도적들이 흘러 들어가서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웠더군요. 초고도 문명으로 모든 게 자동으로 이뤄지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밥도 자동으로 나오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꿈의 낙원이었습니다. 낙원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차기 왕권을 두고 왕자와 왕녀들(이하 왕족)간 전쟁 직전의 상황이었죠. 주인공은 그중 막내 왕녀 아리샤의 근위로서 위장 취업에 성공합니다.
주인공에게 떨어진 특명은 왕족을 보호해서 코드의 운영권이 소실되게 하고 코드를 어떻게 하라는 것인데, 이 작품의 특징은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가 내뱉은 말이 와전되어 상대가 알아서 부풀리고 알아서 자멸하고 알아서 해결되고, 그 공로는 주인공에게 갑니다. 그 공로는 쌓이고 쌓여 전설이 되고요. 아리샤의 근위가 된 주인공은 자기가 할 일(왕족 보호)은 다른 시험자에게 떠 맡기고 관광하거나 보구를 찾거나 사리사욕에 눈에 돌아가 있습니다. 특명 따윈 누가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밖에서 뭔가 거물이 왔다 싶어 경계한 왕족들은 그의 기행에 얼빠져 하죠. 아무렇지 않게 남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반말을 지껄이고, 질서를 무너트리고 상식을 파괴합니다. 주인공에겐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죠. 의문을 가지는 상대에겐 왜 그러지? 하며 되레 너 님이 이상하다는 식으로 나오니까 상대는 열받아 하고, 열받아 하면 왜 열받아? 하며 긁어대니 온통 적을 양산하는 게 이 작품의 주인공의 특징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뭔가가 풀리는 것도 있어서 없애지도 못하는 딜레마를 안겨주는 게 더 고약하죠. 이번에도 왕좌를 두고 대립하는 왕족들을 긁어대며 그들에게 극한의 스트레스를 안겨줍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들이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죠.
이번 12권에서는 시종일관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속한 비탄의 망령을 본뜬 비탄의 악령이라는 파티원들과 재회해서 그들의 도움을 받고(전적으로 떠넘기고), 아리샤의 근위로서 그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도와주게 되며 왕좌의 난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하죠. 아리샤는 왕좌 계승전에서 계승자들이 몰살 당할 때를 대비한 예비로서 태어날 때부터 갇혀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살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아니고요. 그는 남 일에 무관심하고 귀찮아하니까요. 본 작품은 그저 그의 말이 와전되고 부풀려져서 일이 해결되는 개그물입니다. 아리샤는 무심하게 툭 던져진 주인공의 말에 밖을 동경하게 되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아직 죽지 않은 코드의 왕은 그런 막내를 보며 그동안 자식들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가족의 정을 깨달아 갑니다. 강한 왕을 만든답시고 괜히 왕좌에 집착하게 해서 자식들끼리 싸우게 했다는 자책감 등, 주인공이 툭 던진 말들로 인해 후회의 장이 펼쳐집니다. 잘하면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음에도 정작 주인공은 자신의 업적을 모르는 눈치죠. 그저 툭 뱉은 말이 와전되고 부풀려져서 코도의 상황을 뒤집어 놓죠. 그것이 뻥튀기 되어 주인공을 더욱 고평가 하게 하고요. 이런 주인공이 코드를 정지시킬 수 있을까. 아리샤는 갇힌 방에서 나올 수 있을까.
맺으며: 종이책 기준 460페이지라는 꽤 긴 분량이면서 솔직히 알맹이가 없습니다. 뭔가 일이 진행은 되는데 머리에 들어오는 건 없더군요. 레벨 9 승급 시험이 메인이면서 왕좌의 난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런가. 각 진영의 상황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원래 그런 성격이라지만 의욕 없는 주인공의 행동은 지치게 만듭니다. 왕족끼리 대립이라는 설정이면 그에 따른 전투씬이라도 넣어 주던가. 갈등이라도 좀 리얼하게 해주던가. 주인공과 같이 시험 치르러 온 두 명은 일찌감치 리타이어 해서 김빠지게 하고, 대체 작가는 뭘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만 들었군요. 작가도 이건 아니라고 여겼는지 중반 이후부터 이라샤를 띄워주며 싸움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미소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힐링물 전개를 보여주는데 되레 뜬금이 없었군요. 이게 어딜 봐서 레벨 9 승급 시험인가 싶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아리샤의 행동이 조금 귀여워서 최악의 상황(책 집어던지기)은 없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주인공에게 내려진 과제가 코드의 기동 정지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인지. 왕좌를 놓고 기싸움 중인 자식들이 안타깝고, 그렇게 만든 자신이 싫은 왕을 보여주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려면 좀 일찍 해주던가, 이야기를 11권부터 시작해놓고 12권 중반 넘어서 그런 설정 넣어봐야 늦은 거 아닐까요? 착각 개그가 재미있어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닐까 싶은 12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