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용희(龍姬) 姬가 아니라 嬉 같기도 한데, 뭐 아무렴 어때요. 이번 2권은 용희 키리셰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용족을 이끄는 어마 무시한 실력자였죠. 300년 전까지는요. 당시 천계와 마계와 지상(인간족)과 싸움을 해대며 세상을 어지럽히던 그녀는 영용(영웅의 윗단계) 엘라인에게 두들겨 맞고 전쟁을 그만둬야 했죠. 이후 그의 동료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다 세계를 집어삼키던 종언 전쟁을 종식 시키는데 일조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때 입은 상처로 300년 가까이 치료를 목적으로 봉인되었다 깨어나 보니 엘라인은 이미 세상에 없었죠. 대신에 그와 똑닮은 주인공 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겉모습만 같을 뿐 능력은 엘라인 발치에도 못 미치는 그를 조소하기보다는 그와 다시 세계를 여행하는 기쁨을 찾습니다. 300년 전 동료였던 대천사 피아와 전(前) 마왕 엘리제와 합류한 키리셰는 렌을 필두로 해서 300년 전 엘라인이 남겼다는 앙코르(세계록)를 찾아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앙코르, 영용 엘라인이 세계를 여행하며 유적이라든가 정령 서식지 등을 가록 해둔 보물지도 같은 것으로 이것을 손에 넣는 자는 세계를 얻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세계는 이것을 얻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주인공 렌을 필두로 한 히로인들도 파티를 맺고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들은 보물의 유무보다는 엘라인과 함께 했던, 옛 동료(엘라인)가 남긴 추억 그 자체이기에 꼭 찾고 싶은 것입니다.
필자는 여기서 현실에 빗대어 봤습니다. 만약 지금 내 여친이 예전에 사귀던 남친을 잊지 못해 추억의 물건을 찾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모른척해 주거나 공감을 표해줘야 할까? 물론 주인공 렌과 히로인들은 아직 이성으로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내비치고 있지 않으니 사귄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여기서 아쉬운 게 이런 부분이죠. 주인공을 속 좁은 남자로 만들 것인가, 공감을 표해주는 대인배로 만들 것인가. 주인공은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죠. 히로인들이 영용 엘라인을 쏙 빼닮은 주인공 렌을 만나고 그와 같이 여행길에 올랐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 것이라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아니기에(용족, 마족, 천사) 사람의 마음이 없다는 걸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 게 이런 부분이었는데요. 그저 다시 세계를 여행한다는 두근 거림만 있다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인공을 향해 호감과 알몸을 보이는 것에 쑥스러워 하는 상황은 이게 사람으로서, 이성으로서의 호감일까 그런 느낌도 있습니다. 사실 앙코르를 찾는 개연성을 부과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앙코르를 찾으면 엘라인이 그녀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녀들이 거기에 감정이입을 한다면 주인공 렌은 패배자가 되겠죠. 뭐 이미 10권으로 완결되었고, 결과는 나와 있을 테니 필자가 아무리 고찰한들 무의미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앙코르가 있는 곳의 단서와 키리셰의 치료(봉인의 여파)를 위해 용의 계곡으로 향합니다. 일전에 고위 마족을 처치하면서 주인공 일행은 일약 스타가 되었고, 영용 엘라인의 재림이 아닌가 하는 칭찬의 말도 들리기 시작했습니다만, 주인공 렌 본연의 실력보다는 영용 엘라인의 그림자를 찾는 것에서 씁쓸함이 묻어 나오죠. 아무튼 가던 길에 신전에서 새로운 정령도 줍줍하고 용의 계곡에 도착은 했습니다만. 키리셰(언니)를 아끼는 여동생이라는 클리셰가 발동합니다. 이 무슨 유희왕 카드 게임도 아니고. 언니는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뼈다귀인지 모를 너 님에게는 못 줘 이럽니다. 아 좀. 언니를 대려 가고 싶으면 여동생을 뛰어넘어라. 여친 집에 인사하러 간 남친이 장인어른에게 인정받는 그런 꼴이죠. 여동생도 용족이고, 용족은 오래 살죠. 오래 살면 꼰대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걸, 세상과 고립되었고, 오래 살고, 자신들만의 고정관념으로 살아가며 새로운 사고방식은 받아들이지 않는 꽉 막힌 사람들을 여동생으로 표현해놨는데 참 현실적이었습니다. 여동생은 봉인의 여파로 쪼렙이된 언니와는 능력적으로 다르다는 걸 보여 주죠. 이에 주인공도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영용 엘라인과 쏙 빼닮았지만 능력은 없는 가짜 놈이라고 괴롭힘을 당해왔던 주인공이 가진 단 하나의 능력, 정령에게 사랑받는 체질. 성녀에 비견될 정도로 정령에게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 그 정령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해 가는 장면들이 참 인상적이죠.
맺으며: 주인공은 개천에서 용이 되었습니다. 영용 엘라인과 쏙 빼닮아서 그에 따른 비교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해 왔던 주인공이 고위 마족을 물리치면서 일약 스타가 되어 버렸군요. 영웅물이란 이래야죠. 이세계 전생하며 신에게 치트를 받아 먼치킨인 되는 쭉정이 같은 넘들 말고, 흙바닥을 기고 똥물을 마시며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워 인정받는다. 주인공 렌은 그렇게 성장했고, 그 값어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군요. 주인공은 보통 사람은 보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정령에게 사랑받는 체질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죠. 세계에서 정령과 대화할 수 있고 능력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성녀 단 한 사람. 그런데 주인공도 비슷한 체질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주가는 매일 상한선입니다. 정령은 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전략 병기거든요. 사실 무능력 먼치킨이라는 클리셰 범주이기도 하니까 호불호는 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노력 자수성가형에 무능력 먼치킨 끼얹기? 아무튼 필자는 그런 것보다 주인공이 용희 키리셰를 다시 세상 밖으로 대려 가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상당히 흥미로웠군요. 꽉 막힌 꼰대처럼 옛 관습에 사로잡혀 언니(키리셰)를 붙잡아 두려는 여동생에게 언니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며 설득해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죠. 리뷰에서는 여동생에 관해 비하하듯 가볍게 언급했습니다만, 의외로 말하면 알아듣고 대결의 승패에 순응하는 정상인이어서 호감이 갔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싫든 좋든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군요. 고위 마족으로 처치하면서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정령 문제로 성녀가 관심을 보이고, 앙코르에 적혀 있을 300년 전 종언 전쟁에 관한 진실에 다가가는 주인공에게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2권이었습니다.